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소 까칠하게 공연을 보고, 이야기 합니다. 때로 신랄하게 '깔'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좋은, 잘 만든 작품에게는 누구보다 따뜻하지 않을까요? 따뜻하게 대할 수 있는 작품들이 더 많이 올라오길 바라봅니다. [편집자말]
 동명의 영화를 원작으로 삼은 뮤지컬 <서편제>가 서울 광림아트센터 BBCH홀에서 개막했다. 판소리를 주제로 한 이 작품은 현대적 음악과 전통적 음악을 조화롭게 한 무대에 모은 수작으로 꼽힌다. 지난 8월 31일 개막하여 오는 11월 5일까지 상연된다.

ⓒ 로네뜨


창작 뮤지컬의 필요성은 진부할 만큼 많이 거론됐다. 가장 큰 이유로는 아무리 번역이 잘 된다 한들, 다른 문화가 필연적으로 가진 '번역 불가능성'이 있다. 하다못해 작은 농담일 지라도 그 문화적 분위기가 담겨져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농담이 관객들에게 수용될 수 있는지의 여부도 문화적 차이에 달려 있다. 아무리 능력이 좋은 번역가라 할지라도 다른 문화권의 이야기를 완전히 번역해내는 일은 어렵다.

특히나 뮤지컬은 그 멜로디에 맞추어 번역해야 한다. 애초에 정해진 리듬과 멜로디에 강조될 가사와 말장난, 라임 등이 있는 상황에서 그 가사를 제대로 살려내거나, 그 이상의 효과를 거두는 것은 어렵다. 또한, 단순히 직역할지 아니면 번역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창조해낼지의 선택도 문제가 된다. 특히 후자의 경우는 그 원작의 의미가 훼손되는지, 변경된다면 그 변화를 통해 더 나은 작품을 만들 수 있는지 등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창작'에 대한 목마름이 있는 이 시점에서, 2010년 처음 초연을 했던 <서편제>가 다시 돌아왔다. 2010년, 2012년, 2014년, 2017년을 걸쳐 꾸준히 올라오고 있는 이 작품은 이제 대표 창작 뮤지컬이라는 소리를 듣기에 손색이 없다. 한번 성황리에 막을 내린 공연도 재연을 장담할 수 없는 한국 뮤지컬계에서, 그 역사도 짧은 한국 뮤지컬계에서, <서편제>는 창작 뮤지컬의 고전이 될 가능성이 충분해 보인다. 아니, 어쩌면 이미 됐을지도 모르겠다.

창작 뮤지컬 <서편제>가 거둔 성과

 뮤지컬 <서편제>에서 '동호' 역에 트리플 캐스팅된 강필석 배우가 열연하는 모습. <서편제>는 올해라 사연을 맞은 작품으로, 동명 원작의 소설과 영화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전통적인 소리와 현대적인 뮤지컬 음악의 문법이 함께 어우러진 극으로, 지난 8월 30일 개막하여 오는 11월 5일까지 서울 광림아트센터 BBCH홀에서 상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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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편제>는 훌륭한 창작 뮤지컬이다. 확실하다. '한국적인 것', 어떤 번역될 수 없는 한국의 문화적인 특성들을 잘 담아냈다. 한국의 문화를 가장 잘 아는 곳은 한국이고, 한국의 문화를 가장 잘 표현해낼 수 있는 언어는 한국어이다. 다른 말로 말하자면, 한국에서 한국어로 가장 잘 풀어낼 수 있는 이야기는 한국의 이야기다. (이는 어떤 국가나 인종, 민족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철저히 문화적인 이야기다. 그 둘은 비슷해 보여도 분명한 간극이 있다) <서편제>는 '서양 장르'인 뮤지컬에, 한국의 이야기를 한국적인 형식을 섞어, 한국어로 정면 돌진했다. 그리고 성공적이었다.

뮤지컬 <서편제>는 한국적 '소리'라는 매개를 통해 결국 소리를 넘어선 인간의 삶을 이야기한다. 그것은 단지 '한국인의 삶'에 국한되지 않는다. <서편제>는 인간의 보편적인 것들을 꽤 이야기하고 있다. 이는 유봉, 죽은 동호 모, 송화, 동호라는 네 명으로 이뤄진 가족의 은유로 표현된다. 예를 들면, 극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적 이야기가 그러하다. 다분히 한국적인 이야기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서양의 신화를 토대로 한 개념을 통해 해석해낼 수 있는 점도 꽤 재미있는 관람 포인트 중 하나다. 유봉은 가부장이며, 구세대를 상징하한다. 동호는 이에 맞서 투쟁한다. 동호는 서양 음악에 관심을 가지고, 유봉은 동호가 그 자신의 가부장으로서, 그 구세대가 가진 권력을 위협할 때 더욱 역정을 낸다. 아버지와 아들의 대결로 보이는 세대 갈등, 혹은 오이디푸스적 갈등은 극 전체를 이끌어가는 갈등이기도 하다.

하지만 유봉과 동호의 갈등은 단순한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갈등을 넘어선, 운명과 인간의 갈등으로 읽힐 수도 있다. 유봉은 한 인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가부장제의 상징이요, 많은 '아버지'라는 존재가 지니는 의미와 맞닿는다. 어쩌면 일종의 '국가'를 상징할 수도 있다. (실제로 유봉은 소리를 할 때는 자신이 왕이 되는 것 같다고 노래한다. 소리는 그에게 있어선, 또 하나의 권력이다) 가부장제와 국가는 많은 부분 한 인간에게 본인이 선택할 수 없는 어떤 운명 같은 것을 형성한다. 동호는 그로부터 벗어나고자 끊임없이 투쟁한다. 운명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이 또한 오이디푸스라는 고전과 맞닿는 부분이 있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운명, 계속 순환되는 것은 무대에 놓인 원형의 회전무대를 통해 그 의미가 강조된다. 그들이 가는 길이 결국 돌고 돌았던 것처럼 말이다. '인간은 운명을 벗어날 수 있는가?'라는 꽤나 심오한 질문에 대하여, <서편제>는 그 나름의 답안을 내놓고 있는 셈이다.

또한 극 중 아마 가장 많이 등장할 단어인 '소리'는 말 그대로의 '소리'를 넘어서는 은유다. 포괄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소리는 집이기도 하며 삶이기도 하다. <서편제>의 넘버 중 가장 유명한 곡일 '살다보면'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살다보면'은 "그저 살다보면, 살아진다"라고 이야기한다. 이 가사의 '살아진다'는 '사라진다'와 같은 소리를 낸다. 이 때 같은 소리의 가사인 '그저 살다보면, 사라진다'는 또한 이 뮤지컬의 이야기와 이어진다. <서편제>의 서사에서는 '상실'을 빼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인물들의 역사는 각각이 나름 상실의 역사이다. 그 상실 속에서 인물들은 시간을 얻는다. 그토록 많은 깨달음을 줬던, 시간을.

어쩔 수 없이 느껴지는 국가주의 그리고 순혈주의

 동명의 영화를 원작으로 삼은 뮤지컬 <서편제>가 서울 광림아트센터 BBCH홀에서 개막했다. 판소리를 주제로 한 이 작품은 현대적 음악과 전통적 음악을 조화롭게 한 무대에 모은 수작으로 꼽힌다. 지난 8월 31일 개막하여 오는 11월 5일까지 상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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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창작 뮤지컬이 자주 받는 비판 중 가장 치명적인 내용은 아무래도 '국뽕(국가+필로폰)'이다는 말이 있겠다. 사실 뮤지컬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었다. 많은 영화와 드라마들이 실제 이런 비판을 받는다. 그에 비해 <서편제>는 불편할 정도로 노골적으로 이를 드러내는 작품은 아니다. 국가주의, 민족주의적 정서 보다는 인간 보편의 삶을 이야기 한다. 물론 결국 동호가 '소리'로 돌아오는 것이 결과적으로 조금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소리'가 단순히 '한국인이어서'가 아니라 인간이어서 가지고 있는 어린 시절의 기억, 추억, 굉장히 커다란 시간이었다는 점을 봤을 때 꽤 일리가 있다.

다만 구체적으로 살펴보았을 때, 그리고 작품이 지닌 은유성을 보았을 때, <서편제>에는 분명 '국뽕'으로 읽힐 부분들이 존재한다는 건 아쉽다. 사실 <서편제>는 오히려 한국의 '잡탕'(극 중 유봉의 표현)적인 성격을 적극 긍정하고, 이 문화가 어떤 방향으로 앞으로 나아가야 할지를 제시할 수 있는 작품인데도 말이다.

유봉-송화-동호의 가족을 보라. 그들은 전통적인 가족의 형태가 아니다. 전통적인 가족이었다면 동호와 송화는 배 같은 어머니에게서 난, 성이 같은 남매여야 한다. 또한 오이디푸스라는 거대한 메타포로 읽힐 수도 있지만, 동시에 그로 포괄되지 않는 어떤 특수성을 가진다. 예를 들어 유봉과 동호가 그러하다. 전통적으로 오이디푸스라는 남성 서사의 메타포는, 아들이 아버지를 살해함으로써 새로운 아버지(질서, 국가, 규칙, 권력 등)가 되고, 그것은 지속되어야 한다. 하지만 유봉은 온전히 오이디푸스적 단계를 통해 아버지가 되지 않았다. 그는 스승에게 쫓겨난 자다. 동호는 아버지를 꺾는 대신 도망쳤다. 그들은 순수한 전통적인, 전형적인 형태가 아니다. 이는 사실 한국이라는 문화적, 민족적 특수성과 맞닿는다.

우리는 교과서에서부터 전통적으로 '한 민족'을 강조하고 그 나름의 순수성을 설파한다. 하지만 수많은 침략 혹은 이주의 역사를 봤을 때 과연 한국이 '순수하다'고 할 수 있는가. 왜 그토록 순수성에 집착하는가? 그 속에는 순수성과 순수하지 못함이라는 이분법이 존재하고, 그 중우월한 것은 순수한 것이라는 전제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 순수성에 대한 집착, 순수와 잡탕의 우월성을 전복시킬 수는 없을까? '잡탕이면 왜, 뭐가 어때서?'라는 질문으로 전복이 될 수는 없는 것인가? 순수성은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제국주의적 혹은 전체주의적 논리였다. 그 논리를 차용하면서 '우리의 우월성'을 이야기해야 하는지 의문이다.

한국 문화 보편에 깔려 있는 당연한 전제들에 질문을 던져야 한다. 당연한 전제는, 한편으론 상상력을 제한한다. 그 의미를 좁게 만들고, 풍부할 수 있는 것들과 다양하게 해석될 여지가 있는 것들은 하나의 정해진 '정답', 즉, '올바른' '우월한' 답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그 경계가 허물어질 때, 무언가 탄생한다. 마치 뮤지컬 <서편제>의 전체를 관통하는, 오이디푸스적이면서 전통적이지만 온전히 그것만으로는 해석되지 않는 이 가족처럼.

'인간은 운명을 벗어날 수 있는가?'에 대한 답변도 그러하다. 사실 <서편제>에서 표면적으로 읽히는 답변은 '아니다'이다. 동호는 결국 돌아왔고, 송화는 떠나지 못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돌아온 동호는 세속적으로 실패를 거두기도 했지만, 결국 레코드를 차리는 등 성공했고, 스프링보이즈는 재결합 공연도 한다. 성공적인 인생이다. 운명에 사로잡힌 인물들임에도 둘은 재회하며 행복해 한다. 그들은 운명을 온전히 이기지 못했지만, 운명도 온전히 그들을 무릎 꿇리지는 않았다. <서편제>가 가진 결말이 다분히 열린 결말이고, 다양하게 읽힐 수 있다. 하지만 오로지 '한국인이기에' 돌아오는 동호로 제한하면, 이는 '인간은 운명을 받아들이고 그에 굴복할 때 가장 행복하다' 더 나아가, '운명을 이기려 하지 말고, 주어진 대로 살아라'라는 비관적인 닫힌 결말로 이어진다. 비관적인 결말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작품의 풍부함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작품의 풍부함을 감소시키는 데에는 공식 자료들도 한 몫 했다. 보도자료 등을 뿌릴 때, 혹은 공식 홍보자료의 문구들을 보자. 예를 들면 동호에 대한 공식 페이지의 설명은 "판소리를 찾아 다시 돌아오는 한국인의 잃어버린 정체성"이다. 이 뮤지컬은 결국 '한국적인 것'에만 그치는가. 작품성을 떠나서 이는 상품성으로도 상당한 손해다. 이 뮤지컬은 충분히 해외에도 수용될 수 있는 이야기이다. 그 정서는 비록 완전하게 번역하기 어렵겠지만, 이 작품이 이야기하는 보편성이 분명 있다. 그러나 '한국적인 것'으로만 국한시키면 그 가능성이 줄어든다.

<서편제>가 '순수한' '우리의 것'을 설파하기엔, 일단 장르부터 '우리'의 장르가 아니다. 뮤지컬을 택했다. 판소리에 '서양적' 멜로디가 덧붙여진다. 심지어 마지막에 소리를 하는 송화 곁에서 북을 치는 동호는 양복을 입고 있다. 이 뮤지컬은 그야 말로 탈경계적이다. 유봉의 표현대로라면 '잡탕적'이다. 이는 단점이 아니라 이 뮤지컬이 지닌 가장 커다란 장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극 중에 묻어나는 순수성에 대한 집착은, 극의 형식과 메시지를 어긋나게 해 혼란을 남긴다.

윤리적으로도, 작품적으로도 아쉬운 묘사

 동명의 영화를 원작으로 삼은 뮤지컬 <서편제>가 서울 광림아트센터 BBCH홀에서 개막했다. 판소리를 주제로 한 이 작품은 현대적 음악과 전통적 음악을 조화롭게 한 무대에 모은 수작으로 꼽힌다. 지난 8월 31일 개막하여 오는 11월 5일까지 상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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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봉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극 중에서 아버지이다. 아버지는 흔히 국가, 권력, 힘, 규칙, 질서 등의 메타포로 인용된다. 그리고 그것들은, 개개인들에게 폭력과 그에 대한 상흔, 그리고 트라우마를 남긴다. 그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사실 유봉이 행한, 송화의 눈을 멀게 하는 것은 가장 충격적이고 강력한 폭력이지만, 그 외에도 유봉이 송화와 동호에게 저지른 폭력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유봉은 자식들을 자신이 못다 이룬 꿈을 대신 이뤄줄 도구로 본다. 다양한 방법으로 폭력을 저지르고 '언젠간 시간이 지나면 알게다'라면서 스스로 옹호하더니, 그 고통에 몸부림을 치면 안으로 삼키라고 한다.

물론 이 뮤지컬은 그런 아버지에도 '인간적인 면모'가 있다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결국 그것이 '사랑'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은 걸까. 결국 유봉은 예술적 재능이 없어서 자식들을 통해 꿈을 키우려고 하는 인간적인 연민이 드는 아버지로, 아이들을 사랑해서 그에 대해 미안함을 어느 정도 가지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행동을 지속하는 인물이 됐다. 하지만 유봉이 행한 것은 다시 말하지만, 폭력이다.

유봉에 대한 옹호는 윤리적으로도 아쉽지만, 무엇보다 그 의미를 축소시키기에 또한 아쉬운 부분이다. 예를 들면 유봉의 행동이 일련의 '사랑'처럼 읽히며, 그가 행한 폭력은 의미가 지워진다. 일종의, 사랑하기에 있을 수 있는 일이 되는 것이다.

동호가 아버지를 꺾지 못하고 도망쳤다는 점은 열린 해석으로 남겨져야 할 부분이다. 그리고 그 열린 해석의 가짓수는 필자가 제시하는 것 외에도 더 다양할 것이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가정 폭력, 아동 학대에 대한 이야기도 충분히 다뤄질 수 있는 주제다. 다른 한편으로는, 전통적인 과정의 '아버지'가 되지 않은 인물들이기에, 새로운 인간상을 제시할 수도 있다. 가부장제가 문제적인 구조라는 점에서, <서편제>는 지금보다 희망적이고, 위로가 되는 서사가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안타까운 캐릭터, 송화

 동명의 영화를 원작으로 삼은 뮤지컬 <서편제>가 서울 광림아트센터 BBCH홀에서 개막했다. 판소리를 주제로 한 이 작품은 현대적 음악과 전통적 음악을 조화롭게 한 무대에 모은 수작으로 꼽힌다. 지난 8월 31일 개막하여 오는 11월 5일까지 상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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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뮤지컬이 주제를 전달하는 방식도 가부장적이고, 유봉의 관점이다. 예를 들면 1막 마지막 넘버가 그러하다. 송화는 가운데에 하이라이트 조명을 받고 '차라리 죽여줘요'를 외치며 고통에 몸부림 친다. 앙상블 배우들은 모두 무대에 서서 유봉이 하는 말 '언젠간 알게다, 시간이 흐르면 알게다' 류의 말을 반복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이 뮤지컬이 극 전체에서 말하고자 하던 주제이기도 했다. 하지만 방금 친 아비에 의해 눈이 먼 송화에게 너무 잔인한 일 아닌가? 극은 동호의 시점으로, 동호의 회상으로 전개되지만 많은 부분에서 유봉이라는 초점 화자를 내세운다. 동호가 없을 때의 송화와 유봉의 이야기는 대부분 유봉에게 더 맞추어 전개된다. 이 때, 젠더적인 관점을 배제하고 해석하기란 힘들다. 특히 요즘처럼 젠더 이슈가 활발히 논의되고 있을 때는.

송화에게 유봉이 저지른 짓이 얼마나 끔찍한지 상상해보라. <서편제>의 배경은 지금보다 더 끔찍한 시대였다. 그런 시기에 교육 받지 못한(송화는 학교에 가지 않았다), 가난한(송화는 길에서 사는 떠돌이 인생이다), 눈이 먼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그녀에게 주어지는 선택권이 있기나 한가? 그녀가 이야기하는 '차라리 죽여줘요'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다. 송화는 소리를 선택한 듯 해보이고, 이 극은 그런 방식으로의 서사를 선택했지만, 사실 그녀에게 주어진 선택권은 없다.

기획사가 내건 포스터의 공식 문구는 "세상은 희생이라 말했고 그녀는 인생이라 말했다"이다. 세상이 희생이라 말하는 것은 분명 유봉이 송화의 눈을 멀게 한 행위를 지칭하리라. 물론 송화와 어느 정도 맞닿는 인생을 사는 개개인 중 한 명이 '세상이 희생이라 할지라도, 내겐 인생인 걸'이라고 이야기 한다면, 그것은 존중해줘야 한다. 하지만 송화는 작가를 비롯한 다양한 창작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인물이다. 이 인물은 메인 주인공 세 명 중 유일한 여성 주인공이다. 투쟁하지 않고, 순응하며, 아버지를 그럼에도 사랑하는 캐릭터다. 그렇게 그려진 인물에게, 저 문구는 인생이라 말할 것을 강요한다. 공식적인 문구가 저렇게 쓰인 이상, 그 세계관 속 만들어진 인물 송화에게는 인생 '밖'을 생각할 권한이 없다.

송화와 동호의 어머니는 결국 가부장제 속에서 같은 운명이었다. 둘은 유봉에게 묶였다. 이를 무대에서 직관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그리고 둘은 그 가부장제 속에서, '여성-정적-머물러있음-집'이라는 의미로 구현된다. 또한, 결국 동호의 이야기 속에서 장치적인 인물로 활용됐다. 다만, 긍정적인 점이라면 소위 '킬링 넘버'들을 여성 인물에게 줬다는 점이라고 할까. 하지만 그 넘버로 옹호되기엔, 인물들이 너무 평면적이고, 발언권이 없고, 지나치게 순종적이다.

이 뮤지컬이 가진 가능성들

 동명의 영화를 원작으로 삼은 뮤지컬 <서편제>가 서울 광림아트센터 BBCH홀에서 개막했다. 판소리를 주제로 한 이 작품은 현대적 음악과 전통적 음악을 조화롭게 한 무대에 모은 수작으로 꼽힌다. 지난 8월 31일 개막하여 오는 11월 5일까지 상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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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컷 욕해놓고 이제 와서?'라고 혹자는 이야기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 뮤지컬은 아주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이 뮤지컬에게 향해진 비판 지점들은 한국에서 창작되는 뮤지컬들이 끊임없이 가지고 가야 할 질문들이다. 단순히 이 작품만의 혹은 한국 뮤지컬의 잘못이 아니다. 한국의 문화가, 그 역사 속에서 형성해온 특성에서 기인했다. 한국 뮤지컬만의 문제가 아니기에, 오히려 이것은 기회다. 이를 지적하고, 질문하면서 오히려 뮤지컬이 세상에 질문을 던지는, 예술의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도록 만들 수 있다.

예를 들면, 이 뮤지컬은 '한국의 이야기'를 하고 있기에, 비판적인 관객들에겐 이것이 한국 전통 문화가 무엇을 고쳐져야 할지 고발하는 작품으로 다가갈 수도 있다. 옹호되는 가부장적 폭력을 보며 그것을 더욱 강력하게 비판할 계기를 마련할 수도 있다. 유봉의 모순적인 모습들(세속적 욕망을 가지는 동호를 비판하지만, 판소리가 판치는 세상을 꿈꾸는 모습)을 통해 개개인의 모순성을 다시금 발견하는 계기를 찾게 될 수도 있겠다.

이 작품은 형식적으로 '웰 메이드 작품'이라는 호칭을 얻기에 충분하다. 이 작품이 가지고 있는 한계들은 여전히 아쉽다. 하지만 이 작품은 풀어내는 방식에 따라, 그 텍스트에 숨겨진 잠재성을 언제든 활용할 수 있다. 그로 인해 더 가치 있는 작품으로 자리 매김할 수 있다. 어쩌면 잘 만든 한국 창작 뮤지컬을 넘어서, 세계적으로 인정받을 고전 명작이 될 수도 있다. <서편제>는 그런 잠재성이 분명히 있는 작품이고, 그러기에 이 뮤지컬이 가진 한계들이 다음에는 더 수정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본다.

<서편제> 뮤지컬<서편제>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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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까칠하게 공연을 보고, 이야기 합니다. 때로 신랄하게 '깔'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좋은, 잘 만든 작품에게는 누구보다 따뜻하지 않을까요? / 해외 관극도 함께하며, 잘 만든 서사를 기다리는 중.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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