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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사한 시를 쓰는 재능은커녕 아내가 벌어오는 돈으로 어렵사리 생활하는 마흔 살의 시인 택기(양익준 분). 무능한 남편을 구박하면서도 한편으론 세상에서 가장 아끼는 아내 강순(전혜진 분)은 임신을 간절히 원하나 택기는 정자 감소증으로 소원을 들어주지 못한다. 초라한 처지 속에서 진심이 담긴 시를 쓰길 갈망하던 택기는 도넛 가게의 직원 세윤(정가람 분)을 만나고 미묘한 감정이 싹튼다. 그는 불우한 환경에 놓인 세윤과 시간을 보내면서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기분에 휩싸인다.

한 달에 30만 원을 벌 정도로 경제적 능력도 변변찮은 택기는 아내를 두고 새로운 사랑을 향해 달려간다. 극 중에서 강순은 "누구 때문에 사람 구실을 하는데 바람을 피우셨다고?"라고 고함치며 택기에게 화를 낸다. 택기가 복에 겨워 헛짓을 한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이 대목에서 손뼉을 쳤을지도 모르겠다. 분명 그의 행동은 일부에게 불편한 외도라 평가받을 만하다.

시인의 세계

<시인의 사랑>의 각본을 쓰고 연출을 맡은 김양희 감독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녀는 <씨네21>과 인터뷰에서 <시인의 사랑>을 "꽃노래만 부르던 순수청년이 세상의 이면에 직면하게 되는 이야기"로 정의하고 "비현실적인 인물이 현실에 발을 붙이게 될 때 느끼게 되는 감정의 변화에 주목하고 싶었다"라고 부연한 바 있다. 갇힌 세계를 살던 자가 새로운 세계를 만나는 과정을 <시인의 사랑>을 담고 있는 셈이다. 세계란 단어 속엔 가족, 사랑, 시, 예술 등이 폭넓게 녹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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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쓰기의 한계를 느끼던 택기는 세윤을 만나고 창작열에 불타오른다. 그는 세윤을 "그렇게... 함부로 아름다운 것들"이라 칭하며 영감을 주는 존재로 바라본다. 그러나 점차 감정에 격랑이 일자 그는 혼란스러워한다. 세윤에 대한 연민일까, 아니면 사랑일까? 그는 표현할 수 없는 자신의 감정을 시로 말하려고 애쓴다.

반면에 주위 사람들은 그를 이성애와 가족이란 언어로 이야기하길 요구한다. "시인은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아픈 사람을 위해 대신 울어주는 사람"이라고 택기는 생각하지만, 세상은 "그게 사랑일까? 당신에겐 비극이 필요했던 거지"란 시선으로 바라볼 뿐이다.

시는 여러 방식으로 영화에 관여했다. 김소연 시인의 <그래서>는 김양희 감독이 시나리오를 쓰기 전부터 좋아했던 시로 이야기를 구상하는 과정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그래서>가 정서적인 부분을 차지한다면 인물은 현택훈 시인에게 빚을 졌다. 우연히 현택훈 시인을 만난 김양희 감독은 지금까지 제주도에서 자라 인생의 큰 어려움을 겪지 않은 채로 안정적인 삶을 살았던 모습을 보며 "만약 이런 사람이 격정적인 감정의 풍랑을 맞게 된다면 어떤 이야기가 나올까?"를 떠올렸다고 밝혔다. 그리고 "만약 그 감정이 여자가 아니라 남자라면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았다"라고 덧붙였다.

영화의 전개 과정에서 시는 인물의 상황과 감정을 묘사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영화는 현택훈의 <내 마음의 순력도>로 문을 연다. "내 마음의 순력도를 펼쳐놓고 현재 나의 경로를 짚어봅니다"로 시작하는 <내 마음의 순력도>는 제주도라는 공간과 택기의 심리를 동시에 보여준다.

현택훈의 <마음의 곶자왈>, 김소연의 <그래서>, 기형도의 <희망>도 영화에서 만날 수 있다. 김양희 감독이 쓴 자작시도 여러 편 들어갔다. 시나리오를 쓰는 과정에서 어떤 장면엔 이런 느낌의 시가 들어갔으면 하는 식으로 어울리는 정서나 표현을 메모해두었다가 시의 언어로 다듬었다고 한다. 시를 배경음악으로 삼아 택기, 강순, 세윤의 사랑은 자신만의 형태로 나타나고 부딪힌다.

세계의 여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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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 분위기와 인물 관계로 보면 <시인의 사랑>은 1870년대 프랑스의 두 천재 시인 베를렌과 랭보, 베를렌의 부인 마틸드의 사연과 이것을 영화로 옮긴 <토탈 이클립스>와 무척 닮았다. 허희 문학평론가는 서울신문에 쓴 글에서 19세기 프랑스와 21세기 한국이라는 시공간적 차이를 언급하며 "사랑의 충동에 온몸을 내맡긴 그들이 모든 것을 내던지고, 함께 떠날 수 있느냐 없느냐를 가른다"고 적었다. 그리고 "오늘날 시인의 사랑은 체제가 용인하는 온건한 범주 안에서만 작동한다"고 평가했다.

<시인의 사랑>은 랭보와 베를렌의 파멸적인 사랑을 버리고 인물들에게 '온건한 범주' 내에 존재하는 내일을 선물한다. "난 죽을 때까지 여기서 살겠죠?"란 세윤의 대사는 영화에서 택기, 강순, 세윤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감독은 그들에게 씌워진 다양한 굴레를 벗겨주고 새로운 길을 열어준다. 앞에 놓인 길의 끝이 행복일지, 또는 불행일지 아직은 알 수 없다. 다만, 감독은 기형도의 시 <희망>을 들려주며 각자의 언어로 시를 쓰라고 용기를 북돋아 줄 뿐이다.

김양희 감독은 "사랑 안에 있을 때는 그 사랑이 뭔지 모른다. 시간이 지나면 그 사랑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시인은 무슨 생각을 할까. 그런 생각을 하며 영화를 만들었다."고 말한다. 시간이 흐른 뒤 택기, 강순, 세윤은 그 시간과 사랑을 어떻게 기억할까? 당시 선택은 최선이었을까? 그때의 감정은 무엇일까? 영화는 옳고 그름으로 판단하질 않는다. 그저 선택을 보여주고 여백을 남겼을 따름이다. 나머지는 관객 각자의 해석으로 채우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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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사랑 김양희 양익준 전혜진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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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당 24프레임의 마음으로 영화를 사랑하는 남자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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