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지석 부산영화제 부집행위원장이 노무현 대통령에게 받은 포장.

고 김지석 부산영화제 부집행위원장이 노무현 대통령에게 받은 포장. ⓒ 김지석 페이스북


"문재인 후보의 대통령 당선이 확정적인 지금 이 순간, 가장 생각나는 분은 고 노무현 대통령이다. 지난 2009년 5월 23일, 칸영화제 출장을 마치고 귀국하던 인천공항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접하고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었다. 그 후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는 내내 가슴속 한 귀퉁이에 응어리로 남아있었다. 지난 2012년 대통령선거 패배로 이 한은 풀지 못했다. 이제 문재인 후보의 당선으로 그 한은 어느 정도 풀리는 듯하다.

사진은 지난 2005년 참여정부로부터 받은 문화포장이다. 노무현 대통령을 직접 만난 적도 없고 상장이나 메달과는 별 인연이 없었지만, 이 포장은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것이어서 각별하다.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거치면서 우리 영화제가 혹독하게 탄압받았던 기억을 떠올리면 더더욱 그러하다. 아직 해결해야 할 많은 문제가 산적해 있지만, 이제는 비로소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지난 5월 9일, 칸에서 타계하기 열흘 전 김지석 부산국제영화제 부집행위원장은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남겼다. 그가 부산영화제를 지키는 과정에서 받았던 고통을 되짚어 볼 수 있는 글이다.

돌아가신 뒤 훈장 가져와 죄송

 15일 저녁 해운대 그랜드호텔에서 열린 김지석의 밤에서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보관문화훈장을 전달하고 있다.

15일 저녁 해운대 그랜드호텔에서 열린 김지석의 밤에서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보관문화훈장을 전달하고 있다. ⓒ 부산국제영화제


15일 늦은 오후, 부산 해운대 그랜드호텔에서 고 김지석 수석 부집행위원장 추모의 밤 행사가 거행됐다. 김동호 이사장은 추모행사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지난 5월 영결식을 치렀지만, 김지석 부집행위원장을 따르고 사랑했던 많은 영화인들이 함께하지 못해 영화제 기간 중 영화인들이 추모할 자리를 마련했다. 올해 영화제를 준비하고 추진하면서 고인의 빈자리가 너무 컸다. 고인의 역할이 뼈저리게 느껴졌다. 그 빈자리 앞으로 아무도 채울 수 없고 감당할 수 없다. 그러나 고인이 갈망했던 부산영화제는 저희 모두 잘 하는 것이 유지를 받는 것이라고 믿고 최선을 다하겠다."

이 자리에서는 보관문화훈장 전수식도 함께 진행됐다. 보관문화훈장은 문화예술 발전에 기여한 공적이 뚜렷한 자에게 정부가 수여하는 것으로 문재인 대통령이 주는 훈장이다. 특별히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직접 참석해 김지석 프로그래머 유족에게 직접 전수했다.

도 장관은 먼저 "돌아가신 뒤에 훈장을 가져와 죄송하다"라며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이어 "고 김지석 부집행위원장은 1996년 우리나라에 영화제가 없는 환경에 영화제의 나무를 심었다"라며 "50년 넘도록 영화만 생각하고 열정을 쏟아 아시아 최고 영화제로 성장시켰다"고 회고했다.

도 장관은 또한 "영화인과 관객에게 영화의 꿈과 상상력을 나눠주기 위해 왔다간 것 아닌가 생각된다"며 "블랙리스트라는 터널을 뚫고 가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표현의 자유를 위해 정치적 탄압에 온몸으로 저항했다"면서 고인이 겪었던 아픔에 공감을 나타냈다.

도 장관은 "부산영화제는 다시 서야 한다. 지원을 할 것이고 간섭하지 않겠다. 부산영화제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로 유족들과 부산영화제, 고인을 회상하는 사람들에게 위로의 말을 대신했다.

당일 낮, 문재인 대통령은 영화제 기간 중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부산영화제를 찾았다. 이날 추모의 밤 행사는 문 대통령의 방문 뒤라 더욱 뜻 깊었다. 김지석 프로그래머가 생전에 문재인 대통령의 당선을 기원했고, 지난 2012년 대선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낙선했을 때는 "다시 5년을 기다린다"며 변함없는 지지를 보냈기 때문이다.

지난 대선 과정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도왔던 영화계 인사는 "문 대통령의 부산영화제 방문이 시기적으로 김지석 부집행위원장의 추모일에 맞춰진 면도 있다"고 말했다. 한결같은 지지자였던 김지석 부집행위원장에 대한 추모도 대통령의 영화제 방문 목적 중 하나였다는 것이다.

부산지역 영화계 인사들은 이용관 전 집행위원장이 강제로 쫓겨난 후 김지석 부집행위원장이 뒤를 이어받아야 한다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김지석은 문재인 지지자라서 안 된다는 게 서병수 시장 쪽의 생각이었을 만큼, 문재인 지지자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가 대통령이 되기를 많이 고대했었다"고 말했다. 

김지석 추천은 아시아 영화의 보증수표

 12일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에서 김선욱 피아니스트의 추모 연주 속에 고 짐지석 부집행위원장에 대한 영상이 나오고 있다.

12일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에서 김선욱 피아니스트의 추모 연주 속에 고 짐지석 부집행위원장에 대한 영상이 나오고 있다. ⓒ 부산국제영화제


김지석 부집행위원장 겸 수석 프로그래머는 부산영화제 성장과 함께 아시아 영화의 중심 역할을 해 온 절대적인 존재였다. 그가 발굴해 낸 아시아 영화와 감독은 셀 수 없이 많다. '그 영화들만 영화제에서 다 상영해도 족히 2년은 걸린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다. 김지석이 추천했다는 것은 세계 주요 영화계에서 보증수표나 다름없었다.

김지석 부집행위원장이 아시아 나라의 영화제에 등장하면 그에게 신작 영화의 스크리너를 전하려는 사람들로 줄을 이었다. 예전에 부산영화제에서 선정되기 원했던 인도의 한 영화는 우편으로 보내도 될 것을 직접 전달하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일부러 부산을 올 정도였다. 당시 김지석 프로그래머는 "그 작품을 초청작으로 선정했냐"는 물음에 "그렇지는 않았다"고 답하기도 했다. 그렇게 전달받은 수백 편의 영화들을 꼭 보는 게 김지석 부집행위원장의 특징이었다. 영화 제작 과정에서의 수고를 생각해 나름 작품들에 예의를 갖춘 것이었다.

아시아의 유명 감독들이 김지석 부집행위원장을 아시아 영화의 심장이라 하는 것은 절대 과장된 수사가 아니다. 그는 아시아 영화계의 절대 권력자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존재감이 대단했다. 그런데도 소탈하고 친근하고 겸손한 모습으로 일관해 존경을 받아 왔다. 아시아 영화감독들에게는 세계적 감독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 역할을 해주는 존재기도 했다.

부산영화제의 행사 프로그램 등도 다 김지석 부집행위원장이 머리에서 나왔고, 세세한 계획들은 모두 김지석의 몫이었다. 그의 역할이 '대체 불가'라는 안타까움은 조금도 과장이 아니었다.

영화제 자부심 '표현의 자유' 짓밟힌 것에 분노

 12일 늦은 오후. 영화의 전당에서 열린 22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에서 김선욱 피아니스트의 추모 연주 속에 고 김지석 부집행위원장에 대한 추모영상이 상영되고 있다. 생전의 김지석 부집행위원장과 서병수 시장에 의해 강제로 쫓겨난 이용관 전 집행위원장.

12일 늦은 오후. 영화의 전당에서 열린 22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에서 김선욱 피아니스트의 추모 연주 속에 고 김지석 부집행위원장에 대한 추모영상이 상영되고 있다. 생전의 김지석 부집행위원장과 서병수 시장에 의해 강제로 쫓겨난 이용관 전 집행위원장. ⓒ 부산국제영화제


세월호 관련 다큐멘터리 영화 <다이빙벨> 상영으로 부산영화제 사태가 발생했던 2014년, 김지석 부집행위원장은 영화제를 지키기 위해 이용관 전 집행위원장과 함께 싸웠다. 서병수 시장 밑에서 고위직을 맡고 있던 부산시 인사가 "<다이빙벨>을 상영하지 못하게 스크린에 모래를 뿌리겠다"고 협박하자 그는 밤새 전전긍긍하며 애태우기도 했다.

오랜 시간 가장 가까운 벗이었던 오석근 전 부산영상위 운영위원장은 "부산시와 협상 과정에서 나이 어린 공무원을 설득하기 위해서 한 번만 읽어달라고 하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며 "그 사태 수습 과정에서 지금까지 만난 사람들과는 전혀 결이 다른 사람과 협상하느라 힘들어했다. 중압감과 스트레스에도 목표는 단 하나, 부산영화제를 지키는 것이었다"고 회상했다.

정치적·종교적 이유로 표현의 자유가 속박된 문화 속에서 부산영화제가 대변하고 성취한 '표현의 자유'는 아시아 어느 영화제와도 견줄 수 없을 최고의 자부심이었다. 지난 정권 문화계 블랙리스트 비롯한 한 <다이빙벨> 사태로 표현의 자유가 무참히 짓밟히면서 고 김지석 부집행위원장은 크게 분노했다.

그 고통스러운 순간들이 그에게 심적인 압박과 스트레스로 작용했을까. 그는 너무 일찍 그가 모든 열정을 쏟았던 부산영화제와 아시아 영화인, 사랑하는 가족들 곁을 떠났다. 15일 추모의 밤 행사에 모인 전 세계 영화인들은 한결같은 마음으로 애통해하며 김지석 부집행위원장의 생전 모습을 회상하고 기억했다.

부산영화제를 찾아 22년간 국가적 자부심이었던 영화제 위상을 다시 살리겠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약속은 고 김지석 부집행위원장이 가장 바라왔던 것이다. 그의 영전에 바치는 선물이기도 했다.

다만, 그의 죽음에 일정한 책임이 있는 서병수 부산시장이 추모 영화제 성격과도 같은 22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에 레드카펫을 밟고 입장했다. 서병수 시장이 고인을 또 한 번 욕되게 한 것은 국내 영화인들에게 무겁게 자리 잡았다.


김지석 부산국제영화제 문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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