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인권영화제가 문을 열고 10년이 넘게 지난 지금. 한국사회의 여성인권은 어디쯤 와 있을까요? 스크린에는 여성을 폭력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시각에서 연출한 영화가 범람합니다. 동영상 스트리밍 채널에서는 여성에 대한 폭력이 하나의 흥미로운 콘텐츠처럼 취급됩니다. 2017년,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생각보다 멀리 와있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제11회 여성인권영화제의 주제는 '지금, 당신의 속도로'입니다. 여성인권이 침해되는 현실은 바뀔 수 있다는 믿음을 향해 우리는 각자의 속도로 분명히 나아가고 있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치열하고 용기있는 도전을 9월 20일부터 24일까지 CGV아트하우스 압구정에서 만나보세요.

영화 <뼈아픈 진실> ㅣ 감독 카티아 맥과이어

1999년 콜로라도, 제시카의 어린 세 딸이 전 남편에 의해 유괴되어 살해당했다. 그 끔찍한 악몽 후에, 그녀는 거듭된 요청에도 경찰이 가정폭력으로 접근금지 명령을 받은 남편을 강력히 제지하지 않았음을 주장하며 경찰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다. 제시카는 딸들의 죽음이 헛되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 사건을 미국 대법원과 국제인권재판소에 제소하고, 가정폭력 피해자들의 권리를 강화하고자 노력한다.

한편, 이 비극적인 아픔과 싸워야만 했던 또 한 명의 생존자, 아들 제시와의 관계는 썩 순탄치 못하다. 9년에 걸쳐 촬영된 <뼈아픈 진실>은 한 여성의 정의와의 오랜 사투를 다룬 연대기이자, 사회가 가정폭력에 대처하는 모습, 그리고 가정폭력으로 인한 트라우마가 세대에 걸쳐 주는 아픔을 조명한 작품이다.

이 익숙한 이야기. 어느 하나 어색하지 않은 이 이야기. 이 유사함은 시공간과 문화, 인종과 계급을 뛰어넘는다. 여성의 말을 믿지 않는 것. 아무 일 없을 것이라 말하며 네가 좀 이상하다는 뉘앙스, 그런 조급함과 다그침이 그 남자뿐 아니라 모든 사람을 질리게 한 것이 아니냐는 은근한 질책. 영화 <뼈아픈 진실>(Home Truth)은 그에 관한 이야기이다. 오랜 시간에 걸쳐 반복되고 지속되는, 어디서 멈출 것인가를 냉소하게 하는 그 지루함. 그러나 점점 공포스러워지는 그 이야기.

여성이 경험하는 강간, 친밀한 관계에서의 폭력, 성희롱 등이 가시화되었다는 것이 "여성들의 이야기가 들리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듣는 자들이 그것을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또는 그것을 실제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는 캐롤 길리건(Carol Gilligan)의 일침은 왜 이런 일이 지속되고 있는지에 대한 분노스러운 현실에 대한 지적이다. 여성의 말을 경청하지 않는, 여성이 피해자일 때 여성을 몰아세우며 다그치는 비열한 역사처럼 이렇게 끈질기며 전세계적으로 맹위를 떨치는 일이 또 어디 있었던가?

 제11회 여성인권영화제 상영작 <뼈아픈 진실>

제11회 여성인권영화제 상영작 <뼈아픈 진실>ⓒ 여성인권영화제


그 여성이 가장 잘 안다

폭력의 피해자인 여성이 두려움에 휩싸여 있을 때, 곧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라 걱정하며 도움을 요청할 때, 그 말은 가장 신뢰되어야 한다. 가해자와 오랜 기간 함께 지냈던,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가장 잘 아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별다른 일이 아닌 것처럼 보일지라도, 곧 무슨 일이 일어나리라는 불길한 예고는 피해자가 가장 정확하게 인지할 수 있다. 피해자였지만 가해자를 사망에 이르게 함으로써 살인자로 호명되어 온 가정폭력 피해여성의 한결같은 진술들, 자신이 위험에 빠진 것 같다고 경찰에 신변보호를 요청하지만 결국 살해당하는 여성들이 사망하기 전 했던 진술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무슨 일이 곧 내게 닥칠 것이라는 그 불길한, 당장 증명해 보일 수 없지만 너무도 명료한 예감"이 그것이다.

여성의 말을 신뢰하지 않는 것은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관련이 있다. 믿기 어려운 사람들, 나쁜 소문들의 주인공, 만만하거나 우습기까지 한 사람들의 진술은 믿을 필요가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사회구성원으로서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자들로 인정받지 못한 자들에 관한 문제가 바로 여성에 대한 불신과 관련이 있다. 그러니 안타깝게도 여성이 신뢰받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단지 "그들이 여성이기 때문"이라는 것에 있다.

세 딸들의 어머니였던, 그러므로 그들의 안위에 대해 본능에 가까운 직감이 있던 제시카 레나한 곤잘레스(Jessica Lenahan-Gonzales)의 말이 경청되었더라면, 그 여성의 말을 믿기만 했더라면, 아니, 그도 저도 다 말고, 곤잘레스가 얻어낸 '접근금지명령'이 준수되기만 했더라도 이 일은 비극으로 치닫지 않을 수도 있었다. 위반했을 때 아무런 제재가 가해지지 않는 사법조치는 대체 무슨 용도로 마련된 것일까? 페미니스트 법학자 엘리자베스 슈나이더(Elizabeth Schneider)는 여성의 경험이 법에 반영되었다는 것이 여성의 경험이 청취될 것이라거나, 혹은 정확하게 이해되리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경고한다.

 제11회 여성인권영화제 상영작 <뼈아픈 진실>

제11회 여성인권영화제 상영작 <뼈아픈 진실>ⓒ 여성인권영화제


배제된 정의, 그리고 지속될 정의 

법은 있으되, 법이 제대로 집행되지 않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법 집행 관련자들이 이를 범죄로 여기지 않는 것과 관련이 있다. <뼈아픈 진실>에서처럼 '아이들이 다른 사람 아닌 아빠와 함께 있는데 뭐가 문제냐'는 경찰관의 태도와 인식은 자신의 배우자에 대해 법적 조치를 감행한 여성에 대한 힐난을 담고 있다. 한 시민이 '접근금지명령' 제도를 이용할 수는 있지만 경찰이 그 강제적 집행에 대해서까지 책임질 필요 없다는 미 대법원의 판결은 폭력 피해 여성들의 또렷한 현실이다. 폭력에 저항했던, 아이들과 생존하고 싶어 했던 그래서 법적 절차를 이용했던 그 모든 책임과 대가를 피해여성에게 미루고 있는 제도화된 반격이기 때문이다.

가정폭력을 범죄로 처리하기 싫어하는 데에도 이유는 있다. 경찰의 입장에서 가해자가 거의 처벌받지 않는 범죄에 대해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일도 의미 없게 느껴질 것이다. 피해자를 비난하는 수위가 높고 남성의 좌절과 분노를 감싸고 애석해하는 사회일수록 법은 무력하고 피해자가 감당해야 하는 고통의 무게는 가늠하기 어렵다.

 제11회 여성인권영화제 상영작 <뼈아픈 진실>

제11회 여성인권영화제 상영작 <뼈아픈 진실>ⓒ 여성인권영화제


운동의 역사가 길고 치열했던 만큼, 반격의 비열함과 치졸함도 더해져 왔다. 법의 단호함과 엄중함을 요구할수록 가정폭력 기소와 처벌을 더 어렵게 만드는 졸렬함도 속속 등장했기 때문이다. 곤잘레스 판결의 스칼리아 판사(Justice Antonion Scalia)는 2008년 가정폭력 판결(Giles vs. California)에서 가해자의 대질심문권(이미 살해당한 피해자의 증언은 들을 수 없음으로 가해자의 단독 증언이 중요시 됨)을 인정함으로써 피해자에게 상처를 입히느니 차라리 살해하는 것이 오히려 가해남성에게 더 이득이 되도록 했다. 피해자 의사를 존중한다는 명목으로 가해자가 처벌받기 원하는지를 피해자에게 추궁하는 '반의사 불벌죄', 여성을 살해 후 암매장한 범죄에 대한 단 3년의 선고, 아내를 궁지에 몰아넣어 결국 추락사에 이르게 한 남편에게 무죄를 선고한 우리 사회 역시 이 대열에 동참해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누군가가 폭력 피해를 당한다는 것, 그것도 일상적으로, 가장 안락하고 편안한 장소에서, 신뢰해야 할 누군가로부터 그 일을 겪는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한번 생각해 본다. 누구에게나 단 한번 뿐인 삶, 그 어떤 방법으로도 되돌릴 길 없는, 되찾을 수 없는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그 잔인하고 가혹한 일들이 어떤 누구의 인생에라도 감히 발을 디디거나 아주 작은 생채기라도 남기지 않도록 단호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 과연 논쟁을 불러일으킬만한 사안인가를 반문한다. 죽은 세 딸들을 가슴에 묻고, 그 스스로 생존자이면서 또 다른 생존자인 아들의 삶을 보듬어야 하는 그녀의 삶의 긴 여정이 국경을 넘어, 시간을 거슬러 우리에게 여전히 익숙하다. 이 익숙함에 날을 세우고, 서로의 손과 팔을 가장 길게 뻗어, 무시, 배제, 불공정, 차별과 부당함에 맞서는 일, 정의와 공정, 평등과 공존의 익숙함을 향해 나아가는 일, 우리는 그를 향해 나아가는 데 있어 망설이지도 멈추지도 않아야 한다.

 제11회 여성인권영화제 상영작 <뼈아픈 진실>

제11회 여성인권영화제 상영작 <뼈아픈 진실>ⓒ 여성인권영화제



덧붙이는 글 작성: 허민숙 여성학자
본 기사는 여성인권영화제 홈페이지 및 블로그에도 업로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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