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란제리 소녀시대>

ⓒ KBS


"순수함은 가득 찬 소주잔의 투명함이고, 순진함은 비어 있는 소주잔의 투명함이래."

언젠가 친구가 순수함과 순진함의 차이에 대해 이런 말을 해 준 적이 있었다.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투명하다면 순수한 것이고, 많은 것을 모르고 있어서 투명하다면 그건 순진한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그 얘기를 들었을 때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내 앞에 순수함의 소주잔과 순진함의 소주잔이 있어서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어느 것을 택할 것인지. 오래 고민해 보았지만 끝내 답을 내리지는 못했다.

그 고민을 같은 시간대 월요일과 화요일에 방영되는 SBS 드라마 <사랑의 온도>와 KBS2 드라마 <란제리 소녀시대>를 보며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사랑의 온도> vs. <란제리 소녀시대>

 <사랑의 온도>

ⓒ SBS


사실 내 마음을 애초에 더 많이 가져간 것은 <사랑의 온도>였다.

공중파 방송이 아닌 tvN에서 10%에 가까운 시청률을 기록한 <또! 오해영>과 10%를 넘기기도 쉽지 않다는 요즘 시대에 최고 시청률 27.6%를 기록한 SBS 드라마 <낭만닥터 김사부>에서 맹활약했던 서현진이 택한 작품이었다. 믿고 볼 만한 작품일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두 드라마가 방송에서 처음 그려내는 키스 장면을 보고 더욱 굳어져 있었다.

<란제리 소녀시대>에서 낭만적인 첫 키스를 꿈꿀 나이인 10대 여주인공 정희(보나 분)는 생애 첫 키스를 인공호흡으로 하게 된다. 게다가 그 첫 키스의 상대는 첫사랑 손진(여회현 분)이 아닌 정희를 끊임없이 따라다니는 배동문(서영주 분)이다. 병원에서 의식을 차린 정희는 그 사실을 알고 동문에게 자신의 첫 키스를 물어내라며 화를 낸다. 정희가 자신의 첫 키스를 그렇게 빼앗겼다는 사실에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은 시청자들에게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떠올리게 한다. <란제리 소녀시대>가 그려내는 첫 키스 장면은 귀엽기는 하지만 사람들 마음속에 있는 연애 세포를 끌려 올려주는 장면은 아니다. 

<사랑의 온도>에서 30대를 1년 앞둔 여주인공 현수(서현진 분)에게 온정선(양세종 분)이 사랑인지 아닌지 확실히 모르겠지만 키스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자 현수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게 솔직히 말하면 여자들은 키스 안 해."

그렇지만 정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싫으면 피해요"라며 저돌적으로 키스를 시도한다. 그리고 결국 정선은 이를 받아들인다. 요즘 식대로 표현하자면 발바닥에 있는 연애 세포까지 끌어 올려내는 키스 장면이라고 할까. 이미 사랑에 지쳤고, 사랑이라는 것을 어느덧 잊고 있던 이들에게까지 <사랑의 온도>의 키스 장면은 설렘과 격렬한 사랑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같은 사랑, 다른 표현

 <란제리 소녀시대>

ⓒ KBS


<란제리 소녀시대>와 <사랑의 온도>는 사랑을 주제로 한 드라마다. 사랑을 주제로 한 드라마라면 당연히 보고 있는 시청자들의 잠자고 있는 연애 세포를 건드려 깨워주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란제리 소녀시대>는 분명 <사랑의 온도>보다 한 발 뒤처져 있어 보인다. 아직 사랑에 대한 경험이 부족한 10대 여주인공들의 사랑이 30대를 바라보는 여자 주인공의 사랑보다 사람들 마음속에 있는 연애 세포를 깨우기란 애초부터 힘든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란제리 소녀시대> 여자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사랑의 모습 역시 자꾸만 내 눈에 들어왔다. <란제리 소녀시대> 여주인공들이 보여주는 사랑의 모습은 그저 연애하고 싶다는 욕망만이 아닌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 놓은 사랑에 대한 열망을 깨우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란제리 소녀시대> 여주인공 정희와 혜주의 사랑에서 난 대체 무엇을 느꼈던 것일까. 정희는 손진(여회현 분)이 어떤 사람인지도 모른 채 한눈에 반해 버린다. 그리고 짝사랑하는 손진(여회현 분)이 별다른 의미 없이 행동하는 것에도 하나하나 다 의미를 부여한다. 자신에게 자주 벌을 주는 선생님들 얼굴이 다 손진으로 보여 계속 웃음이 나올 정도로 자기 삶 중심에 손진을 두고 생활하게 된다. 거기서 끝이 아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손진이 자신의 친구 박혜주(채서진 분)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도 손진에 대한 마음을 감추지 못한다. 그야말로 앞뒤 재지 않고 그저 손진이라는 인간에게 집중해 자신의 온 마음을 쏟아붓는다.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서 하는 사랑. 이미 사랑 이외에도 일, 인간관계 등 신경 써야 할 것이 많은 다 큰 어른이 할 수 있는 사랑일까?

또 다른 여주인공 혜주의 사랑은 정희처럼 온 마음을 쏟아붓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어른들의 시각으로는 정희처럼 자신을 잊은 채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것보다 혜주의 사랑이 오히려 더 위험해 보이기까지 한다. 혜주는 정희처럼 자신이 짝사랑하고 있는 대상을 다른 이들에게 드러내지 않는다. 혜주가 짝사랑하는 대상은 동네 약국에서 심부름꾼으로 일하는 주영춘(이종현 분)이다. 동네 어른들은 자신의 자식들에게 모두 영춘을 어디서 온 지도 모르는 건달이라며 말 섞지 말고 가까이하지 말라고 한다.

그러나 혜주는 그런 영춘을 멀리하지 않고 오히려 영춘의 어린 동생을 집에 불러 놀아준다. 그리고 영춘의 구멍 뚫린 양말을 보고 새 양말을 선물하며 영춘을 향한 자신의 마음을 살짝 드러내 보인다. 영춘과 가까이하지 말라는 정희의 말에 "아저씨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니야"라고 말하며 감싸준다. 모두가 손가락질하는 사람. 그런 사람을 선입견 없이 오로지 사람만 보고 자신의 마음을 주는 사랑. 그런 사랑을 30대를 바라보는 나이에 할 수 있을까?

 <사랑의 온도>

ⓒ SBS


<사랑의 온도>에서 정선이 대뜸 사귀자는 말에 현수와 정선이 나눈 대화를 생각해보면 그건 생각만큼 쉽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화가 너무 길어서 내용을 다소 압축했다)

"사귈래요?"
"미쳤어요?"
"미치지 않았는데. 사귀자고 하면 미친 거예요?"
"미친 거지 제정신이겠어요. 알지도 못하는 여자한테 사귀자고 그러는데.""뭘 알아야 되는데요? 나이 학력 이런 거요?"
"내가 나이만 좀 어렸으면 넘어갔을 텐데, 어떻게 이름도 모르는 여자한테 사귀자고 해요?"

정선은 현수의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사귀자고 얘기하지만 현수는 그런 정선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다. 그건 현수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 사회생활을 한 성인이라면 대부분 같은 반응을 보일 것이다. 드라마가 아닌 현실 세계였다면 진짜로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기에 <란제리 소녀시대>에게 준 마음을 쉽게 거두어들일 수 없었나 보다. 나이, 집안, 성장 배경 이런 것들이 아닌 오로지 사람만 보고 사랑할 수 있는 모습은 성숙한 어른들의 세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사랑의 모습은 아니니까. 그래서 오히려 한 사람만을 바라보는 더 열정적인 사랑을 하고 싶다는 마음을 불러일으켰으니까.

사랑은 아프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그런 사랑을 하라고 연애 세포를 계속해서 깨워줄 <사랑의 온도>와 사랑이 얼마나 아플지 모르고 무모하게 뛰어드는 모습에 오히려 더 사랑에 대한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란제리 소녀시대>. 당신은 쓰지만, 그 맛을 알기에 이미 가득 찬 소주잔의 투명함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쓴맛을 모르기에 소주보다도 더 독한 술을 담을 수도 있는 빈 소주잔의 투명함을 택할 것인가.

사랑의 온도 란제리 소녀시대 서현진 월화 드라마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세상을 넓게 보고 싶어 시민기자 활동 하고 있습니다. 영화와 여행 책 등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