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쓴 민병훈 감독은 한국의 영화 감독이다. 민병훈 감독의 영화 <황제>는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 월드프리미어로 초청돼 상영될 예정이다. 민병훈 감독은 러시아 국립영화대학을 졸업해 영화 <벌이 날다>(1998)로 토리노 국제영화제 대상, <괜찮아 울지마>(2001), <포도나무를 베어라>(2006), <터치>(2016) 등으로 국내외 영화제에서 다수의 상을 받았다. 올해 단편영화 <설계자>가 네마프 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초청 상영되기도 했다. [편집자말]
한 편의 영화가 탄생하기 위해선 무수한 산고를 겪어야 합니다. 물론 만들어진 모든 영화가 관객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간혹 아침 햇살을 차마 바라보지도 못하고 잦아드는 이슬처럼, 조용히 사라져간 훌륭한 영화도 많습니다.

스크린 독과점에 대해 물고 늘어진 지 10년이 지났습니다. 많은 언론에서도 문제제기를 했습니다. 그럼에도 스크린 독과점이라는 괴물은 계속 덩치를 키워나갔습니다. 멀티플렉스는 '뷔페'입니다. 관객들은 다양한 영화를 입맛에 맞게 골라먹을 권리가 있습니다. 그래야 고객들은 다양한 음식을 통해 즐거움과 행복감을 맛보고, 식당은 이익을 얻으며 함께 공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극장에 가도 볼 영화가 한두 편 밖에 없습니다. 이 환경에 관객들도 이미 익숙해졌습니다. 오로지 관객 잘 드는, 돈 버는 영화가 최우선입니다. 우리만 디지털 시대에 사는 게 아닙니다. 미국과 유럽, 가까이 있는 일본도 똑같이 디지털로 영화를 상영하지만 대한민국처럼 한 영화가 스크린의 절반 가까이를 싹쓸이 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극장은 망하지 않고 잘 운영되고 있습니다. 영화를 살리는 건 오로지 다양성의 회복이고 그것이야말로 문화선진국에 들어서는 지름길입니다.

스크린 독과점 문제는 영화의 잘못도, 영화관만의 문제도 아닙니다. 순진한 이들은 영화산업의 주체들이 이를 자율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실제로 영화진흥위원회는 '상생' 어쩌고 하는 협약을 이끌어내기도 했지만, 그 협약은 제스처에 불과했습니다. 영화산업 주체는 '최대 이윤의 추구'라는 자본주의 작동 기계를 멈출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영화 <황제> 스틸 사진

영화 <황제>의 한 장면 ⓒ 민병훈


<황제>를 개봉하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저는 나름의 책임감을 가지고 영화를 만드는 감독입니다. 제가 만든 영화가 역동적이고 재미있는 영화가 아닐지는 몰라도 영화를 통해 인간을 움직이고 영혼을 움직일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그렇기에 지금의 시간을 견뎌 왔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현재의 대한민국 영화 환경에서 올해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선보이는 <황제>의 극장 개봉이 무모하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영화는 관객과 만나야 하고 관객들의 평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감독으로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영화의 운명이자 영화가 짊어져야 할 길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극장 상황과 유통 구조가 <황제> 같은 영화가 살아가야 할 길은 아니라고 판단됩니다.

감독은 자신의 마음 속 이야기를 관객들과 함께 나누고자 영화를 내놓을 것입니다. 온전한 대화가 이뤄지려면 보는 관객과 만드는 감독이 서로 통하는 언어로 이야기를 나눠야겠지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영화가 영화의 본질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대중성이 곧 '보편성'이라고 영화인이나 일반 대중은 곧잘 착각합니다. 많은 대중이 좋아한다고 해서 그것이 보편적인 것은 아닙니다. 어떤 영화에서 보편적인 가치와 형식을 담고 있다 해도 대중은 외면할 수 있습니다. 결국 감독은 관객을 배려하되 자신의 중심을 잃지 말고, 관객은 영화를 즐기되 작가의 정신을 빼앗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대안이 있어야 할까요? 저는 분명히 말합니다. 정부가 나서서 상생할 수 있는 법적인 테두리를 만들면 간단해집니다. 지난 10년간 아수라장이 된 영화 먹이사슬의 형태를 뒷짐만 지고 방치한 국가가 책임져야 합니다. 지난 이명박, 박근혜 정권에서 문화체육부와 영화진흥위원회는 반복되는 스크린 독과점에 대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극장과 창작자가 서로 갑과 을이 되어 피터지게 싸우고 한쪽이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했습니다. 죽어가도 딴 나라 얘기인양 방관했습니다. 오히려 '문화계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영화계를 통제하려고만 했을 뿐, 스크린 독과점을 규제할 법안이나 제도에는 관심조차 없었습니다.

국내에서 한 주에 평균 15편 정도가 극장에 걸립니다. 문제는 저예산·독립 영화들은 마케팅 비용 등으로 인해 상업영화에 비해 사전 인지도가 부족한 상태에서 시사회를 하고 개봉할 수밖에 없다는 점입니다.

멀티플렉스로 대변되는 극장문화 속에서 색다른 영화, 새로운 영화를 볼 기회는 상대적으로 매우 협소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류 상업 영화들 말고 각양각색의 영화들은 어느 극장에 걸려 있는지조차 찾기 힘들고, 보러갔다 하면 이미 막을 내린 지 오래입니다. 더군다나 독립영화나 저예산영화들은 아예 상영 기회마저 보장받지 못하고 묻히거나 지역의 소규모 공간에서 상영회를 전전하기 일쑤입니다.

 영화 <황제> 스틸 사진.

영화 <황제>의 한 장면 ⓒ 민병훈


지금 저예산·독립영화는 절대적 어려움과 상대적 박탈감이라는 이중적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행로는 불투명하고 '불안감과 가난'이라는 수식어가 친숙하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독립 영화는 누가 나서서 이름을 붙인 것이 아니라 상업영화에 대한 반발과 나름의 소명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활로를 모색하다 스스로 창조해낸 이름이라 생각됩니다. 지금은 다양한 상영기회를 없애는 잘못된 산업과 다양성 확보를 위한 공공적 관점의 부족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과거에 비해 다양한 상영공간이 없어지고 있는데, 어떻게 상영 기회를 만들 수 있겠습니까?

이를 해결하기 위해선 대안적이고 혁신적인 방식이 들어와야 합니다. 예술영화 관객들이 사라졌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어디선가 움직이고 기회를 엿보고 있습니다. 다만 아직 봄이 오질 않았으니 그냥 동면 상태로 겨울을 보내고 있는 것뿐이죠.

지금 우리 영화 현실에 조금만 관심을 갖고 있는 분이라면 누구나 '공간'을 고민하고 '배급'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전용관' 이야기도 무수히 많이 나왔고 다양성 공간에 대해서도 고민을 많이 해왔습니다. 하지만 변한 것은 없습니다. 물론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바꿀 수는 없겠죠. 그렇지만 우리가 고민하는 사이, 우리의 소중한 영화는 생명을 잃어가고 설자리를 빼앗기고 있습니다. 고민만 하지 말고 행동으로 보여야 합니다.

정부의 지원이 필요합니다

정부는 독립·예술 영화에 대한 다양한 문화의식을 고취하는데 전폭적인 지지와 지원을 마련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영화진흥위원회 및 산하 단체에서 국내 언론사와 방송사 관계자들을 초청해 다양한 영화들이 소통될 수 있도록 협조 요청을 하고 최소한의 광고 및 배급을 할 수 있도록 요구해야 합니다. 또한 예술·독립 영화관을 운영하고 있는 극장들과 시네마테크에도 지금보다 더 적극적으로 독립 영화들을 안정적으로 소개할 수 있도록 다양한 혜택의 서비스와 자금을 지원해야 합니다. 극장들 역시 일반 관객들에게 독립영화를 알릴 수 있는 있도록 다양한 프로그램을 만들어 능동적이면서도 획기적인 콘텐츠를 도입하여 꾸준하게 관객들을 확장시켜야 합니다.

이제 우리의 영화적 환경은 외부적으로는 고도비만이 돼버렸고 내부적으로는 창작 에너지가 고갈돼 더 이상 기쁨의 원천이 샘솟지 않는 마른 우물이 돼버렸습니다. 사람들은 영화계가 호기를 넘어 기회이고 황금산업이라고들 말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영화인들 대부분 내부적으론 뭔지 모를 막연한 위기감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양한 영화 단체와 영화인들이 모여 문제를 같이 풀어보고 노력해야 할 때입니다. 답답한 몸부림이 어제 오늘 일은 아니지만 이렇게 만날 똑같은 밥만 먹다간 결국 우리 관객들은 극심한 영양실조에 걸리고 말 것입니다. 우리에겐 다른 영화를 볼 권리가 있고, 다른 영화를 볼 오늘이 필요합니다. 물론 다양한 영화에 대한 관객들의 이해심 또한 풍부해졌으면 하는 소망도 가져봅니다.

민간에서 싸움이 나고 불공정한 일이 생길 때, 입법기관이나 행정부를 통해 적당한 규칙을 정해주는 게 정부의 임무입니다. 하지만 통제 외엔 뒷짐 지고 구경만 한 지난 정부를 거치며 오늘날의 참담한 상황이 벌어진 것은 사필귀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스크린 독과점 문제는 더 이상 민간의 노력과 힘 대결로 해결할 상황이 아닙니다. 이 미친 질주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스크린 독과점 방지법' 말고는 없습니다. 자율 경제를 앞세우기 전에 이 황폐화 된 영화시장의 모순을 국가가 똑바로 견지하길 바랍니다.

범인은 국가이지 영화가 아닙니다.

 민병훈 감독 프로필 사진

민병훈 감독 ⓒ 민병훈



스크린 독과점 영화 황제 민병훈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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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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