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일, 잠실에서 열린 '슬로우 라이프 슬로우 라이브'에 다녀왔다. 잠실 종합 주 경기장은 한국 공연 문화의 성지다. 4만 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공연장이 거의 없는 우리나라에서 이 공연장의 의미는 크다. 폴 매카트니와 마이클 잭슨, 콜드플레이, 그리고 조용필과 서태지 등 국내외 슈퍼스타들이 이 곳에서 공연했다. 대규모 EDM 페스티벌과 아이돌 콘서트 역시 이 곳에서 개최되고 있다. 그러나 이 곳에서 오케스트라 위주의 페스티벌이 펼쳐진 적은 없다. 물론 한스 짐머와 라라랜드라는 이름이 있었다. 서울 재즈 페스티벌을 키워낸 프라이빗 커브가 기획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접 공연장에 들어서기 직전까지는 '이게 잘 될까?' 라는 걱정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라라랜드 인 콘서트

라라랜드 인 콘서트 ⓒ 프라이빗 커브


낭만과 좌절이 펼쳐지는 곳, 라라랜드

<라라랜드 인 콘서트>가 시작되기에 앞서, 이동진 영화평론가가 영화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전했다. 그는 <라라랜드>를 21세기 한국인에게 가장 사랑받은 음악 영화라고 소개했다. 그의 말에 상당 부분 동의한다. 음악과 주인공들의 삶을 이 정도로 아름답게 일치시킨 영화는 흔치 않았으니까. <위플래쉬>와 <라라랜드>의 음악 감독인 저스틴 허위츠의 지휘 아래, '라라랜드 인 콘서트'가 시작되었다. 영화가 재생되고, 사운드트랙이 깔리는 모든 부분들이 라이브로 연주된 것이다. 즉, 철저히 영화와 그 흐름을 함께 하는 공연이었다. 세 번째로 보는 <라라랜드>였지만, 이런 식의 영화 관람은 처음이었다.

지휘자인 저스틴 허위츠 뿐 아니라 랜디 커버(피아노), 폴 잭슨 주니어(기타), 웨인 버제론(트럼펫) 등 라라랜드 OST에 참여한 재즈 뮤지션들이 무대에 올라 의미가 더 깊었다. 1부에서는 영화적인 낭만을 연주했다면, 2부에서는 현실에 부딪혀 부서진 낭만을 연주했다. 낭만과 현실, 두 사람의 벅찬 가슴과 세바스찬(라이언 고슬링)의 공허한 눈빛. 그들의 간극마저 아름답게 채워주는 음악이 있었다. 에필로그와 'Another Day Of The Sun'의 라이브를 보고 들으면서, 기립 박수가 자동적으로 나왔다. 이 영화를 앞으로 더 오랫동안 사랑하게 될 것 같았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열정에 끌리게 되어 있다'는 미아(엠마 스톤)의 대사가 다시 한 번 뇌리를 스쳐갔다.

 한스 짐머의 첫 내한 공연

한스 짐머의 첫 내한 공연 ⓒ Hans Zimmer Live


'지금은 한스 짐머의 시대다'

존 윌리엄스가 20세기 영화 음악의 상징이었다면, 한스 짐머는 21세기 영화 음악의 상징이다. 한스 짐머는 시각 예술과 청각 예술의 접점을 찾을 줄 아는 뮤지션이다. <덩케르크>를 뒤덮은 정서, <인터스텔라>의 아득한 장대함도, 심지어 잭 스패로우의 호쾌함도 그가 있었기에 완성될 수 있었다.

이번 공연은 한스 짐머의 첫 아시아 공연이었다. 80분이 넘는 기다림 끝에, 한스 짐머와 19인조 밴드,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무대에 등장했다. 많은 인원수만큼이나 다채로운 사운드들이 함께 어우러졌다. '최고의 영화 음악가'라는 수식어를 거두고 보더라도, 그는 훌륭한 공연자였다. 지난 4월, 미국 코첼라 페스티벌에서, 그의 공연이 라디오헤드와 켄드릭 라마 등을 제치고 최고의 공연으로 뽑힌 것은 괜한 일이 아니었다.

그는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 <글래디에이터>, <라이온 킹>, <인터스텔라> 등 우리에게 익숙한 레퍼토리들을 연신 쏟아냈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멜로디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기타와 키보드, 밴조를 번갈아 잡았던 한스 짐머는 물론, 빈틈없는 퍼포먼스를 완성한 멤버들이 있었다. 거스리 고반은 <델마와 루이스> 테마에서 아름다운 슬라이드 기타 연주를 선보였다. 스미스의 기타리스트 조니 마의 아들인 나일 마를 지켜보는 재미도 있었다.

150분의 음악여행, 스크린 속을 떠 다닌듯

1부 말 쯤, LED 화면 위로 거대한 태양이 떠올랐다. <라이온킹> 테마를 알리는 신호등이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 가수 레보엠은 추억 속 그대로의 'Circle Of Life'을 들려 주면서 탄성을 자아냈다. 한스 짐머는 남아공에서 정치적 망명을 선택한 레보엠의 삶을 소개했다. 그 치열한 삶에 대해 듣고 나니, 레보엠의 노래가 더욱 아름답게 다가왔다.

 모두의 관심을 집중시킨 전자 첼리스트 티나 구오

모두의 관심을 집중시킨 전자 첼리스트 티나 구오 ⓒ Hans Zimmer Live


'캐리비안의 해적' 메들리의 주인공은  중국 출신 첼리스트 티나 구오(Tina Guo)였다. 몸 전체를 가리는 전자 첼로를 들고 등장한 그녀는 멋진 연주와 액션으로 이 공연의 쇼적인 부분을 담당했다. 티나 구오의 카리스마는 쟁쟁한 뮤지션들 사이에서도 압도적이었다. 특히 'Up Is Down'을 연주하면서 긴 머리를 휘날리던 그녀의 모습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이날 가장 많은 관객들의 관심을 받은 뮤지션도 그녀였다. 이들 모두는 단순히 한스 짐머의 조력자에 머물지 않고 또 다른 주인공이 된 것이다.

각자의 취향에 따라 선택은 달라지겠지만, 필자는 <다크 나이트> 메들리를 이 공연의 절정으로 뽑고 싶다. 특히 'Like A Dog Chasing Cars'의 웅장함 앞에서는 그저 입을 벌리고 무대를 바라볼 뿐이었다. 브루스 웨인의 숭고한 몰락이, 혹은 '녹슨 면도칼'을 긁는 듯한 조커의 광기가 눈 앞에 펼쳐지는 듯했다.

이윽고 배우 이병헌이 무대 위에 등장했는데, 그는 한스 짐머를 대신하여 <다크나이트> 제작 과정을 소개했다. '영원한 조커' 히스 레저에 대한 헌사도 빼놓지 않았다. 그리고 2012년 콜로라도 총격 사건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곡 'Aurora'가 울려 퍼졌다. 치유의 음악이었다. 한스 짐머는 모두를 숨죽이게 만든 인셉션 테마곡 'Time'과 함께 무대를 떠났다. 첫 아시아 공연에 만족한 듯 밝은 표정이었다.

개인적으로 '역대급'이라는 표현을 좋아하지 않는다. 문법에 맞지 않는 표현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이런 식으로 감탄사가 남발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굳이 '역대급'이라는 표현을 써야 한다면, 한스 짐머에게 바치겠다. 그는 150분이 넘는 시간 동안 관객들을 고담 시로, 사바나 초원으로, 혹은 무중력의 세계로 인도했다. 굳이 영화 속 명장면을 화면 뒤에 띄우지 않아도 충분했다. 환갑의 거장은 오로지 음악의 힘만으로 스크린과 현실의 벽을 무너뜨렸다. 단연, 올해 최고의 공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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