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는 암울하고 슬픈 시대이지만, 서사적으로는 매력 있고 인기 있는 시대로 자리 잡는다. 그러기에 많은 매체 등에서 그 시기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를 써내고 제작하는 것 아닐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암울하지만 동시에 이상한 매력이 있는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여성 서사는 많이 없었던 것이 흠이었다. 많은 독립운동에 관한 이야기를 보았던 것 같지만, 제대로 쓰여 많은 사람의 뇌리에 남아 있는 것은 <암살>의 안옥윤 외에 없다시피 하니까. 하지만 이번 KBS 단막 드라마에서, 제대로 된 여성 독립 운동가 서사를 하나 내놓았다. 바로 <강덕순 애정 변천사>다.

좋은 성장 서사

 KBS 드라마스페셜 <강덕순 애정 변천사>

KBS 드라마스페셜 <강덕순 애정 변천사>ⓒ KBS


서사적으로 이야기하기 전, 강덕순 역을 맡은 김소혜라는 인물을 살펴보자. 김소혜는 그 자체로 성장의 아이콘이었다. <프로듀스 101> 시절 처음 F등급의 연습생이었으며, 그 유명한 '소혜야 가수가 하고 싶어?'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하지만 김소혜는 꾸준한 성장으로 아이오아이로 데뷔했다. <강덕순 애정 변천사>는 걸그룹 아이오아이로 데뷔한 김소혜의 첫 드라마다. 아이돌 출신의 배우가 연기를 보여줬을 때 흔히 있는 연기 논란 없이 김소혜는 성공적으로 강덕순 캐릭터를 보여줬다.

그렇다면 강덕순은 전체 이야기에서 어떤 캐릭터일까. <강덕순 애정 변천사>는 우선 정확한 성장 서사다. 김석삼이 헤어지고자 한 것도 모르는 채 그를 찾아가야 한다고 말하던 강덕순은 서울로 올라간다. 글씨도 모르고 세상 물정도 모르는지라 모녀 주막에 가 '독립군을 찾으러 왔다'고 크게 외치기도 한다. 거의 내쫓기가 싶은 상황 속, 일을 배우겠다며 글자를 가르쳐달라고 한다. 그 속에서 강덕순은 '석삼'을 쓰는 법을 가르쳐달라 하지만, 조국희 '덕순'과 '독닙'을 가르쳐준다. 자신의 이름이 먼저라며 말이다. 친밀감을 형성하며 조력자이자 스승이자 친구로 덕순과 관계를 쌓던 조국희는 독립에 관한 임무를 수행하다 죽는다. 강덕순은 왜 국희가 죽어야 했는지 알고자 하고 그 속에서 나라의 현실을 인식하게 된다. 그 후 강덕순은 거사에 참여하기로 한다. 서사의 흐름은 강덕순의 성장으로 달려간다.

러닝 타임이 짧았던 덕에 불필요한 액션 장면이 없던 것 또한 강덕순의 성장에 집중할 수 있던 기회가 된 듯하다. 많은 독립운동, 혹은 전쟁 서사에서는 액션 장면이 과도하게 등장한다. 물론 그것이 상업적으로 '볼거리'가 되어주는 경우는 많지만, 때로 '투 머치'라고 느껴질 때가 많다. <강덕순 애정 변천사>는 러닝 타임 때문인지, 서사에선 흔히 독립 운동가 서사에 등장하는 액션 장면 등이 거의 보이지 않는데, 이는 오히려 강덕순의 성장에 집중되는 긍정적인 효과로 남았다. 그리고 '애정 변천사'라고 내건, 드라마의 제목 및 주제와도 잘 맞기도 하다.

이야기가 진행되며 성장하는 강덕순의 모습은 실제 캐릭터를 소화해낸 성장의 아이콘 김소혜와 유사성을 지닌다. 아이돌 데뷔와 달리 성공적으로 시청자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여줬지만, 어쨌든 김소혜의 연기자로서 커리어는 이제 시작이다. 앞으로의 김소혜의 성장은 시작된 셈이다. 마지막 결말에서 임무를 수행하고, 자신처럼 찾아온 시골 소녀 앞에 당차게 서 있던 강덕순의 모습과 김소혜의 모습은 겹쳐 보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잘 짜여진 주변 인물들, 그리고 성장의 이어짐

 KBS 드라마스페셜 <강덕순 애정 변천사> 방송화면 캡처.

KBS 드라마스페셜 <강덕순 애정 변천사> 방송화면 캡처.ⓒ KBS


이 드라마가 가진 미덕이라면 주변 인물들이 가지는 캐릭터 또한 있을 것이다. 물론 한 시간이라는 짧은 러닝 타임이 보여주는 아쉬움은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시간이라는 짧은 러닝타임 속 인물들은 유기적으로 서로 관계를 가진다. 이는 모녀 주막을 운영하며 모든 결정을 책임지는, 그리하여 직접 강덕순을 들이게 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된 남희순에서 그치지 않는다.

예를 들자면 조국희는 처음 강덕순에게 설렁탕을 내줬다가도 강덕순이 눈치 없이 독립군이라는 이야기를 하자 설렁탕을 치워버린다. 강덕순에게 한글을 가르쳐주기 싫어하지만, 남희순의 '여성이 배움이 부족한 것은 시대의 비극일진데 어찌 그리 무턱대고 사람을 낮춰 본단 말이오. 이 일이 무엇인지 진정 모르겠소.'라는 말에 설득당해 강덕순을 가르친다. 이후, 조국희는 강덕순과 가장 먼저 친밀감을 가지고 '덕순 독닙'을 가르쳐준다. 거사를 앞두고 죽지만, 덕순이 독립운동에 뛰어들게 하는 가장 커다란 계기를 마련하기도 한다.

나애향은 어떻던가. 조국희가 죽고 난 후 시니컬한 차석주보다 강덕순이 더 편안함과 친밀감을 느끼는 인물이다. 나애향은 강덕순과 깊은 친밀감을 보이는데 이는 강덕순이 시골에서 올라온 계기와, 나애향이 서울에 오게 된 계기가 흡사하기 때문이다. 수원에서 모두가 아는 기생 나애향과 시골뜨기 강덕순의 시작점은 같았다. 이는 두 사람의 친밀감은 물론이거니와 결말과 어우러져 성장하는 주인공 이전의 또 다른 성장하는 인물, 그리고 그 이후의 성장하는 인물이라는 일종의 순환성을 가진다. 모든 캐릭터가 다 매력 있어서 각자의 이야기로 후속편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이 드라마에서 가장 먼저 후속편으로 주목받았으면 좋겠다 싶은 인물이다.

차석주는 극 중 가장 제대로 표현되지 못해 아쉬움을 가지지만, 이 캐릭터 또한 단순히 멋있는 여성 인물을 넘어 서사적으로 반드시 있어야 할 이유를 가진다. 강덕순이 다른 인물들과는 높은 친밀성을 지니며 '언니'나 '국희야' 같은 호칭으로 부른다면, 차석주에게는 '동지'라 부른다. 이때 처음 강덕순이 차석주에게 '차석주 동지'라고 부르는 장면은 강덕순이 독립운동에 뛰어들기로 했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또한 국희가 내쫓길 뻔한, '윷' 사건에서, 그 다이나마이트를 만드는 사람이기도 했다.

젠더 전복

 KBS 드라마스페셜 <강덕순 애정 변천사> 방송화면 캡처.

KBS 드라마스페셜 <강덕순 애정 변천사> 방송화면 캡처.ⓒ KBS


안옥윤이 서사에서 만나봤던 여성 독립 운동가 캐릭터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여성 독립 운동가 캐릭터는 특히 매체에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강덕순 애정 변천사>에서의 세진 세탁 아저씨를 제외하고,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독립 운동가 '주인공'들은 모두 여성이다.

이때 극 초반, 김석삼이 강덕순과 헤어지기 위해 한 거짓말이 생각난다. 김석삼은 강덕순과 헤어지며 독립운동을 '사내만 품을 수 있는 큰 뜻'이라며 강조한다. 하지만 김석삼에게 독립운동은 핑계였다. 그는 독립운동이 아닌 극 중 친일파의 가족에 장가를 든다. 그와 달리 세상 물정 모르던 강덕순은 서울에 온다. 다이너마이트를 보고 윷이라고 하던 강덕순은 자신과 친밀감을 형성한 친구 조국희가 죽었을 때 마음껏 울지도 못하는 세상의 불합리함을 느끼고 자신 또한 독립운동에 참여하겠다고 한다. 나애향을 따르며 차석주를 동지라 부르게 됐다.

그리고 거사가 있는 날, 강덕순은 김석삼을 만난다. 성장을 거치며 석삼을 점점 인생의 중심에서 지워가던 덕순이었지만, 덕순은 석삼을 마냥 미워하기보다는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예의를 지킨다. 그와 아기가 살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결국 헌신적인 여성으로 남는 건가 싶은 아쉬움이 남다가도, 강덕순이 김석삼에게 건넨 '덕순 독닙'이라는 쪽지는 그 아쉬움을 지워내며 통쾌함으로 남는다.

강덕순의 모습은 '헌신적인 여성'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예우를 지킬 줄 아는, 더 훌륭한 인물이었다. 그가 안고 있던 아이의 한글 이름을 지어주기도 한다. 이는 덕순이 과거 사랑했으며, 정혼자였던 석삼에게 보일 수 있는 최우선의 도리일 것이다. 비겁했던 석삼과 달리 덕순은 그에 대한 예의를 끝까지 지킨다. 이때, 여전히 유교 사회의 많은 잔재 중 하나인 사내만의 의, 도리 등의 가치는 여성 인물 강덕순이 보이는 것, 그리고 '사내만이 품을 수 있는 큰 뜻'을 외려 강덕순이 지닌 것, 그리고 그 일을 해낸 것. 그 속에서 성 이분법은 전복된다.

우리 모두 해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사랑

강덕순이 초반에 보여주는 캐릭터는 좋게 말하자면 순박이지만 결국 까막눈에 눈치 없는 촌뜨기다. 하지만 이야기를 거듭해가며, 덕순은 독립운동을 하는 투사로, 그리고 독립된 여성으로 성장한다. 그녀의 독립운동은 더 나아가 그녀 자신의 독립이기도 했으니까. 처음부터 성장해있는 완성형 인물이 아니라 점점 나은 인물로 변해가는 모습을 보이는 덕순은 시청자들에게 희망 있게 남는다. 독립운동 같은 거사는 아닐지라도, 나 또한 무언가 해낼 수 있다는 것으로 말이다.

덕순은 더 나아가 성장을 멈추지 않는다. 모녀 주막에 남아 한글 공부를 더 하기를 택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과 비슷한 시골 소녀 한 명의 앞에 당당히 선다. 열린 결말의 특성상 그 새로 나타난 어린 여성이 어떤 삶을 맞이하게 될지는 잘 알지 못하지만, 마치 차석주, 나애향, 조국희가 덕순에게 그러했듯, 덕순은 그 새로운 여성의 성장의 조력자가 되어주지 않을까. 물론 자신 또한 더 성장해가며 말이다.

또한 덕순이 성장하게 된 계기의 가장 밑바탕에 사랑이 있었다는 것 또한 인상 깊다. 덕순이 처음 서울에 올라오게 된 계기는 사랑하던 석삼 때문이었다. 그리고 덕순이 서울에서 살다가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은, 사랑하던 친구 조국희가 죽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사랑의 정도는 달랐겠지만, 이 모든 것은 결국 인간 자체에 대한 사랑 아닌가. 사랑의 위대함을 세련되게 은유적으로 풀어냈다는 것은, 이 <강덕순 애정 변천사>가 가진 수많은 미덕 중 하나로 남을 것이며, 앞으로 등장할 수많은 서사들의 롤모델로 자리 잡음 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다소 까칠하게 공연을 보고, 이야기 합니다. 때로 신랄하게 '깔'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좋은, 잘 만든 작품에게는 누구보다 따뜻하지 않을까요? / 잘 만든 서사를 기다리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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