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살인자 말리나의 4막극>의 한 장면.

ⓒ 부산국제영화제


인도네시아의 한 섬에 사는 말리나는 일찌감치 남편과 아들을 잃었다. 그의 집엔 죽은 남편의 시체가 미라처럼 모셔져 있고 마을 남성들은 호시탐탐 그를 노린다.

노린다는 표현이 함축하는 대로 말리나는 곧 이웃 남성들의 성적 노리개가 될 위험에 놓인다. 장례식 비용을 빚졌다는 터무니없는 이유로 돈이 없으면 대신 몸을 바칠 것을 강요당한다. 곧이곧대로 순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말리나는 자신을 성폭행 한 이들을 하나둘 제거한다. 그리고 도망자 신세가 된다.

운명을 뒤바꾸다

내용만 놓고 보면 서스펜스가 가미된 스릴러 내지는 처절한 복수극이다. 잠깐 떠오르는 한국영화가 있다면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 정도인데 이상할 만큼 <살인자 말리나의 4막극>의 분위기는 침울하거나 무겁지 않다. 오히려 이야기마다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다소 코믹한 느낌마저 든다.

제목대로 영화는 총 4막으로 구성됐다. 원작 희곡이 있는 작품으로 그 구성을 따라 그대로 영화화했다. 말리나가 강간 위험에 빠지고 남성들을 살해한 뒤 도망자가 돼 집을 떠나고 그 여정에서 여러 여성들을 만나면서 자신을 쫓는 동네 남성과 다시 마주하기까지의 과정이 꽤 연극적으로 느껴진다.

소재만 보면 역동적인 카메라 워크를 예상하기 쉽지만 영화는 오히려 정적이다. 클로즈업을 남발하는 국내 상업영화와 정반대인 미장센도 낯선 느낌을 준다. 그게 괴이하지만은 않다. 영화가 강조하는 건 말리나의 선택과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지 어떤 감정적 동요를 강요하지 않는다. 어찌 보면 사적 복수를 감행한 여성인데 감독은 롱테이크(화면을 멀리 잡아 전경을 보이는 식)와 등장인물 간 대화를 통해 여성을 바라보는 사회의 왜곡된 시각을 제시한다.

분명 사람을 죽인 건 죄다. 하지만 그 이전에 여성을 욕망의 대상 내진 노리개로 간주하며 대한 섬마을 남성들은 어쩌면 수 세기간 깨지지 않는 현대 문명 속 병폐를 상징하는지도 모른다. 사람을 죽인 말리나는 늘 무표정이지만 자신에게 다가오는 여성들을 무시하거나 그들의 사연을 외면하지 않는다. 살인자라는 굴레에 갇히지 않고 그 여성들에게 영향을 줌으로써 그들에게도 삶의 주체가 되길 암묵적으로 권한다.

네 명의 여성

 영화 <살인자 말리나의 4막극>의 한 장면.

ⓒ 부산국제영화제


좀 더 들어가 보자. 영화엔 크게 네 여성이 등장해 각 막의 이야기를 채운다. 도망 중에 만난 임신한 여성은 자신의 주관도 뚜렷하고 내내 활발한 태도를 보이고 있지만 가정 폭력에 시달리는 사연이 있다. 애만 낳으면 자신이 쓸모없어질 거란 두려움도 갖고 있다. 말리나는 위기의 순간 그의 도움을 받거나 반대의 경우를 겪으며 친분을 쌓아간다.

이와 함께 말리나의 여정에 잠시 동행하는 노파도 주목해야 한다. 그를 추격해 오는 동네 남성 일당에게 일격을 가하며 말리나에게 힘을 싣는다. 또한 말리나에게 잠시 쉴 곳과 먹을 것을 제공하는 꿈 많은 소녀는 말리나로 하여금 과거를 돌아보고 자신이 택한 길에 확신을 갖게 영향을 준다.

연출을 맡은 몰리 수리아 감독은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출신의 신예다. 호주에서 유학하며 영화 연출을 공부한 그는 이 영화를 통해 명실공히 아시아를 대표하는 페미니즘 감독으로 거듭날 것으로 보인다. 부산국제영화제 필름아카데미 출신으로 한국과의 인연도 깊다. 그의 다음 작품을 기대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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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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