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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 지내는 친구들과 3년 넘게 <블랙리스트>란 팟캐스트 방송을 꾸려왔다. 영화를 중심으로 책과 스포츠, 일상의 이야기까지 종횡무진인데 어느덧 청취자가 꽤 모여 회당 천명은 듣는 방송이 되었다. 친구들과 떠드는 이야기를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 귀 기울여 듣는다니,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하지만 생각하면 문득 가슴이 두근거린다.

3년은 처음 품은 마음이 깊어져 삶 속에 귀한 의미를 새겨놓을 만한 충분한 시간이다. 몇 년 전, 한 언론사 신입 기자로 처음 만나 수십 편의 방송을 함께 만들었던 세 친구가 어느덧 다른 길에 서서 방송 한 편을 함께 녹음했다. 이날의 주제는 인생의 문학 열 편을 가려 뽑아 소개하는 것으로 서로 다른 성격만큼 각자가 가져온 열 권 가운데 겹치는 작품이 하나도 없어 더 흥미로운 녹음이 되었다.

이번 독서만세에선 이날 각 패널이 가져온 인생 문학 가운데 한 작품씩을 가져와 소개할까 한다. 누군가가 삶에서 제일로 꼽는 문학작품을 이야기하는 걸 듣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고 이들 가운데 일부는 독자들에게 있어서도 특별한 작품이 될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일부는 전통적인 문학의 경계를 넘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창작과 수용, 그로부터의 감동이 본질인 문학이니 그리 큰 흠은 아니리라 생각한다.

그럼 아래 출연자 당 한 편씩, 모두 세 편의 문학을 소개한다. 방송은 4시간 정도의 녹음분량을 편집을 거쳐 모두 3편으로 나누어 업데이트됐다. 방송은 팟빵 등 팟캐스트 어플과 유튜브를 통해 들을 수 있다.

<우주로부터의 귀환>, 다치바나 다케시

책 표지
▲ 우주로부터의 귀환 책 표지
ⓒ 청어람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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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저명한 언론인 다치바나 다케시가 십여 명의 우주비행사를 인터뷰해 지은 책이다. 인터뷰에 응한 우주비행사는 1961년부터 1975년까지 미국의 우주탐험계획에 따라 지구 밖으로 나갔다가 돌아온 이들로 1980년대 초 다치바나와의 인터뷰에 응했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점은 책이 우주 비행으로 얻은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성과보다 그로부터 얻은 경험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 책이 나오기까지 미국에선 우주비행사들에게 과학적 성과를 묻는 인터뷰가 주를 이뤘고 이들의 심리적, 사상적 변화에 대한 대화는 거의 이뤄지지도 공개되지도 않았다고 한다.

인터뷰에 응한 우주비행사들의 변화를 한두 문장으로 요약하는 건 불가능하다. 어떤 이는 인격적인 신을 부정하는 철저한 무종교자가 되었지만 다른 어떤 이는 신을 체험했다며 열렬한 전도사가 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체로 공통적인 경험이라 한다면 이들이 우주 밖에서 지구를 바라보는 경험으로 커다란 감동을 했고 이것이 종교와 철학, 각종 사상에 대한 깊은 성찰로 이어졌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여기 인터뷰 가운데 인상적인 부분을 발췌해 소개한다.

'틈만 나면 지구를 보고 있었다. 지구는 아무리 보아도 지루하지 않았다.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것을 보고 있으면 내가 지구의 일원이라는, 지구에의 귀속 의식이 아주 강렬하게 살아났다. 나는 미국 국민이라든가, 텍사스 사람이라든가, 휴스턴 시민이라든가 하는 따위의 의식은 전혀 없었다. 오로지 지구에의 귀속 의식 뿐이었다.

어떤 종교도 우주에서 보면 지방 종교이다. 각각의 지역이 이것이야말로 우리들의 정신적 지도자, 지도 원리라는 선전물을 가지고 있지만, 그 지역에서는 그럴듯해 보여도 우주에서 보면 그것이 진정한 보편적 정신적 지도자, 지도 원리라면 지역마다 다를 리 없다는 생각이 든다.

우주에서 지구를 보면 인위적인 국경선이란 걸 볼 수가 없다. 따라서 저 아래에 몇 백 개의 국가가 분단되어 서로 대립 항쟁하고 있다는 사실이 아주 우습게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종교간의 대립이 바보 같은 짓으로 보인다.

우주선 안에 있는 것과 우주복을 입고 우주 공간에 떠 있는 것은 같은 우주 체험이긴 하지만 완전히 질이 다른 체험이다. 우주선 안에는 모터 소리 사람 목소리 등 다양한 잡음이 있다. 그러나 우주 공간에 떠 있는 동안 우주복 속은 완벽한 정적이었다. 그때 외에는 경험한 적이 없는 무음의 세계였다. 무선 연락이 오면 모르지만 그것이 끊어졌을 때는 완전히 무음이었다.

그리고 우주선 안에서는 작은 창문으로만 밖을 바라볼 수 있지만 우주복 헬멧은 투명한 구체이기 때문에 시야를 가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 자신이 우주공간 속에 붕 떠 있음을 깨달았다. 아래를 보니 지구가 그곳에 있었다. 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자신이 지금 시속 1만7000마일로 날고 있는데도 그 속도를 실감할 수 없었다. (...) 그것을 아무리 잘 전달하려 해도 잘 할 수 없다. 말해버리면 별 것 아니지만 이것은 실로 깊이가 있는 체험이다.'

백 사람의 십년, 펑지차이

책 표지
▲ 백 사람의 십년 책 표지
ⓒ 후마니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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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경험은 얻기 힘든 자산이다.'

1980년대 중반, 중국의 문학가 펑지차이가 버려진 자산을 이제야 찾겠다며 신문에 한 편의 공모를 싣는다. 십년 간 이어진 문화대혁명과 관계된 개인의 이야기가 있다면 이를 자신에게 보내달라는 내용이었다. 역사의 경험은 얻기 힘든 자산으로 커다란 아픔이겠으나 이를 나누어준다면 모두를 위한 책으로 보답하겠다는 것이었다.

기사가 나간 이후 펑지차이에겐 4000통이 넘는 편지가 날아들었다. 그는 이 가운데 수백 명을 찾아 인터뷰했고 1986년부터 이들의 이야기를 신문에 연재하기 시작했다. 불이익이 가해질까 두려워 신상정보와 사실관계를 감추는 작업도 이뤄졌다. 연재는 중국 내에서 큰 인기를 끌어 단행본으로 출판됐다. 지난해 나온 한국어판엔 모두 열일곱 편의 이야기가 실렸다.

문화대혁명이 이뤄진 중국의 1966년부터 1976년까지는 지난 수천 년의 역사와 오늘을 실제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국가가 철저하게 짓밟은 야만의 시기였다. 마오쩌둥의 사상과 사회주의 혁명을 실천하는 인민이 되자며 정부가 밀어붙인 사회 대개조 운동으로 자신의 가족과 집, 일터를 사랑했던 평범한 이들이 삶 밖으로 끌려 나와 길바닥에 패대기쳐졌다.

서로가 서로에게 낙인을 찍었고 죄 없는 사람들이 고문당하고 죽음을 맞았다. "너 반동행위를 했지" 하는 고발 한 번에 삶이 송두리째 파괴되는 광기의 시대 속에서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 눈 가리고 모른 척 살아가는 이들이 너무나 많았다. 책에는 애인과 가족을 잃은 이들이 수도 없이 등장하는데 실상은 기억보다 가혹할 게 분명한 노릇이다. 이 가운데는 사실로 믿기 어려울 만큼 가슴 아픈 내용도 적지 않다.

남편의 무죄를 증명하려다 죽음을 맞은 아내의 이야기도 그중 하나다. 강의 잘하기로 소문난 선생이 있었다. 그는 수업 중에 마오가 혁명기에 적들을 피해 도랑에 숨었다는 무용담을 이야기했다가 마오 주석을 비난했다며 감옥에 갇혔다.

책을 인용했을 뿐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까막눈인 그의 부인은 종이라는 종이는 죄다 주워 주위 사람들에게 읽어달라고 요청한다. 하지만 그녀는 끝내 그 내용을 찾지 못한다. 그러던 중 집에 쌓아둔 종이에 불이 붙어 그녀는 아들과 함께 죽음을 맞는다. 이 소식을 듣고 남편은 화장실에서 목을 맨다. 하지만 끈이 끊어지는 바람에 땅에 떨어졌다가 바닥에서 그 글이 씌어 있는 종이를 발견한다.

선생이 수업 중에 마오 주석을 욕한다며 고발한 학생은 누구였을까. 남편이 감옥에 있던 8년 동안이나 종이쪼가리를 찾아 헤매야 했던 아내의 삶은 어떤 것이었을까. 이를 생각해본다면 문화대혁명의 실상이 어떤 것이었는지 조금은 짐작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놀라운 점은 이토록 비정상적인 시기를 겪은 사람들이 현대 중국에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 중에는 피해자뿐 아니라 가해자와 그보다 많은 방관자가 있을 터인데 마치 광주민주화항쟁의 순간에 가해자였던 이들이 우리 곁에 이름 모를 아저씨로 살아가고 있으리라는 것만큼이나 묘한 감상을 불러일으킨다.

작가는 문화대혁명이 채 끝나기 전부터 집필을 시작했다. 처음엔 친구의 이야기로부터 출발해 그 기록을 다락과 마루 아래, 집안 곳곳에 숨겨두었다가 일부는 두려워 외운 후 불로 태워버렸다고도 전한다. 이토록 슬픈 기록이 이제야 빛을 보는 듯도 하지만 한국영화 <택시운전사>가 문화대혁명 시기를 떠올리게 한다는 평가가 나돌기 시작한 이후로 상영관을 찾기 어렵게 되었다고 하니 아직 중국에 완전한 봄은 오지 않은 건지도 모른다.

'내 경험을 비추어 볼 때 모든 사람은 마음속에 자신만 아는 비밀을 하나씩 갖고 있으며 영원히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지 않는다. 고통이 깊을수록 더 깊게 숨겨놓는 법이다. 그들은 남편이 송신기 제조와 반동 회의 개최, 그리고 반동 선서문을 낭독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라고 협박했습니다. 내 옆에 오줌 세 병과 똥 한 통을 놓아두고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바로 똥오줌을 먹였답니다.

게다가 갖가지 거짓말을 조작해 냈어요. 예를 들어, 남편이 반동 회의를 개최할 때 국민당 당기를 걸어놓았다며 그 사실을 내게 쓰라고 했고, 거부하면 바로 때리고 욕을 했습니다. 그렇게 입에 담기도 힘든 쌍욕을 들어보기는 난생 처음이었어요... 물론 나는 그들이 시키는 대로 인정할 수 없었어요. 내가 인정하면 그것을 증거로 남편을 협박할 것이고, 그러면 남편은 죽게 될 테니까요.'

<삼국지>, 나관중

전집
▲ 삼국지 전집
ⓒ 창작과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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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 소설가 김훈이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길티 플레저(guilty pleasure)로 <삼국지>를 꼽아 화제가 됐다. <삼국지>에 나오는 영웅호걸 대부분이 '군사 깡패'라는 게 이유였다.

그는 '그들은 의리를 명분으로 작당하고, 배신하고 합치고, 옆구리 찌르고, 속고 속이고, 속는 척해주면서 뒤통수 친다'며 '싸움만 알았지 미래관이 없다'고 비난한다. 그럼에도 그는 <삼국지>를 읽는다. 동양 남자들의 정신에 지대한 해악을 미친 책으로 주저 없이 이 책을 꼽으면서도 손에서 놓을 수 없는 건 재미가 있기 때문이라 항변한다.

<삼국지>는 그런 책이다. 좋게 말해 영웅들의 이야기고 나쁘게 이야기하면 국가적 수준의 깡패들의 이야기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나관중의 시야에서 민중은 보이지 않는다. 한나라 말부터 위진남북조 시대가 열리기까지의 80여 년 동안 큰 족적을 남긴 인물과 사건만이 조명된다.

국가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니 곳곳에서 튀어나온 이들로 천하가 혼탁하다. 새 왕조를 열겠다는 이부터 무너져가는 나라를 다시 세우겠다는 이들까지 입장도 다양하다. 그 와중에 유비·관우·장비의 도원결의부터 삼고초려와 육출기산으로 이어지는 제갈량의 활약상, 천하를 손아귀에 움켜쥔 조조와 그를 저지하는 손권 등의 활약상이 십여 권의 책을 가득 수놓는다.

천하는 어지럽고 죽고 죽이는 싸움이 거듭되는 가운데 이야기의 결말은 허무로 치닫는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인물이 제 뜻을 펴고 또 펴지 못하며 스러진다. 결국은 모든 세력이 무너지고 애써 쌓은 업은 공으로 돌아간다. 천하를 놓고 각축을 벌인 유비도 조조도 손권도 패자의 자리를 얻지 못한다. 어쩌면 이 책의 주제가 허무로 귀결되는 듯도 하다.

그러나 이 한 편의 대작이 가슴에 새기고 간 감동은 결코 공으로만 돌아갈 수 없다. 수십 수백의 인물들은 읽을 때마다 새로운 감상을 안긴다. 의리와 용맹, 의기와 지략이 어떻게 불의와 비겁, 불신과 이기심을 극복하는지 여러 인물과 사건을 통해 조명한다. 그로부터 독자는 오늘의 문제를 마주해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태도를 배울 수 있다.

<삼국지>는 비록 우리의 역사가 아니지만 국경과 시대를 넘어 계속 전파될 만한, 또 그럴 가치가 있는 훌륭한 작품이다.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과 사건을 조명하고 여기에 생명력을 부여해 읽는 이로 하여금 현재적인 감동을 느낄 수 있게 한 업적은 한 명의 소설가에게 주어질 수 있는 최고의 찬사를 주어도 부족함이 없다고 판단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김성호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와 팟캐스트 블랙리스트(
http://www.podbbang.com/ch/7703)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김성호의 독서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주로부터의 귀환 / 청어람미디어 /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 전현희 옮김 / 2002. 1. / 12,000원>
<백 사람의 십년 / 후마니타스 / 펑지차이 지음 / 박현숙 옮김 / 2016. 7. / 17,000원>
<삼국지 / 창작과비평사 / 나관중 지음 / 황석영 편역 / 2003. 6. / 98,000원>



우주로부터의 귀환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전현희 옮김, 청어람미디어(2002)


태그:#우주로부터의 귀환, #백 사람의 십년, #삼국지, #블랙리스트, #김성호의 독서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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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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