넘버링 무비는 영화 작품을 단순히 별점이나 평점으로 평가하는 것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넘버링 번호 순서대로 제시된 요소들을 통해 영화를 조금 더 깊이, 다양한 시각에서 느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편집자말]

ⓒ 리틀빅픽처스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01.

올해로 22회째를 맞이한 부산국제영화제의 개막작은 신수원 감독의 <유리정원>이 선정됐다. 이 작품은 '급성 구획 증후군' 투병으로 연기활동을 중단했던 배우 문근영의 복귀작으로 알려져 관심을 모았다. 문근영은 지난 2006년 개봉한 영화 <사랑따윈 필요없어>를 마지막으로 모습을 거의 드러내지 않았던 터라(2014년 이준익 감독의 영화 <사도>에서 혜경궁 홍씨로 잠시 등장한다) 더욱 화제가 됐다. 그녀에게도 이 작품은 의미가 있다. 아역시절부터 많은 사랑을 받아온 문근영은 국민 여동생이라는 타이틀을 벗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유리정원>의 '재연' 역을 통해 문근영은 관객에게 자신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02.

영화 <유리정원>은 여성의 그릇된 믿음을 통해 그 속에 담긴 아픔과 상처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엽록체와 관련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생물학도 재연이 자신의 연구에만 몰두하던 가운데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고 상처받고 깊은 숲속에 위치한 유리정원으로 들어간다. 믿고 있던 이들에게 짓밟힌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증명하기 위해 아픔을 견디며 왜곡된 사랑을 이어나가는 재연. 이를 이용해 성공하고자 하는 소설가 지훈(김태훈 분). 지훈의 소설 속 이야기와 재연의 모습은 함께 뒤섞여 현실과 환상 사이에서 다양한 가치를 짚어낸다.

신수원 감독은 이번 작품을 통해 개인의 그릇된 믿음이 초래할 수 있는 잔혹한 결말과 성공만을 바라보며 맹목적으로 덤벼드는 인간의 모습의 모습을 그린다. 이는 영화 <명왕성>(2012), <마돈나>(2014) 등 자신의 전작을 통해 꾸준히 관심을 보인 자본주의의 어두운 면과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부분이다.

유리정원 스틸컷 유리정원 스틸컷

ⓒ 리틀빅픽처스


03.

기본적으로 신수원 감독은 자신의 작품에서 자본주의 사회가 갖고 있는 병폐 그리고 이에 희생당해 사회에서 도태된 이들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과거 <명왕성>에서 준(이다윗 분)이라는 인물이 입시제도에 희생당하는 모습을 그렸던 것처럼 말이다. 이번 작품의 재연 역시 다르지 않다. 선천적으로 다리에 장애를 갖고 태어난 그녀(그녀 스스로는 아버지가 벌목으로 저주를 받아 자신이 그렇게 되었다고 믿는다)는 시작부터 핸디캡을 안고 있는 인물이다. 영화 속에서는 그녀가 치마 입기를 주저한다거나 믿고 의지하던 교수(서태화 분)에게 흉하지 않냐고 묻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렇다고 재연이 자신을 꾸미는 데 익숙한 인물도 아니다. 수희(박지수 분)는 성공하기 위해 화장을 하고 담당 교수를 유혹해 연구소의 운명이 걸린 프로젝트를 얻어낸다. 이에 비하면 재연은 한없이 순수하기만 하다. 영화 초반부에서 재연과 교수는 풋풋한 키스 장면을 연출한다. 그러나 적어도 이 작품에서 그런 풋풋함은 냉혹한 사회 앞에 아무런 의미도 얻지 못한다. 재연은 수희에게 자신의 연구 결과를 모두 빼앗기고 교수를 찾아간다. 집 마당에서 사랑으로 가득 찬 두 사람의 신음을 들으며 재연은 구두에 올라선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는 이 모든 결핍에 대한 원망과 슬픔이 내포돼 있다.

04.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넘어가게 된 연구 결과, 그로부터 파생된 수희의 연구를 망가뜨리며 재연은 처음으로 적극적인 행동을 보인다. 여기서 시작된 변화는 모든 것들을 바꾸어 놓는다. 물론 이후 그녀의 행동들은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의 기괴한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재연이라는 인물이 가진 순수함과 초록빛으로 가득한 화면의 조합은 묘한 여운을 남긴다. 재연은 죽은 교수를 휠체어에 태워 다니며 나무가 되기를 기다리고 또 유리정원 앞의 거목에 수액을 놓는 순진한 모습도 보인다. 두 장면은 보는 이들에게 더욱 괴리감을 느끼게 만든다. 영화의 처음에 등장했던 재연이 평범한 환경에서 지냈다면 과연 그런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을까? "순수한 것이 가장 오염되기 쉽다"는 대사야말로 재연의 변화와 광기를 잘 설명해주는 대목이다.

유리정원 스틸컷 유리정원 스틸컷

ⓒ 리틀빅픽처스


05.

한편 '언더그라운드'라는 주목할만한 작품으로 문단에 입문한 지훈은 변변한 후속작 하나 제대로 내놓지 못하고 있다. 지훈은 이창대(김세동 분)라는 문단의 거목의 표절을 비난해 거의 쫓겨나다시피 한다. 함께 지내며 의탁하던 여자친구의 집에서도 짐을 빼야 하는 상황이 됐다. 지훈은 세상과 단절된 공간인 유리정원 속에서 기이한 실험을 이어가는 재연의 모습에서 소설의 소재를 얻고자 주위를 배회한다.

재연의 행동에는 분명히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어려운 많은 문제가 있지만 그는 의문을 품지 않는다. 그녀의 사생활이나 프라이버시와 관련한 문제들 역시 중요하지 않다. 어떻게든 좋은 작품을 만들어 보란 듯이 문단으로 돌아가는 것이 그의 최대 과제다. 물론 성공과 함께 말이다. 지훈은 중국 문인의 작품을 표절했다며 창대의 멱살을 잡았던 인물이다. 그러나 지훈 역시 재연의 삶을 동의 없이 엿보고 작품의 소재로 활용했다는 점에서 지훈과 창대의 삶은 유사한 것처럼 느껴진다. 재연에게 문제가 있다고 해서 그 삶을 멋대로 이용할 권리가 타인(지훈)에게 주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06.

식물인간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이 영화에서 다양하게 활용된다. 재연은 "식물은 가지를 뻗으며 다른 가지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다른 방향으로 자란대. 인간은 그렇지 않지"라고 말한다. 재연이 죽은 교수를 데려와 식물인간으로 만들고자 했던 이유는 자신을 제대로 대하지 않았던 데 대한 복수가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재연은 이로 인해 사랑도 잃고 연구도 잃어 큰 상처를 받았다. 그녀는 교수가 나무인간이 되고 나면 그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여기엔 재연에게 기회를 주지 않고 빠른 결과물에만 환호했던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반감도 담겨 있다. 연구 결과를 발표할 당시 사람들은 시간이 걸린다는 이유만으로 재연의 연구에는 비난이 섞인 눈길을 보내고 바로 활용할 수 있는 수희에게는 환호했다. 수희의 연구 역시 재연의 것임을 알지도 못한 채 말이다. 재연에게는 이에 대한 분노가 있었을 것이다. 이는 교수를 활용해 연구를 완성시키겠다는 의지로 발현되었다.

마지막으로는 순수함의 회복이다. 육체적 욕망만이 가득한 사회에서 재연은 여성성을 자신의 성공에 활용하지 않아 피해를 입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재연이 가장 먼저 떠올린 건 무엇이었을까? 그녀가 외진 숲속의 유리정원으로 향한 이유를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연구를 진행하겠다는 뜻만으로 해석할 수 없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영화의 엔딩에서 스스로 나무의 일부가 되는 것 또한 말이다. 재연은 나무에도 영혼이 있다고 믿었다.

유리정원 스틸컷 유리정원 스틸컷

ⓒ 리틀빅픽처스


07.

<유리정원>은 밖에서 볼 때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분명히 존재하는 것들을 그린다. 영화의 타이틀인 '유리정원' 역시 그저 화면에 등장하는 재연의 공간만을 특정하는 단어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계층을 나누는 경계를 '유리천장(Glass Ceiling)'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모든 것을 감춘 채 자신의 사랑과 일을 증명하고자 했던 재연도 그렇다.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지만 욕망으로 가득 차 있는 사회 역시 마찬가지다. 영화 자체도 그 의미를 같이한다. <유리정원>도 겉으로 보기엔 단순해 보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다양한 지점의 이야기들이 치열하게 다투고 있는 작품이다.

영화는 오는 25일 개봉한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조영준 시민기자의 브런치(https://brunch.co.kr/@joyjun7)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기사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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