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매혹당한 사람들> 스틸 사진.

영화 <매혹당한 사람들> 스틸 사진. ⓒ UPI 코리아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 <매혹당한 사람들>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최근 개봉한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매혹당한 사람들, The Beguiled> 은 일단 아름다운 색채가 가득한 포스터로 주의를 끈다. 더욱이 코폴라 감독 특유의 소녀적 감성과 잘 맞아 떨어지는 니콜 키드먼, 커스틴 던스트, 앨 페닝 등의 '엘프 스러운' 배우들의 등장은 빅토리안 스타일의 귀여운 소동극을 연상하게도 한다.

그러나 영화는 '소돔과 고모라'의 여성 버전에 가깝다. 남북 전쟁 중 부상 당한 군인 '존' 이 우연히 여자 기숙학교에 당도했을 때, 그곳에 있던 굶주렸던 여자들의 욕정과 탐욕이 폭발한다. 그리고 존의 페니스를 차지하고자 하는 여자들의 혈투가 시작된다.

소돔과 고모라를 닮은 숲속 기숙학교

코폴라의 이번 신작은 토마스 컬리넌의 장편 소설을 바탕으로, 1971년 돈 시겔 감독 (<더티 해리> <알타트레즈 탈출>)이 연출하고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출연했던 동명의 영화, <The Beguiled>의 리메이크작이다. 코폴라 감독의 영화도 충분히 쇼킹하지만, 조금 더 컬트적이고 정제되지 않은 버전이 끌린다면 시겔의 오리지널을 추천하고 싶다.

소돔과 고모라(Sodom and Gomorrah)는 창세기에 등장하는 이웃한 두 도시다. 이 두 도시에서 만연했던 음란하고 방탕한 행실에 신은 진노하고 결국 불과 유황으로 멸망시켰다 한다 (창세기 18~19장). 성경의 레퍼런스가 어원이 되어 소도미(sodomy) 라는 단어는 성적인 문란(과거에는 동성애, 근친상간, 다른 인종과의 섹스, 아동 성행위 등을 포함한)을 뜻하기도 했다.

 영화 <매혹당한 사람들> 스틸 사진.

영화 <매혹당한 사람들> 스틸 사진. ⓒ UPI 코리아


소녀들이 서식하는 숲속 기숙학교는 성경 공부와 바느질을 가르치는 성스러운(sacred) 곳으로 보이지만 병(病)적인 음기가 가득한 곳이다. 학교의 원장 미스 마사는 친오빠와 근친 관계를 유지하다가 오빠를 살인한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이고, 학생 중 캐롤은 존이 도착하자마자 단추를 풀고 접근하는 저돌적인 소녀다. 소녀들을 가르치는 에드위나 선생님은 그나마 가장 정상적인 인물로 보이지만 그녀도 존과 다른 여자들을 향한 질투로 존을 파괴하는 인물이다.

공교롭게도 소도미가 정의하는 음란한 악행(vice)들은 존이 영화 안에서 여자들과 맺는 모든 관계 안에서 그려진다. 다리 부상으로 방 안에 누워만 있는 그지만 여자들은 한 명씩 제 발로 그의 방을 찾는다. 존은 시중을 들어주는 흑인 하녀에게 '우리 모두 갇혀있는 신세'라며 마음을 산다. 나이가 제일 많은 학생인 캐롤은 몰래 존의 방에 들어와 잠든 존의 입술에 그녀의 입술을 밀어 넣는 것으로 첫인사를 한다. '나는 17살이지만 또래보다 훨씬 많이 안다'는 이 소녀를 존은 두 팔 벌려 환영할 수밖에 없다.

존의 실질적 병간호를 맡아서 하는 에드위나는 이 기숙학교의 유일한 선생이다. 존은 이상형이라며 에드위나에게 적극적인 애정 공세를 펼치고 그녀도 서서히 그를 사랑하게 된다. 대쪽 같은 미스 마사 역시 결국 존에게 넘어가고 만다. 그녀는 친오빠와의 근친 관계를 정리하고(왜인지는 설명되지 않는다) 학교를 운영해오며 에드위나에게 동성애적 사랑을 품어오던 중에 존을 돌보게 된 것이다. 그녀는 존, 에드위나와 함께 셋이 섹스하는 꿈을 꾸곤 한다.

이런 위험천만한 일상은 존이 어느 밤 캐롤의 방에 들어가 관계를 맺으면서 무너진다. 이를 목격하고 분노한 에드위나가 존을 계단에서 밀어 버리고 간신히 회복한 그의 다리가 다시 부러진다. 영화의 대반전은 미스 마사 역시 질투에 눈이 멀어 존의 다리를 절단하기로 한 순간부터 시작된다. 어차피 '괴사'가 시작될 것이니 죽는 것보다는 절름발이로 사는 게 낫지 않겠냐며 톱을 들고 나타난 것이다.

금기 사라진 할리우드의 '한풀이'

 영화 <매혹당한 사람들> 스틸 사진.

영화 <매혹당한 사람들> 스틸 사진. ⓒ UPI 코리아


영화의 후반부 클라이맥스에서 일어나는 이 사건을 시점으로 영화는 호러와 코미디로 장르를 둔갑한다. 숲속 기숙학교와 그 안을 메우고 있는 고고한 여성들을 안데르센 동화의 서문처럼 그렸던 전반부를 360도 전복하는 것이다. 눈을 부릅뜨고 톱질을 하는 미스 마사의 얼굴에는 페인트인 것이 역력한 붉은 피가 튀고 로우 앵글로 잡은 카메라에서는 썰려 나가는 존의 다리가 비친다. 며칠이 지나 정신을 회복한 존은 다리가 절단된 것을 알고 경악한다. 그는 미스 마사에게 "차라리 거세하지 뭣 하러 다리를 잘랐냐" 며 분노한다. 실소가 터지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영화는 또 다른 반전 하나를 선물하며 끝을 맺지만, 그것까지는 독자들을 위해 밝히지 않기로 한다. (직접 보는 것을 추천한다)

<매혹당한 사람들>은 그냥 그런 B급 영화의 오명을 쓰기 쉬운 작품이지만 영화는 1970년대 초반 뉴 아메리칸 시네마가 태동했을 때의 창의적인 에너지와 문화적 변화의 역동이 그대로 투영된 작품이다. 1968년 할리우드의 자기 검열 시스템(self-censorship system)이 무너지고 현재의 등급제(rating system)로 변경되면서 기존의 검열에서 특히 금기시 했던 성과 인종, 종교에 대한 묘사들이 자유로워진 것이다. 흑인들이 백인들을 비웃는 농담과 욕으로 가득한 블랙스플로이테이션(Blaxploitation) 같은 장르가 70년대 초반에 잉태된 것도 그 이유다. 아마도 <매혹당한 사람들>이 약간은 지나칠 정도로 섹스와 흑인 여성에 대한 백인 남자의 욕망을 노골적으로 표현한 것은 근 50여 년간 영화들을 옥죄었던 청교도적 검열 정책에 대한 조소이자 한풀이 일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검열의 폐지만이 저렇게 배짱 좋은 영화의 탄생에 기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영화가 만들어지던 시기를 전후로 일어났던 각종 인권운동과 포스트 페미니즘, 섹슈얼 레볼루션은 <매혹당한 사람들>의 '못 해서 미친' 여성 캐릭터들과 그들에게 (상징적으로) 거세당하는 남근적 심볼의 전형(클린트 이스트우드)으로 구현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소피아 코폴라의 리메이크 작은 더욱 흥미로운 작품이 될 것이다. 혁명적 분자로 가득했던 남성 거장의 영화가 반세기 이후, 페미니스트적 시선을 담은 여성 거장의 시선에서 어떻게 다시 태어났을지 꼭 확인해 보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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