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영화 <말해의 사계절>(2017) 한 장면.

다큐멘터리 영화 <말해의 사계절>(2017) 한 장면. ⓒ 허철녕


김말해 할머니는 765kV의 송전탑이 세워진 경남 밀양시 상동면 도곡마을의 유일한 합의 거부자이다. 밀양 송전탑 건설을 반대하는 투쟁이 거셌던 2014년, 송전탑 건설 반대 투쟁에 참여한 주민들의 모습을 담는 영상 아카이브 팀에 합류한 허철녕 감독은 영상 아카이빙 작업에 참여한 다른 감독들과 함께 밀양 송전탑 투쟁을 담은 옴니버스 다큐멘터리 <밀양, 반가운 손님>(2014)을 제작한다.

이후 허 감독은 그가 촬영을 담당했던 김말해 할머니의 이야기를 발전시켜, <말해의 사계절>(2017)이라는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를 완성해낸다. 올해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와이드 앵글 섹션을 통해 월드 프리미어로 공개된 <말해의 사계절>의 허철녕 감독과 함께, 영화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영화에서는 차마 다루지 않았던 뒷이야기까지 함께 들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지난 17일 오후 3시께, 부산국제영화제가 한참 진행 중인 부산 영화의 전당에서 그를 만났다.

투쟁을 담은 옴니버스 다큐멘터리

 다큐멘터리 영화 <말해의 사계절>(2017) 허철녕 감독.

다큐멘터리 영화 <말해의 사계절>(2017) 허철녕 감독. ⓒ 허철녕


- 감독님께서 참여하신 밀양 송전탑 투쟁 옴니버스 다큐멘터리 <밀양, 반가운 손님> 이후 김말해 할머니의 이야기가 장편 <말해의 사계절>로 이어지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밀양 송전탑 건설 투쟁이 거세지던 2013년 10월 말. 밀양 송전탑 건설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던 인권운동 활동가들이 송전탑 투쟁에 반대하는 할머니들의 생애를 책으로 담아보자 하는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었는데, 글로서 기록하는 작업 외에도 영상으로 기록하자는 제안이 있어서 영상 아카이브 작업팀도 새롭게 만들어졌다. 이때, 밀양 송전탑 투쟁 관련 영상 아카이브팀을 이끌던 김일란 감독님의 권유로 2014년 2월, 영상팀에 합류하였고, 김말해 할머니 촬영을 맡게 되었다.

아카이빙 작업의 일환으로 김말해 할머니를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밀양 송전탑 투쟁 외에도 할머니의 사적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동안 김말해 할머니가 겪으셨던 그분의 인생사를 듣는데, 할머니가 살아오신 여정 자체가 한국의 굴곡진 근현대사를 고스란히 관통한다. 일제 강점기, 일본군 위안부, 6·25 전쟁, 보도연맹, 월남전 등. 워낙 중요하고도 많은 이야기가 오가다 보니 이걸 책으로만 기록하기보다는 다큐멘터리도 제작하자는 의견이 있었다. 그래서 당시 영상 아카이브 작업에 참여한 활동가들이 모여 <밀양, 반가운 손님>을 만들었다.

그리고 2014년 5월, 밀양 할머니들의 구술사가 담긴 책이 나왔는데, 김말해 할머니께서 자신의 얼굴이 표지로 등장한 책 겉표지를 뚫어지라 보시고는 표지 속 자신의 얼굴을 연신 쓰다듬으셨는데 그 장면을 보고 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영화에서도 잠깐 언급되지만, 김말해 할머니는 글을 읽지 못하신다. 책이라는 것은 원래 세상 사람들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을 기억하기 위해 쓴 것인데 정작 김말해 할머니는 자신의 인생이 담긴 그 책의 내용을 볼 수 없다. 할머니께서 책 표지를 연신 쓰다듬는 장면을 보면서, 당시 드러난 송전탑 투쟁 외에도 할머니가 그간 숨겨왔던 많은 아픔이 고스란히 전해졌고, 좀 더 할머니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카메라에 담고 싶었다."

- 김말해 할머니의 일상에 집중하면서, 할머니가 그간 살아온 일생을 풀어내는 스토리텔링 기법이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제가 영상 아카이브 팀으로 들어갔던 2014년 초에는 송전탑 공사가 이미 70%가량 진행된 상태였기 때문에 반대 투쟁에 참여하던 주민들도 줄어들던 시점이었고, 2014년 6월 반대 투쟁 주민들에게 가해진 행정대집행을 기점으로 물리적 투쟁도 없었다. 그래서 투쟁 장면을 많이 담아낼 수도 없었지만, 기존의 밀양 송전탑 투쟁을 담은 영화들은 송전탑 투쟁 싸움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진행하는 경향이 컸다.

김말해 할머니는 송전탑 투쟁 외에도 한국 현대사와 고스란히 이어지는 많은 아픔을 가지고 계셨다. 할머니의 남편분은 6.25 당시 보도연맹에 연루되어 억울하게 돌아가셨고, 할머니의 시어머니는 아들(김말해 남편)이 죽기 직전 김말해 할머니와 아들 면회를 갔다가 경찰의 공격 때문에 쓰러지신 이후 숨을 거두셨다. 빨갱이의 자식으로 살았던 할머니의 큰아들은 자신의 아버지가 진짜 빨갱이인지 아닌지 알기 위해 월남전에 자원하여 파병 가셨다. (당시 가족 중 누군가의 사상에 문제가 있으면 월남전에 참전할 수 없었다) 김말해 할머니 구술사를 정리하면서 보도연맹 학살과 관련 더 끔찍한 이야기가 있었지만, 최대한 정제된 형태로 할머니의 아픔을 담고자 했다."

- 영화 초반, 송전탑 반대 투쟁을 진압하려는 경찰을 등 뒤로 하고 그들을 비판하는 할머니의 장면이 눈에 띈다. 영화에 등장하는 경찰들은 감독이 포착한 시선이라기보다는 할머니가 바라보는 경찰을 대신 보여주는 것 같다.
"영화에서 제가 카메라를 통해 바라본 경찰은 할머니의 시선으로 본 존재이기도 하다. 김말해 할머니는 주로 구한말 언어를 쓰시는 분이다. 경찰을 아직도 순사라고 부르고. 그런데 김말해 할머니는 일제 강점기부터 정부가 시민들에게 행한 국가폭력을 고스란히 받고 살아오신 분이다. 일제 강점기 말에는 위안부 차출을 피해 일찍 결혼을 감행했고, 남편은 보도연맹에 연루되었다. 할머니가 아흔을 바라보시는 지금은 송전탑이라는 위협적인 존재와 더불어 경찰의 강경 투쟁 진압까지 겪으셨다. 2017년의 시점에서 일제 강점기 때 쓰던 순사라는 말이 나오는 것은 단순히 옛날 말이 아니라 일제강점기부터 밀양 송전탑까지 이르는 국가 폭력의 역사와 고스란히 연결된다."

포기하지 않았다

 다큐멘터리 영화 <말해의 사계절>(2017) 한 장면.

다큐멘터리 영화 <말해의 사계절>(2017) 한 장면. ⓒ 허철녕


- 할머니가 겪은 일련의 비극적인 사건을 통해 한국의 현대사를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고자 하는 접근 방식이 흥미롭다.
"김말해 할머니의 생애를 접하고 할머니의 존재가 한국의 근현대사를 다른 관점으로 보여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 거시적인 관점에서 접근하는 한국의 근현대사 안에서 여성 혹은 사회적 약자들은 주로 주변부의 위치에 놓여있거나 희생자, 피해자 관점으로만 비치는데 밀양의 깊숙한 산골짜기에 사는 할머니에게도 엄청난 역사와 기억이 숨어져 있었다. 김말해 할머니라면 여성의 관점으로 현대사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한국에서 구술사 작업을 하면, 나이 많은 어르신들은 한풀이식으로 그분들의 일생을 서술하신다. 그때 어르신들이 가장 많이 쓰시는 단어가 '팔자' 즉, '나는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팔자였어'라는 말을 많이 하신다. 말해 할머니도 운명론에 순응하는 그런 사람 중 한 분이시다. 그런데 말해 할머니와 비슷한 국가 폭력 피해를 본 여성들이 한 둘이 아니다. 이러한 할머니들의 증언이 모이고 그것이 발언으로 이어지면 한 개인에게 국한된 비극적 운명이 아니라 보도연맹 피해를 겪었던 수많은 여성의 경험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할머니의 이야기를 통해 개인의 운명이 아닌 동시대 여성들의 경험으로의 전환을 꾀하고 싶었다."

- <말해의 사계절>이라는 제목처럼 봄, 여름, 가을, 겨울에 따라 할머니의 일상을 담고 있는데, 절망적인 체념이 가득했던 다른 계절과 달리 겨울에서부터 무언가 긍정적인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말해 할머니보다 강경하게 투쟁에 임하는 덕촌 할머니 등장으로 분위기가 달라진 것도 있다. 이 영화는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송전탑이 완공된 상태에서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은 맞지 않는다. 겨울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덕춘 할머니의 말씀처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해봤다는 것에 대한 송전탑 반대 투쟁 주민들의 자부심이 드러나길 바랐다. 포기하지 않는 것. 이 영화는 절망하지 않았던 밀양 주민들의 이야기이다."

- <말해의 사계절>을 한 마디로 설명하자면?
"아흔 가까이 평생 자기 이야기를 하지 못하던 사람이 인생의 끝에 또 하나의 사건을 만나서 비로소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된 여성의 이야기이다."

- 향후 상영계획을 말해달라.
"BIFF에 두 차례(18일, 19일) 상영이 남아있다. 그리고 43회 서울독립영화제 경쟁부문 상영으로도 만나볼 수 있다."

말해의 사계절 허철녕 부산국제영화제 밀양 송전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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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지금 여기에서 여성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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