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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3년 흥선대원군이 실각하고, 아들 고종이 친위 내각을 구성했다. 그 후 우리 정치에 나타난 특징이 있다. 자주적으로 살 것인가 외세에 의존할 것인가, 외세에 의존한다면 이 외세를 이용할 건가 저 외세를 이용할 건가의 쟁점이 항상 대두됐다.

고종이 아버지의 시장개방 반대정책(이른바 쇄국정책)을 폐기하고 외세를 끌어들여 외세를 견제하는 이이제이 정책을 채택하면서부터, 청나라·일본·러시아·영국·미국 등의 정치적 입김이 강해졌다. 그 후 지금까지 우리 정치에서는 외세와의 관계가 항상 문제시되었다.

필요에 따라서는 외세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외세에 대한 맹목적 추종은 민족공동체 전체를 파멸의 나락으로 떨어트릴 수도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외세를 끌어들이는 데 앞장선 사람들마저 그런 지경으로 추락시킬 수도 있다. 일본의 대한제국 강점에 앞장섰다가 '사냥'이 끝나자마자 토사구팽당한 일진회가 적합한 사례가 될 것이다.

일본은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을 강점했다. 일진회는 일등 조력자였다. 그런 일진회가 다른 나라도 아니고 바로 일본에 의해 해체를 당했다. 강점 1개월도 채 안 된 1910년 9월 26일의 일이었다.

일진회는 을사늑약(이른바 을사보호조약) 1년 전인 1904년 송병준의 주도로 창립됐다. 이 단체는 그 해 발발한 러일전쟁 때부터 일본을 본격적으로 거들었다. 한반도를 둘러싼 러시아·일본 간의 균형을 깬 러일전쟁은 일본이 대한제국을 독점하는 데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 전쟁 때 일진회는 일본군의 군수물자 수송을 돕고, 만주에 주둔한 러시아군의 정보를 파악해 일본군에 제공했다.

송병준.
 송병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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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친일단체 일진회의 대변인 역할을 했을 가능성 있는 의외의 인물이 있다. 바로, 이승만 전 대통령이다. 2011년 8월 21일 자 <한겨레>에서는 그때 미국에서 이승만이 벌인 활동과 관련하여 1905년 8월 4일 자 <뉴욕 데일리 트리뷴> 및 8월 8일 자 <스타크 카운티 데모크라트> 등을 인용하여 이렇게 보도했다.

"당시 미국 신문기사들을 검색한 결과, 이승만과 윤병구는 대한제국과 고종을 적극 부정하고 '일진회의 대변인'을 자처한 것으로 드러났다. 또 '일본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있는 것을 기뻐한다'고 말하는 등 일본 쪽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인 사실도 드러났다."

일본의 러일전쟁 승리가 확정되자, 일진회의 친일 농도는 한층 짙어졌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 체결 당시에는 일본에 외교권을 넘기라는 선언서를 발표했다. 고종이 독립에 대한 국제사회의 지원을 얻을 목적으로 벌인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 때는, 고종한테 황제 자리에서 떠날 것을 요구했다.

뒤이어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고 의병 투쟁이 활발해지자, 일진회는 자위단을 조직해 의병 진압에까지 앞장섰다. 일본군이나 경찰이 해야 할 일을 대신해준 것이다. 또 군대 해산 뒤에 있는 다이쇼 왕세자(이른바 황태자)의 서울 방문 때는 환영의 뜻으로 서울 남대문에 대형 아치를 세웠다. 

일진회가 다이쇼 왕세자를 환영하는 뜻으로 서울 남대문에 세운 대형 아치. 양쪽 기둥에 ‘일진회’란 문구가 있다.
 일진회가 다이쇼 왕세자를 환영하는 뜻으로 서울 남대문에 세운 대형 아치. 양쪽 기둥에 ‘일진회’란 문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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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뿐 아니다. 1909년부터는 일본의 한국 강점을 위한 분위기를 적극 조성했다. 일본이 대한제국을 합방해달라는 상소문까지 올린 것이다. 이 같은 상황이 비타협적 독립투사, 심산 김창숙의 자서전 <벽옹 73년 회상기>에 이렇게 설명돼 있다.

"기유년(1909년), 일진회 반역배인 송병준·이용구 등이 일본 통감 이등박문의 사주를 받아 우리 정부에 상서(상소)하고 또 일본 정부에 투서해서 한일합방론을 제창하자, 최정규·이원달 같은 그 주구들이 이어받아서 신문에 떠들썩하게 보도하였다. 일인들은 큰소리로 '이는 조선 사람들의 진정한 소원이라' 하였다."

1905년부터 5년간, 일본은 한국 강점을 위해 막판 스퍼트를 가했다. 이 시기, 일진회는 혜성처럼 출현해 일본의 도우미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일본이 할 일을 마치 자기 일처럼 열심히 수행했다. 

그랬으니 1910년 8월 29일 일진회 회원들은 뿌듯했을 것이다. 이날 대한제국이 멸망했으니, 앞으로 일본제국과 함께하게 될 자신들의 앞길이 탄탄대로처럼 전망됐을 것이다.

실제로 그들은 한국 강점이 실현되기 전부터 금전적 보상을 기대했다. 그것이 실현되면 일본 정부의 지원 하에 만주를 개척하고 거기서 자신들의 터전을 다질 계획을 갖고 있었다. 일진회장 이용구가 일본 총리 가쓰라 다로에게 자금 지원을 요청하는 장면이 강준만 교수의 <한국 근대사 산책 5>에 이렇게 소개돼 있다.

"이용구가 그 소요자금 300만 엔을 일본 수상 가쓰라에게 상의하자, 가쓰라는 '300만 엔이 아니라 3000만 엔이라도 책임을 지겠다'고 큰소리쳤다. 이용구는 이 장담에 고무되어 1909년 12월 일본 천황과 각계에 이른바 '1백만 일진회 회원' 이름으로 병합 청원서를 제출하는 등 적극적으로 병합에 앞장섰다."

가쓰라 다로 총리는 그 유명한 1905년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주역이다.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인정하고, 미국은 일본의 한국 지배를 인정한다'는 밀약을 윌리엄 태프트 전쟁부장관과 체결한 인물이다. 태프트는 1909년 제27대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

이용구.
 이용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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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상을 해주겠다는 약속에 고무돼 한국 강점을 열심히 도운 일진회 회원들은, 강점 보름 뒤인 1910년 9월 12일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통감부 휘하의 경무통감부에서 한국인 정치단체의 해산을 요구해온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1910년 10월 1일부터 가동됐고, 그 전날까지는 기존의 통감부가 한국을 지배했다. 

통감부의 해산 통보는 모든 한국인 정치단체를 대상으로 했다. 한국 강점을 반대한 단체들은 물론이고, 적극 협력한 일진회도 포함됐다. 이 통보에 따라 1910년 9월 26일 일진회는 해산됐다. 한국 강점이 성사된 이상, 강점을 반대한 단체는 물론이고 강점을 지지한 단체도 더 이상 필요 없었다. 그래서 일진회가 토사구팽을 당한 것이다.

토사구팽과 동시에 금전적 대가의 약속도 사라졌다. 300만 엔 아니 3000만 엔이라도 주겠다는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하지만, 약간의 금전이 해산 당시에 제공됐다. 그런데 금액이 약속과 너무나 달랐다. 일진회 회원들이 황당함과 불쾌감에 더해 치욕감까지 느낄 만한 수준이었다.

지급된 비용은 15만 원이었다. 일진회가 1910년 1월부터 9월까지 지출한 비용만도 근 8만 원이었다. 그런데 1905년부터 5년간 일본에 충성한 대가로 15만 원을 받은 것이다. 만주에 새로운 터전을 만들기에는 어림도 없는 금액이었다.

1910년 당시, 쌀 1가마니가 5원 정도였다. 15만 원이면 쌀 3만 가마니였다. 당시 일진회 회원이 14만 명 정도였다. 회원 네댓 명한테 쌀 1가마니 분배할 수 있는 돈이었던 것이다. 양심과 동족을 판 대가치고는 너무 적은 액수였다. 차라리 한 푼도 안 줬더라면, 기분이라도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이때 일진회가 받은 충격이 회장 이용구의 반응에서 나타난다. <송건호 전집 12>에 이런 대목이 있다. 

"일제에 의해 배신당한 이용구에게 남은 것은 오직 체념하는 일밖에 없었다. 그는 자기를 찾아온 지난날의 고문 우치다 료헤이의 손을 잡으며 '우리는 아무래도 어리석었던 것 같다'고 알 듯 모를 듯한 말을 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어리석었던 것은 우치다를 포함한 '우리'가 아니라 이용구 자신이었던 것을 아직 깨닫지 못한 것인가. 이용구는 배신의 충격이 너무나 컸던지, 병합이 이루어진 얼마 후 병석에 눕는 몸이 되었다."

이용구는 1912년 세상을 떠났다. 향년 45세였다. 너무 약소한 '금일봉'을 받고 병석에 드러누운 이용구와, 만주 개척의 꿈이 깨진 일진회 회원들의 모습은 외세에 대한 맹목적 추종이 얼마나 쓸쓸한 최후로 연결되는지 잘 보여주었다. 


태그:#일진회, #이용구, #송병준, #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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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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