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남한산성> 포스터.

영화 <남한산성> 포스터. ⓒ 싸이런 픽쳐스


영화 <남한산성> 속의 병자호란은 불안한 A매치 축구의 한 장면 같다. 수비 라인이 무너져, 골키퍼 홀로 상대 공격수를 여럿 상대하는, 그래서 TV 앞 국민들을 불안케 하는 장면 같다.
 
막강한 청나라 군대에 포위된 <남한산성> 속의 조선 정부는 불안하기 짝이 없다. 수비수 없이 적군과 마주한 골키퍼처럼 위태하기만 하다. 전국 각지의 근왕병(임금 응원군)을 산성 주변으로 불러 모으려 하지만, 여의치 않다. '상대 공격수들'이 산성을 철저히 포위한 까닭에 외부와의 연락이 용이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등장하는 인물이 서날쇠(고수 분)다. 장교도 관료도 아닌 대장간 주인 서날쇠가 예조판서 김상헌을 통해 왕명을 받고, 산성을 넘어 조선군 진영을 찾아간다. 그렇게라도 응원군을 불러 모아야 할 만큼, 영화 속 조선 정부의 처지는 한없이 딱하다.

실제의 병자호란도 영화처럼 어렵게 전개됐다. 당시의 청나라는 동아시아 최강이었다. 명나라는 이미 저무는 태양이었다. 이런 정세를 틈타 청나라는 1636년 조선을 상대로 기존의 형제관계를 군신관계로 바꿀 것을 제안했다.

역사 속의 병자호란

형식상으로나마 평등한 국제관계가 없었던 옛날 동아시아에서는, 가급적 국가 간의 서열을 매기려 했다. 그런 우열을 전제로 국제관계를 수립했다. 우열의 정도에 따라 군신관계(부자관계), 숙질관계, 형제관계 등등이 있었다. 의제적 가족관계가 국제질서 서열화에 활용됐던 것이다.

형제처럼 지내자던 청나라가 갑자기 아버지 혹은 주군이라 부르라 하니, 조선은 불쾌했다. 그보다는 기존에 아버지로 모시던 명나라와의 의리가 더 걱정됐다. 그래서 청나라의 요구를 뿌리쳤다. 이 때문에 병자호란을 맞게 된 것이다.   

병자호란 직전, 조선은 전쟁 징후를 감지했다. 하지만 충분한 대비가 되어 있지는 않았다. 그래서 사전에 방지하지 못하고 침략을 당해야 했다. 전쟁 초반에 조선 정부가 세운 전략은, 전방지대 산성들을 중심으로 적의 남진을 차단하는 가운데, 인조 임금이 강화도로 들어가 항전을 지휘한다는 것이었다.

 남한산성 성벽.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소재.

남한산성 성벽.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소재. ⓒ 김종성


그 같은 방어전략의 키워드는 '산'과 '물'이었다. 전방 부대들은 산성에서 시간을 끌고, 임금은 물 위의 섬에서 지휘하는 전략이었다. 산과 물은 유목민과 그들의 말에 취약하다. 이들한테는 초원이 유리하다. 그래서 유목민이 기피하는 산과 물을 이용하는 방어전략을 세운 것이다.

이 전략은 13세기 때 몽골과의 전쟁에서 효험을 냈다. 고려 무신정권은 강화도로 옮겨간 뒤, 전국의 산성들을 중심으로 몽골군과 싸웠다. 약 40년간 전개된 이 전쟁은 무승부로 끝났다. 고려가 신하국이 되는 조건으로 전쟁이 끝나기는 했지만, 군사 대결 자체에서는 승부가 나지 않았다. 병자호란 당시의 조선은 이런 전략을 모방해서 청나라군에 맞섰다.

당시 청나라는 동아시아 최강이지만, 아직은 만주만 장악한 상태였다. 중국 본토에는 명나라가 아직 살아 있었다. 그래서 조선과의 전쟁을 오래 끌 수 없었다. 오래 끌면 명나라의 역습을 당할 위험이 있었다. 그래서 강화도에서 오래 버티는 것만으로도 조선군은 적군을 돌려보낼 수 있었다.  

그런데 인조는 강화도로 못 들어갔다. 조선의 전략을 눈치 챈 청나라가 인조의 강화도행을 차단했을 뿐 아니라 청나라군의 진격 속도가 매우 빨랐기 때문이다. 이것은 조선군의 방어 전략을 초장부터 흔들어대는 요인이 됐다.

청나라군의 속도가 빨랐던 이유 중 하나는, 조선군이 산성 방어에 치중하느라 큰길 방어에 만전을 기하지 못한 데 있었다. 사전에 낌새만 챘을 뿐 전쟁을 철저히 대비하지 못한 탓에, 대로변 방어에 소홀했던 것이다. 그래서 청나라군은 산성 공략에 투입되는 에너지를 최소화하면서 빠른 속도로 남하할 수 있었다.

이들의 속도가 빨랐던 데는 기술력의 진보도 한몫을 했다. 전통적으로 북방 유목민들은 기마부대를 이끌고 한민족의 산성을 포위 공격하다가 지쳐서 돌아가는 예가 많았다. 성벽을 깨트리거나 넘을 만한 군사기술이 마땅치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병자호란 때의 청나라군은 달랐다. 산성을 깰 만한 기술이 있었다. 우수한 대포를 갖고 왔던 것이다. 1598년에 끝난 임진왜란 뒤로 동아시아의 혼란을 틈타 종족 통일과 만주 통합을 이룩하는 과정에서 명나라와 서양의 군사기술을 흡수했던 것이다. 이에 관해 육군본부 군사연구소가 발행한 <한국 군사사 7>은 이렇게 말한다. 아래에 나오는 '후금'은 청나라의 이전 국호다.

"후금은 1631년 초부터 화약 무기를 제조하여 주요한 병기로 채택하였다. 후금은 천총 5년(1631) 정월, 서양식 대형 화포인 홍이포를 최초로 생산하고 이를 장비한 부대를 편성하게 된다. 이어서 명나라의 장수로서 반란을 일으킨 공유덕, 경충명, 상가희 등이 후금에 투항하였는데, 이들은 다수의 전선과 함께 서양에서 직접 수입한 우수한 신형 화포를 가지고 왔다. 따라서 후금의 화포 수준과 포병의 능력은 이전에 비해 한 단계 더욱 향상되었다."

 홍이포. 조선시대 해안방어기지인 강화도 광성보에서 찍은 사진. 인천시 강화군 불은면에 있다.

홍이포. 조선시대 해안방어기지인 강화도 광성보에서 찍은 사진. 인천시 강화군 불은면에 있다. ⓒ 김종성


영화 <남한산성>에는 청나라 대포가 조선군을 위협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본래부터 기동성을 갖춘 기마부대를 보유한 데다가 화력이 탁월한 포병부대까지 끌고 왔으니, 조선 정부의 낙관적 예상을 뒤엎고 청나라군이 그렇게 빨리 남하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남한산성> 초반 자막에서는 전쟁이 1636년 12월 발발했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병자년 12월 즉 1637년 1월 발발했다. 음력인 '병자년 12월'을 양력으로 환산하는 과정에서, '병자년'만 '1636년'으로 환산하고 '12월'은 그대로 두다 보니 '1636년 12월'이란 오류가 생긴 것이다.

전쟁의 정확한 발발 일자는 음력으로 인조 14년 12월 9일, 양력으로 1637년 1월 4일이다. 그런데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날은 닷새 뒤인 음력 12월 14일, 양력 1월 9일이다. 압록강을 건넌 뒤로 청나라군의 남하 속도가 그렇게 빨랐던 것이다.

조선 후기에 나온 <산성일기>란 책이 있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벌어진 일을 시간 순으로 정리한 책이다. 이 책에 남한산성 피신에 관한 대목이 있다. 몇몇 표현을 알기 쉽게 바꾸었다.

"14일 오후에 대가(어가)가 어찌할 겨를도 없이 급하게 남대문을 나서 강화도로 향하는데, 적장 마부대가 수백 기병을 거느리고 이미 홍제원에 다다랐다. 임금이 도로 들어오시어 남문에 옥좌를 놓고 앉으시니, 위아래 사람들이 마음이 급하여 허둥지둥하고 성중에 곡소리가 하늘에 사무쳤다.

이조판서 최명길이 자청하여 적장에게 나아가서 만나는 사이에, 훈련대장 신경진에게 모화관에 진을 치도록 하고, 대가는 광희문으로 나와서 남한산성에 들어가셨다."

 광희문. 서울시 중구 광희동에 있다.

광희문. 서울시 중구 광희동에 있다. ⓒ 김종성


영화 <남한산성>과 실제 역사의 차이점

임금이 한양에서 강화도로 이동할 틈도 주지 않고 청나라군이 신속히 남진했던 것이다. 최명길과 신경진이 시간을 끌어주지 않았다면, 강화도로 가려 했던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방향을 돌려 급히 피신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조선군이 큰길 수비를 놓친 것과 청나라군의 대포가 좋아진 것 때문에 전황이 이렇게 빨리 전개됐던 것이다.

이렇게 임금을 강화도로 피신시키기조차 힘들 정도로 조선군은 힘들었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게 있다. 영화 속 상황처럼 그렇게 한없이 불리하지만은 않았다는 점이다.

영화 <남한산성>에서는 조선 정부의 고립 상태를 극대화시켜 보여줄 목적으로 서날쇠란 노동자를 등장시켰다. 외부와의 연락이 단절돼 응원군을 불러올 수 없을 정도로 급박해서, 장교가 아닌 노동자에게 임금의 밀지를 맡겨야 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한 것이다.

하지만, 실제 상황은 판이했다. 청나라군이 중부권까지 내려올 경우에는 강원·충청·전라·경상도 부대들이 경기 일대에 집결한다는 방침이 병자호란 직전에 이미 수립돼 있었다. 조선군의 전쟁 대비가 부실하기는 했지만, 그 정도 준비는 되어 있었다.

<인조실록>에 따르면, 인조 14년 11월 13일(음력) 즉 1636년 12월 9일이었다. 전쟁 발발 26일 전이었다. 비변사(국가안전보장회의)가 인조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얼음이 언 후에 불의의 변고가 있게 되면, 아래 지방 군사들을 징발하기가 매우 힘들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삼남과 강원도에서 정예군 1만 8천 3백 명을 뽑아서 대기하도록 해놓았습니다."

청나라군이 침입하면 삼남(충청·전라·경상) 및 강원도 병력 1만 8300명이 경기도에 집결하도록 해놓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쟁 중에 굳이 근왕병 소집령을 내리지 않더라도, 전국 각지의 군대가 경기도 일대에 집결하도록 되어 있었다.  

<남한산성> 속의 조선 정부는 근왕병을 부를 목적으로 성밖과 소통하는 문제로 고심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이렇게 본다면, 배우 고수의 인상적인 연기는 훌륭했지만, 그가 맡은 서날쇠 역은 병자호란의 실상을 전달하는 데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응원군 동원만큼은 사전에 준비돼 있었기 때문에, 인조가 남한산성에 갇힌 동안에 산성 주변에서 응원군과 청나라군 사이에 대규모 전투가 빈발했다. 그런 가운데 양력 1월 30일에는 전라도 병마사(전라도 사령관) 김준룡 부대가 적군을 대파하고 적장을 죽이는 성과를 거두었다. 병자호란 발발 이후 최초의 전승이었다.  

남한산성 주변으로 몰려든 것은 정부군뿐 아니었다. 민간 의병대도 모여들었다. 전라도 관군이 최초의 승리를 거둔 것처럼, 의병 분야에서도 전라도가 두각을 보였다. 전라도에서는 전·현직 공직자들이 중심이 된 1만 의병부대가 조직되었다. 이 부대는 정부를 구하고자 남한산성을 향해 북상했다. 하지만 북상 중에 항복이 결정됐다. 그래서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영화와 달리 실제로는, 적지 않은 응원부대가 남한산성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부분적인 성과도 거두었다. 조선 정부는, 수비 라인 없이 홀로 상대 공격수들을 상대해야 하는 골키퍼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 정부가 항복을 결정한 것은 남한산성 주변에 응원군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전쟁 대비 자체가 불철저했던 데다가 방어 전략이 초장부터 흔들리고, 거기다가 청나라의 최신형 대포와 신속한 남진 속도를 막지 못한 게 결정적 패인이었다. 

남한산성 병자호란 홍이포
댓글10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