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응답하라> 시리즈는 드라마계에 새로운 시대극의 조류를 형성하게 했다. 1988, 1984, 1994란 특정 연도를 배경으로 그 시대를 살아간 청춘들의 이야기를 그려, 장년 세대에게는 추억을, 젊은 세대에게는 '열광'을 불러왔다. 그 이전에 시대극이라고 하면 '사극'이거나, '일제 시대' 혹은 '6.25'를 배경으로 한 협소한 범주에 머물러 있었으나 <응답하라> 시리즈는 이를 확장했다. 물론 <응답하라> 시리즈가 처음은 아니었다. < TV소설>이라는 이름 아래 KBS에서 꾸준히 방영되었던 현대사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들이 있었다. 하지만 <응답하라>는 중장년층의 향수에 주로 기댄 이들 아침 드라마와 달리, 전 연령대로부터 적극적 호응을 얻어 '시대극'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란제리 소녀시대> 포스터

<란제리 소녀시대> 포스터 ⓒ KBS2


<응답하라>의 70년대 확장판 

그리고 11일 방영된 KBS2의 <란제리 소녀시대>는 <응답하라> 시리즈의 70년대 버전처럼 찾아왔다. 70년대 대구의 시대적, 사회적 배경을 한껏 흐드러지게 풀어내며 드라마는 시청자들을 그때 그 시절로 이끈다.

<응답하라 1988>의 쌍문동 골목길의 정서를 두고 동시대를 살았던 친구와 갑론을박한 적이 있다. 동시대를 살았지만 전혀 다른 곳에서 자란 두 사람은 드라마 속 1988년이란 배경을 그려낸 제작진에 대해 호와 불호로 나뉘었다. 그건 아마도 같은 서울 하늘을 이고 살았어도, 가스레인지와 석유 풍로로 대변되는 삶의 다른 층위가 가져온 다른 반응일 것이다. 언젠가 2017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가 만들어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강남 타워팰리스와 변두리 반지하방의 경험이란 한 시대, 하나의 지역적 추억으로 뭉뚱그려 그려 낼 수 없는 차별적 층위를 가진다. 그런 시대적 다른 경험의 층위가 내는 오류를 방지하기 위해 시대를 내세운 드라마들은 그 시대를 산 사람이라면 공감할 수밖에 없는 '문화적 코드'에 집중한다. 새로 방영된 <란제리 소녀시대> 역시 마찬가지다.

공교롭게도 이 글을 쓰는 이와 같은 이름(정희)을 가진 주인공은 여학생도 '교련'을 배워야 하던 그 시절의 여고생이다. 조남주 작가의 < 82년생 김지영>을 통해 이제 하나의 시대적 코드가 된 82년 김지영 세대, 차별을 당연하게 당하며 자랐던 그 시절에서 한 발 더 과거로 드라마는 발을 담근다. 같은 반의 공부도 잘 하고 심지어 시도 빼어나게 쓰던 친구가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여상'을 가던 시절, 군복을 입지는 않았어도 교련 선생님이든 수학 선생님이든 이제는 '성희롱'이 될 수도 있는 벌을 주는 게 당연하게 여겨지던 그 시절을 <란제리 소녀시대> 충실하게 복기해낸다. <란제리 소녀시대>가 방영되고 드라마 게시판에 올라온 댓글처럼 '여자도 교련을 했어?'라는 그 신기한 시절이었다.

70년대만 해도 섬유 산업의 중심지였던 대구. 당시에는 흔했던 가내 수공업 수준의 메리야스 공장과 체벌이 시스템처럼 갖춰져 횡행했던 교실을 드라마는 충실하게 구현한다. 그리고 제목의 란제리 답게, 하얀 백런닝과 끈 달린 런닝으로 대별되는 당시 소녀들의 '속옷 로망'을 드라마는 놓치지 않고 그려내며 시대의 세밀화를 완성해 간다. 나또한 무심하게 드라마를 보던 중 그 '끈달린 런닝'에서 움찔하고야 말았다. 여고 시절, 교복 사이로 드러난 그 두 줄의 끈은 정말로 당시 여학생들에게는 '여성성'의 로망처럼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드라마 속 '사물'들은 아마도 그 시절을 살아온 그 누군가의 추억을 자극하며 이 드라마 앞으로 끌어들이게 될 것이다. <응답하라>가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등장하는 주인공들, 전교 회장 교회 오빠 손진(여회현 분)과 그런 오빠를 흠모하게 되는 여고생 정희(보나 분), 그리고 그런 정희에게 미팅 자리에서 첫 눈에 반해버린 순정파 동문(서정주 분)에, 다크호스처럼 등장한 서울에서 온 혜주(채서진 분), 그리고 그 시절 있음직한 동네 총각 영춘(이종현 분)까지. 70년대 시대극의 전형적 요소를 빠짐없이 채워넣었다.

 드라마 <란제리 소녀시대>

드라마 <란제리 소녀시대> ⓒ KBS2


추억은 여전히 힘이 세다?!

이런 주인공들의 면면은 이미 아침 드라마 < TV 소설>을 통해 되풀이 반복 학습되다시피한 70년대 인물의 전형적 갈등 구조이다. <란제리 소녀시대> 역시 다르지 않다. 첫 회, 교회 오빠 손진과 문학의 밤에서 우연히 만나 그 첫사랑의 그리움을 견디지 못하고 집에서 먼 도서관까지 손진을 보러 가는 해프닝 과정은 <응답하라> 시리즈는 물론 시대극에서는 '클리셰'라 해도 과언이 아닌 내용이다.

하지만 뻔한 클리셰의 중복이라 해도 아침 드라마 <TV 소설>이 계속 되풀이 될 수 있듯이, 모처럼 미니 시리즈로 찾아온 70년대의 복기는 70년대스러운 화면과, 그보다 더 70년대의 추억을 끌어오는 음악이란 양수겸장의 장치로 인해 추억을 진하게 자극한다. '맞춤 양복'처럼 잘빠진 70년대의 추억은 신기한(그래서 새로운)  콘텐츠로 젊은 세대를 솔깃하게 만든다. 적어도 첫 방송의 <란제리 소녀시대>는 추억의 힘으로 시청자들의 관심을 끄는 데는 성공한 듯보인다. 

과연 79년 여름 대구라는 구체적 시간을 배경으로 한 이 드라마가 그저 '추억'의 복기만으로 끝날까? 10.26를 코 앞에 둔 79년의 여름의 끝에서 어떤 성장통을 보여줄 것인지, 8부작이라는 실험적 형식을 통해 그 주제 의식을 어떻게 풀어낼 것인지. 비록 시청률면에서는 미미했지만 신선한 시도였던 <완벽한 아내>의 홍석구 연출과 윤경아 작가 등 제작진의 그 여정이 궁금하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이정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5252-jh.tistory.com)와 <미디어스>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합니다.
란제리 소녀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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