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인권영화제가 문을 열고 10년이 넘게 지난 지금. 한국사회의 여성인권은 어디쯤 와 있을까요? 스크린에는 여성을 폭력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시각에서 연출한 영화가 범람합니다. 동영상 스트리밍 채널에서는 여성에 대한 폭력이 하나의 흥미로운 콘텐츠처럼 취급됩니다. 2017년,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생각보다 멀리 와있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제11회 여성인권영화제의 주제는 '지금, 당신의 속도로'입니다. 여성인권이 침해되는 현실은 바뀔 수 있다는 믿음을 향해 우리는 각자의 속도로 분명히 나아가고 있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치열하고 용기있는 도전을 9월 20일부터 24일까지 CGV아트하우스 압구정에서 만나보세요.

▲ 제11회 여성인권영화제 상영작 <거룩한 질서> ⓒ 한국여성의전화


<거룩한 질서> | 감독 페트라 볼프

"1971년, 젊은 주부이자 엄마인 노라는 평범하고 작은 스위스의 마을에서 남편과 두 아들과 함께 살고 있다. 그녀가 사는 이 시골 마을은 68혁명의 격변도 비껴간 곳이다. 노라의 삶 역시 마찬가지로, 그녀는 모두가 좋아하는 조용한 사람이었다. 1971년 2월 7일, 여성 참정권이 국민투표에 부쳐지면서 그녀의 공개적인 투쟁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거룩한 질서>는 1971년 스위스 베른 주의 작은 마을에서 일어난 여성참정권 운동을 담는다. 스위스는 서구사회 중 가장 늦은 1971년에 주민투표를 통해 여성참정권이 인정되었는데, 영화는 투표를 앞둔 몇 주간을 담는다.

영화는 68혁명 이후 서구사회의 놀라운 변화들을 클립 화면으로 보여주며 시작된다. 흑인 민권운동과 여성운동, 성 해방 등이 세계를 뜨겁게 달구었지만, 스위스의 작은 마을은 조용하기만 하다. 남편과 시아버지와 두 아들을 돌보며 사는 노라의 일상은 평온하다. "태평양 심해의 물고기들은 완전한 어둠과 고요 속에서 살고 있다"는 노라의 말은 자신을 향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노라는 몇몇 사건들을 겪으며 각성한다. 노라가 파트타임으로 취업하려고 하자, 남편은 '혼인법'을 들어 남편 동의 없이 안 된다며 못을 박는다. 사랑에 빠진 소녀 한나는 '행실이 방정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아버지의 결정 때문에 청소년보호소를 거쳐 감옥에 간다. 일생 식당운영에 헌신한 브로니는 재산권을 쥔 남편 때문에 식당을 빼앗긴다. 노라 역시 여성참정권에 찬성하지만 강하게 주장하지 않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부당함에 눈을 뜬 뒤 적극적으로 말하기 시작하자, 쥐죽은 듯 보였던 다른 여성들도 변화를 보인다.

 제11회 여성인권영화제 상영작 <거룩한 질서>의 한 장면. 여성참정권을 위해 싸우는 이들의 투쟁기이다.

제11회 여성인권영화제 상영작 <거룩한 질서>의 한 장면. 여성참정권을 위해 싸우는 이들의 투쟁기이다. ⓒ Zodiac Pictures International


여성참정권에 반대하는 세력들은 여성참정권이 '거룩한 질서'에 반하며, 좌파의 선동일 뿐이라고 말한다. 또한, 여성 활동가들을 조롱하고, 가족을 따돌린다. 이런 장면들은 <서프러제트>의 1912년 영국 상황과 다르지 않다. 한편 영화 속 시위대의 '낙태권'과 '동일임금' 구호는 지금 한국을 떠올리게 한다. 1912년 영국, 1971년 스위스, 2017년 한국. 엄청난 시차에도 불구하고 억압의 양상이 같다. 투쟁하지 않는 이상, 저절로 억압이 사라지지 않는 까닭이다. 영화는 참정권 운동이 여성의 성적 해방이나 가사노동 등 사적 영역의 투쟁과도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또한, 브로니의 장례식 장면을 통해 한 사람의 일생을 전혀 다른 서사로 말하는 광경을 보여준다. 사제는 근면, 성실, 겸손, 헌신 등을 말하고, 노라는 불평등, 자유, 정의, 투쟁을 말하는데, 이는 가부장적 담론 질서와 여성주의적 담론 질서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스위스의 여성참정권이 이토록 늦게 인정된 이유가 뭘까. 보수 여성단체들의 반대 운동 탓도 있지만, 지방자치와 직접민주주의가 결정적이었다. 1958년에 스위스 연방의회가 여성참정권을 통과시켰지만, 1959년 주민투표가 이를 부결시켰다. 영화에서 언급된 1959년 상황은 이때를 가리킨다. 하지만 1969년 베른에서 여성참정권을 주장하는 5천 명의 시위대가 호루라기를 불며 행진한 사건을 시작으로 논의가 다시 불붙었다. 크고 작은 집회와 시위가 조직되면서 영화에서 보듯 1971년 주민투표가 가결되어 연방법이 바뀌었다. 그러나 몇몇 주들은 지방자치를 내세워 여성참정권을 인정하지 않고 버텼는데, 1990년 아펜첼 주가 여성참정권을 인정함으로써 종결되었다.

영화는 마지막 영상들을 통해 1969년 호루라기 시위 장면과 이후 의회와 내각에 진출한 여성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지금 스위스 연방 내각의 절반이 여성이다. 불과 45년 만에 혁명적인 변화를 거둔 것이다. 이는 앞서서 '설치고 말하고 생각한' 여성들 덕분이다. 노라처럼 '거룩한 질서'를 깨고, '인형의 집'을 부수고 나가야 한다.

 제11회 여성인권영화제 폐막작으로 선정된 <거룩한 질서>는 '설치고 말하고 생각하는' 여성들의 힘을 보여준다.

제11회 여성인권영화제 폐막작으로 선정된 <거룩한 질서>는 '설치고 말하고 생각하는' 여성들의 힘을 보여준다. ⓒ Zodiac Pictures International



덧붙이는 글 글쓴이: 황진미 영화평론가

이 기사는 여성인권영화제 홈페이지 및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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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여성의전화는 폭력 없는 세상, 성평등한 사회를 위해 1983년 첫발을 내딛었습니다. 가정폭력, 성폭력, 성매매, 이주여성문제 등 여성에 대한 모든 폭력으로부터 여성인권을 보호하고 지원하는 활동을 합니다.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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