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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 회고록>.
 <이회창 회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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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회고록을 펴낸 이회창 전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는 1988년부터 정치적으로 부각됐다. 6월항쟁 이듬해인 그때부터 1년간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을 겸직하면서 국민과 정치권에 강한 인상을 주었다.

그는 1981년부터 1986년까지 대법원판사로 근무했다. 대법원판사가 대법관으로 개칭된 뒤인 1988년부터 5년간은 대법관으로 근무했다. 대법관을 두 번 역임한 것이다. 두 번째 대법관 생활 중에 1년간 중앙선관위원장을 겸직했다가 정치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1989년에 강원도 동해시와 서울시 영등포을구에서 국회의원 재선거가 있었다. 이때 그는 사상 최초로 불법선거운동 단속반을 가동시켰을 뿐 아니라 사상 처음으로 후보자 전원을 고발했다.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선관위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검찰은 동해시 때와 달리 영등포을구 수사 때는 후보자 전원, 즉 피고발인 전원에게 무혐의나 기소유예처분(유죄 인정+불기소)을 내렸다. 그러자 이회창은 정치권과 검찰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중앙선관위원장을 사퇴했다. 사퇴 전에 그는 정치권을 상대로 선거법 개정도 제안하고 노태우 대통령에게 재선거 조기 실시도 제안한 적이 있다. 그는 전혀 색다른 중앙선관위원장이었다. 

1987년 12월 대통령선거 당시 노태우 후보는 임기 중의 중간평가에 따라 대통령직 퇴진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공약했다. 그 공약이 공식 취소된 시점은 1989년 6월 8일이고, 사실상 취소된 시점은 3월 21일이다. 3월 21일 노태우 대통령은 '중간평가 실시 여부를 재검토하겠다'는 담화를 통해 중간평가 공약을 사실상 취소했다. 

이로 인해 정치권이 격동하는 속에서 벌어진 게 동해시·영등포을구 재선거다. 이 때문에 각 정당의 당수들은 총력을 기울여 선거전에 뛰어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회창이라는 뜻밖의 인물이 '중앙선관위 당수'로서 선거전에 개입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회창은 자신의 정치 인생이 1993년 감사원장 취임에서부터 시작됐다고 말한다. <이회창 회고록 1>에서 그는 "이 정치 인생의 역정 또한 결국 감사원장직 수락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가 국민들과 정치권에 신선한 충격을 준 것은 동해시·영등포을구 재선거를 관리할 때인 중앙선관위원장 시절이었다. 6월항쟁 2년 뒤부터 정치적 주목을 받은 것이다.

이회창이 위원장으로 근무한 중앙선거관리위원회 건물. “민주주의의 꽃은 선거입니다”라는 전광판이 있는 건물이다. 이곳은 1996년부터는 선거연수원으로 쓰이고 있다. 종묘공원 동쪽의 종로4가 사거리에서 북쪽으로 130미터 거리에 있다.
 이회창이 위원장으로 근무한 중앙선거관리위원회 건물. “민주주의의 꽃은 선거입니다”라는 전광판이 있는 건물이다. 이곳은 1996년부터는 선거연수원으로 쓰이고 있다. 종묘공원 동쪽의 종로4가 사거리에서 북쪽으로 130미터 거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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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의 정치 인생은 6월항쟁과 깊은 관련을 갖고 있다. 6월항쟁 이후에 정치적 주목을 받은 점만 갖고 이렇게 말하는 것은 아니다. 6월항쟁 이후의 '87년 체제'에서 보수 진영이 발굴해낸 실질적인 최초의 대통령 후보였다는 점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87년 체제 하에서 보수진영이 대선에 내보낸 후보는 노태우·김영삼·이회창·이명박·박근혜·홍준표다. 이회창은 순서상으로는 세 번째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첫 번째다. 노태우·김영삼은 1987년보다 훨씬 이전에 이미 대선 후보로 성장했다. 이걸 감안하면, 6월항쟁 이후에 보수가 찾아낸 최초의 후보는 이회창인 셈이 된다. 87년 체제 하에서 보수가 잉태한 실질적인 첫아들인 것이다.

그런데 이회창은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보수 진영의 지지를 받았다. 1997년에는 38.7%를 득표해 김대중 후보(40.3%)에 이어 2위를 기록했고, 2002년에는 46.6%를 득표해 노무현 후보(48.9%)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 두 번 모두 근소한 표차로 낙선했다. 1위와의 표차는 별로 없었다.

그에 대한 보수진영의 신망은 무소속으로 출마한 2007년 대선에서도 나타났다. 보수 정당의 공천을 받지 못했는데도 보수 성향 유권자들이 적지 않은 지지를 보내주었다. 그래서 독자적 기반이 없는데도 15.1%로 3위를 기록했다. 1992년 대선에서 현대그룹의 지원을 받은 통일국민당 정주영 후보가 16.3%로 3위를 기록하고 1997년 대선에서 국민신당 이인제 후보가 19.2%로 3위를 기록한 걸 감안하면, 이회창이 무소속으로 15.1%와 3위를 기록한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이회창은 자금력은 말할 것도 없고 조직력도 취약했다. 타고난 성격 때문에도 그렇게 됐지만, 직업도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법정 외에서는 가급적 사람을 만나지 않는 게 바람직한 법관이란 직업 때문에 더욱 더 그렇게 됐다. 위의 회고록에서 그는 "나는 법관이 되면서 결심했다. 가급적 사교의 관계나 자리에 나가는 것을 피하고 선물도 받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다"고 말했다.

돈도 없고 사람도 없어 조직을 이끌기 쉽지 않은 인물이 두 번이나 보수 정당의 대권주자가 된 것은, 그가 보수정당을 끌어당겨서가 아니라 보수정당이 거의 전적으로 그를 끌어당긴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그가 보수진영한테 꼭 필요한 정치인이었던 것이다.

87년 체제 하에서 한국인들은 민주화와 더불어 법치주의라는 목표를 추구했다. 한국인들은 박정희·전두환 정권이 민주주의를 짓밟은 것뿐만 아니라 법치주의를 경시한 것에 대해서도 환멸을 느꼈다. 두 정권 하에서는 법률이 아닌 정권 핵심부의 의중이 국정을 이끌어갔다. 그래서 6월항쟁 이후에는 진보·보수를 가리지 않고 '법대로'라는 가치에 대한 국민적 열망이 드높았다.

87년 체제 하에서 헌법재판소의 위상이 높아진 것도 그 때문이다. 예전에도 헌법재판소는 있었다. 1948년 헌법에서는 헌법위원회, 1960년 헌법에서는 헌법재판소, 1962년 헌법에서는 탄핵심판위원회, 1972년 및 1980년 헌법에서는 헌법위원회가 있었다. 하지만, 몇 건의 위헌결정을 내는 데 그치고 실질적 역할을 하지는 못했다. 1960년 헌법의 헌법재판소는 아예 설치되지도 않았고, 1972년 및 1980년의 헌법위원회는 한 건의 위헌법률심사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87년 체제 하의 헌법재판소는 국민대표기관인 국회가 만든 법률에 대해 위헌결정도 내리고, 국민이 뽑은 대통령에 대해서도 두 차례나 탄핵심판을 했다. 군대나 경찰처럼 군사력과 정보력을 갖춘 곳도 아니고, 국회나 대통령처럼 국민대표성을 갖춘 곳도 아니고, 정당들처럼 방대한 조직을 갖춘 곳도 아니고, 대법원처럼 전국 사법기관을 관장하는 곳도 아닌 헌법재판소에서 그런 막강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전적으로 국민들의 지지 덕분이다. 법대로 해야 한다는 국민들의 열망이 헌법재판소를 강하게 만든 것이다. 

검찰이 노태우 정권 이후로 위상이 높아지면서 '검찰을 약화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나올 정도로 강하게 된 것도 이런 분위기와 무관치 않다. 법치주의를 강조하는 시대 분위기가, 법을 집행하는 검찰의 위상을 강화시켜준 측면이 컸다. 이회창이 중앙선관위를 이끌고 노태우 대통령과 야당 총재들을 견제할 수 있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회창이 87년 체제 하에서 보수 진영의 신망을 얻은 요인 중 하나는 법치주의에 대한 그 같은 열망 속에서 찾을 수 있다. 그가 그런 시대적 열망에 상당부분 부합됐던 것이다.

중앙선관위원장 시절에 그는 '법대로'라는 행보를 통해 '대쪽'이란 인상을 강하게 남겼다. 김영삼 정권에서 감사원장을 맡은 1993년 2월부터 12월까지는 3대 성역으로 불리던 청와대·군대·국가안전기획부에 대해서까지 감사의 칼날을 들이댔다.

김영삼 정부 출범 1개월 뒤인 1993년 3월 29일 감사반을 파견해 청와대의 예산 및 업무를 감사했을 뿐 아니라, 전투력 증강 사업인 율곡 사업에 대한 감사를 통해 감사원의 손길을 군대에까지 뻗쳤다. 여기에 더해 안기부에 대한 감사도 빠뜨리지 않았다. 회고록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당시만 해도 안기부는 청와대 및 군과 더불어 3대 성역 중 하나였다. 감사원이 청와대와 군의 성역은 허물었지만, 안기부는 참으로 어려운 상대였다."

그런데 그 어렵다는 안기부 감사도 그는 해냈다. 전두환 정권이 북한의 물 공격에 대응한다며 국민 성금으로 만든 평화의댐 사업과 관련된 안기부의 행적을 감사한다면서 감사반을 안기부에까지 파견했다. 세상이 깜짝 놀랄 만한 일이었다. 

이회창의 '법대로' 행보는 국무총리로 활동한 1993년 12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도 계속 이어졌다. 총리로 재직했다고 하지 않고 활동했다고 한 것은, 이전의 방탄 총리나 얼굴마담 총리들과 확연히 다른 적극적 행보를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헌법에서 규정한 총리의 권한을 문자 그대로 행사했다. 스스로 책임총리의 위상을 차지한 것이다. 대통령에 대한 통보도 없이 행정 각부에 지시를 내리는가 하면, 자기를 거치지 않고 대통령에게 직보하면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대통령의 담화와 뉘앙스가 살짝 다른 담화를 발표한 적도 있다.

그러다가 김영삼 대통령이 총리가 주재하는 남북고위전략회의를 무시하고 총리를 배제한 통일안보정책조정회의를 설치하자, 이회창은 '법대로' 원칙을 무기로 대통령과도 싸웠다. 1994년 4월 21일 그는 "통일안보정책조정회의에 회부·조정된 안건은 관계 장관이 사전에 총리의 승인을 받아 시행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총리를 배제한 통일안보정책조정회의를 설치한 대통령의 지시에 정면으로 대항한 것이다. 다음 날 그는 총리를 사퇴했다. 

이렇게 누구를 상대로든 '법대로'를 외치는 이회창의 모습은 국민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그것은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재상의 이미지였다. 진보·보수를 막론하고 누구나 다 좋아하는 이런 이미지는 법관 출신인 그가 두 번이나 보수진영의 공천을 받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1997년 대선 후보들. 충북 청주시 문의면의 청남대(예전의 대통령 별장)에서 찍은 사진.
 1997년 대선 후보들. 충북 청주시 문의면의 청남대(예전의 대통령 별장)에서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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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 진영이 이회창을 끔찍이 아낀 데는 또 다른 요인이 있다. 그것은 87년 체제의 성격과 관련된 것이다. 이 체제에서 법치주의 이상으로 강조된 게 있다. 바로 민주화다. 정치적·경제적 민주화가 꾸준히 강조되고 또 지속적으로 실천됐다.

그런데 법치주의가 정적인 데 반해, 민주화는 동적이다. 민주화 과정에서는 무언가가 끊임없이 바뀐다. 국민들의 요구가 지속적으로 나오고, 제도와 법률도 계속해서 바뀐다. 그래서 매우 역동적이다. 이런 상황은 중도 성향 국민들이나 진보 진영은 좋아하지만 보수 진영은 싫어한다. 그래서 법치주의라는 목표에서는 진보·보수가 따로 없었지만, 민주화라는 목표에서는 진보·보수가 당연히 갈렸다.

1960년 4월항쟁은 이듬해 벌어진 5·16 쿠데타라는 반동적 사건에 의해 사실상 원위치됐지만, 1987년 6월항쟁 뒤에는 그런 반동이 나타나지 않았다. 보수정당이 대선에서 승리한 일은 많았어도, 6월항쟁의 정신인 민주화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일은 나타나기 힘들었다. 그래서 6월항쟁 이후의 보수정권 하에서도 한국은 민주화를 향해 끊임없이 역동성을 보일 수 있었다.

이런 점은 보수 진영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끊임없는 민주화로 인해, 그들의 곳간에 있던 경제력과 명예와 지위가 계속해서 새어나갔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들이 더욱 더 안정을 희구하도록 만들었다. 안정은 민주화로 인한 사회변화로부터 그들을 지켜줄 수 있는 보루로 인식됐다.

이회창은 보수 진영의 그 같은 욕구에도 부합됐다. 기존의 가치관과 법률을 수호하는 그의 집념과 태도는 안정 희구적인 보수 진영에 믿음을 주었다. 그는 국민 대중의 가슴 속에서 추구되는 법률보다는 국회에서 이미 통과된 법률에 대해서만 관심을 보였다. 두 법률 사이의 간극을 좁히기보다는 후자를 확고히 유지하는 데 훨씬 더 치중했다. 민주화보다는 안정을 더 중시했던 것이다. 그래서 보수 진영의 마음을 샀다.

그가 민주화보다는 안정을 훨씬 더 중시했다는 점은 6월항쟁 이후의 민주화에 대한 거부감에서도 드러난다. 회고록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른바 민주화 시대 특히 1987년의 대통령 직선제 헌법개정 이후 본격적으로 진행된 민주화 과정에서는 선거 및 정치 참여에 대한 욕구가 분출되면서 각계각층의 요구에 영합하는 포퓰리즘의 정치가 성행하게 되었고, 진정한 민주화와 법치주의의 기본 조건인 정직과 신뢰, 법의 원칙과 같은 가치는 경시되고 외면당했던 것이다."

보수 진영이 보기에 이회창은 기존의 제도와 법률을 지켜주고, 안정을 명분으로 민주화를 견제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시대 흐름으로 보아 민주화를 완전히 거역할 수는 없겠지만 어느 정도 견제해서 보수의 기득권을 지켜줄 수 있는 인물로 비쳐지기 쉬웠다.

이랬기 때문에 돈도  조직도 없는 그가 두 번이나 보수의 '사랑'을 받고 김대중·노무현의 경쟁자로 나설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우수한 두뇌와 끊임없는 노력이 그를 그렇게 만든 측면도 있지만, '법치+안정'의 가치로 기득권을 지키고자 하는 보수 진영의 셈법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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