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일 오후 9시 서울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2018 러시아 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한국과 이란의 경기를 보기 위해 경기장을 가득 메운 붉은 악마.

31일 오후 9시 서울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2018 러시아 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한국과 이란의 경기를 보기 위해 경기장을 가득 메운 붉은 악마. ⓒ 이근승


이란을 상대로 골을 넣기가 이리도 힘든 것이었나. 박지성이 없는 대한민국은 이란을 이길 수 없는 것인가.

신태용 감독이 이끄는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이 31일 오후 9시(이하 한국 시각) 서울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2018 러시아 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9차전 이란과 홈경기에서 0-0 무승부를 기록했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오는 6일 오전 0시에 열리는 우즈베키스탄 원정에서 승리를 따내야만, 자력으로 월드컵 본선에 나갈 수 있게 됐다.

조기소집 효과는 없었다. 김신욱이 아닌 황희찬이 선발로 나섰음에도 '뻥축구'가 등장했다. 기성용의 공백은 미드필더의 패스 전개 과정에서 확연하게 드러났다. 대표팀의 손흥민은 토트넘 홋스퍼에서의 모습과 여전히 달랐다. 후반 6분 만에 수적 우위를 점하기도 했지만, 최종예선 무실점의 방패를 뚫어낼 창이 날카롭지 못했다. 아자디 원정에 이은 '유효 슈팅 0개'의 굴욕은 충격을 더해줬다.

    상암월드컵경기장의 잔디 상태는 최악이었다.

상암월드컵경기장의 잔디 상태는 최악이었다. ⓒ 이근승


이곳이 대한민국 축구의 성지입니까

이란전 경기력과 결과만큼이나 아쉬운 것이 많았던 승부였다. 우선, 잔디 상태가 부끄러울 정도였다. 상암월드컵경기장은 2002 한-일 월드컵을 성공적으로 치러냈고, 한국 축구의 성지로 불리는 곳이라고 상상할 수 없었다.

서울시설공단은 19일부터 21일까지 7000만 원을 들여 잔디의 4분의 1가량을 교체했다. 잔디 온도를 낮추기 위해 송풍기 8대를 24시간 가동하는 노력도 기울였지만, 소용없었다.

경기 시작 전 선수들이 그라운드로 나와 몸을 풀 때부터 상암 잔디의 진짜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손흥민이 경기 시작 2분 만에 넘어졌다. 이란 선수의 발에 걸린 것이 아닌 잔디가 발목을 잡았다. 잘못하면 큰 부상으로 이어질 수 있는 아찔했던 상황. 녹색이어야 할 잔디가 붉은악마의 옷과 비슷한 색깔을 드러냈다.

    전반전 종료 후, 보수 요원들이 등장해 잔디를 메우느라 정신이 없다.

전반전 종료 후, 보수 요원들이 등장해 잔디를 메우느라 정신이 없다. ⓒ 이근승


10분이 채 흘렀을까. 육안으로 보기에도 움푹 패인 곳이 한 둘이 아니었다. 김승규 골키퍼가 볼을 처리하자 엄청난 양의 흙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전반전이 끝나면 후보 선수들이 그라운드에 나와 몸을 풀지만, 이날은 보수 요원들이 등장해 잔디를 메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6만3124명의 관중이 이란전을 보기 위해 경기장을 찾았다. 평일 오후 9시에 경기가 시작됐지만, 한국 축구의 선전을 기원하며 시간과 비용을 투자했다. 특히, R석(15만 원), 레드박스석(12만 원), 스페셜석(7만 원) 등 고가를 자랑하는 표는 일찌감치 매진됐다. 1등석(서쪽 6만 원, 동쪽 5만 원)도 마찬가지였다.

입장료를 받아낼 자격이 있었는지 의문이다. 잔디 문제는 처음이 아니다. 매해 축구인들은 문제를 제기했다. 울리 슈틸리케 전 감독과 기성용 등은 끊임없이 잔디 상태 개선을 요구했다. 그런데도 변화는 없다. 좋은 잔디 상태를 자랑하는 전주나 수원 등을 두고, 상암에서 경기를 치른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최악의 잔디 상태였음을 알면서도 상암을 고집한 이유가 단순히 선수들의 피로도 때문인지 의문이다.

손님 맞을 준비가 안 된 상태인 것을 뻔히 알고 있었고, 잔디 개선이 불가능하다는 것도 모를 리 없었다. 선수들은 물론이고, 관중들도 잔디때문에 피해를 봤다. 국가대표팀 경기로 수익을 올리고 싶다면, 기본부터 챙기길 바란다. 축구장에서 잔디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 일이 사라지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캡틴' 김영권, 꼭 그랬어야만 했나

불난 집에 부채질 한 꼴이다. 관중들이 잔디 때문에 불쾌했고, 답답한 경기력에 화가 났다. 그런데 '캡틴' 김영권의 경기 후 인터뷰는 너무나도 황당했다.

김영권은 "훈련을 하면서 세부적인 전술들을 맞춘 게 있었는데 경기장 함성이 워낙 커서 소통이 잘 되지 않아 연습한 걸 제대로 펼치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선수들 간에 호흡이 맞지 않았던 이유, 월드컵 본선행 티켓을 따내지 못한 원인이 6만3124명의 붉은악마 탓이란 말인가. 전반전 김영권의 두 차례 실수를 메워준 '괴물 신인' 김민재의 맹활약은 어찌 가능했다는 것인가.

김영권은 연령별 대표팀을 거쳤고, 2012 런던 올림픽 동메달 신화의 주역이다. 2014 브라질 월드컵에서도 주전으로 활약했고, 앞으로도 한국 축구의 중심에 설 수 있는 선수다. 현재는 기성용을 대신해 주장직을 맡고 있다. 그런데 이날 발언은 경기장을 가득 메운 관중들에 대한 존중이 없었다. 국가대표팀 주장이라면, 김영권 정도의 경력을 갖춘 선수라면, 신경을 써야 할 발언이었다.

    경기 후, 상암월드컵경기장 좌석 곳곳에는 쓰레기가 널브러져 있었다.

경기 후, 상암월드컵경기장 좌석 곳곳에는 쓰레기가 널브러져 있었다. ⓒ 이근승


'6만3124' 붉은악마에 대한 아쉬움

이란전은 경기 시작 1시간 전부터 뜨거웠다. 경기장 밖에서부터 '대한민국'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경기장 주변을 메운 포장마차와 매점 등에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질 않았다. 기대가 큰 경기인 만큼, 먹거리와 함께 축구를 즐기고자 하는 의지가 느껴졌다. 대다수 붉은악마의 손에는 먹거리가 들려져 있었다.

문제는 뒤처리였다. 자신이 먹은 음식을 놔두고 가면서 음료병, 맥주캔 등 쓰레기가 좌석 밑에 나뒹굴었다. 오후 11시가 돼서야 경기가 끝난 만큼, 경기장을 정리하는 이들의 퇴근 시간은 자정을 넘길 수밖에 없었다. 2002 한-일 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이자 거리 응원을 세계에 알린 붉은악마가 아니던가. 아시아 호랑이를 자부하는 한국 축구의 자존심이자 9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에 도전하는 대한민국 서포터스이지 않은가.

    경기 후, 상암월드컵경기장 좌석 곳곳에는 쓰레기가 널브러져 있었다.

경기 후, 상암월드컵경기장 좌석 곳곳에는 쓰레기가 널브러져 있었다. ⓒ 이근승


참으로 아쉽다. 경기를 주최하는 이들은 비용과 시간을 들여 경기장을 찾는 관중들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가 필요하다. 승부는 어찌할 수 없지만, 잔디는 기본 중의 기본이지 않은가. 경험이 풍부한 김영권의 인터뷰, 12번째 선수인 붉은악마의 시민의식도 마찬가지다. 이란전은 우리 모두의 반성이 필요한 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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