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사이다' 박혜진, 닮고 싶은 당당함 아나운서 박혜진이 31일 오후 서울 영등포의 한 웨딩홀에서 열린 온스타일 <뜨거운 사이다> 제작발표회에서 포토타임을 갖고 있다. <뜨거운 사이다>는 6인의 여성 출연진이 한 주를 '뜨겁게' 달군 최신 이슈에 대해 사이다처럼 '속 시원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토크쇼 프로그램이다. 3일 오후 9시 30분 첫 방송.

지난 7월 열린 온스타일 <뜨거운 사이다> 제작발표회에 참석했던 박혜진 아나운서. ⓒ 이정민


지난 8월 18일 오전 8시 MBC 아나운서들이 방송 제작 거부에 동참했다. 공영방송 정상화를 위해 256명의 MBC 소속 인원들이 이미 업무 중단에 참여하고 있었고, 여기에 방송사의 간판이라 할 수 있는 아나운서들이 힘을 실은 것. 박경추, 한준호, 허일후, 손정은, 서인 아나운서 등이었다.

같은 날 오후 박혜진 전 MBC 아나운서는 'MBC 선후배 아나운서들이 제작거부에 들어갔습니다. 온 마음을 담아 응원합니다'라는 짤막한 글을 자신의 SNS에 올렸다. 단순히 보면 같은 MBC 출신으로 동료들의 행동을 지지하는 발언 정도로 볼 수 있는데 사실 그 맥락을 살피면 보다 복잡하고 깊은 박 아나운서의 심경을 읽을 수 있다.

역사에 남은 클로징 멘트

"여러분과 함께 했던 지난 3년여 시간 속에는 역사가 있었고 또 삶이 있었습니다. 저희에게는 여러분의 눈과 귀가 되고 또 심장이 되고 싶었던 시간들이었습니다. 지금 많이 어렵지만 추위와 어둠을 뚫고 꽃이 피듯 또 여러분 마음에도 곧 봄날이 올 것을 믿습니다."(2009년 4월 24일 MBC <뉴스데스크> 클로징 멘트 중)

2001년 12월 MBC에 입사해 주말 정오뉴스, 아테네 올림픽 특집, 라디오 프로 등에서 경험을 쌓던 박혜진 아나운서는 2004년 10월 9일 주말 <뉴스데스크>의 앵커로 자리 잡는다. 당시는 여성 앵커가 단순히 형식적인 보조가 아닌 양성 평등의 기준으로 인식되던 때였다. 여론과 부작용을 의식해 공개 평가를 꺼리던 고위간부도 '뉴스 장악력과 전달력이 뛰어나다'며 박 아나운서를 몇몇 언론에 평하기도 했다. 그만큼 내부, 외부적으로 신임 받는 유능한 직원 중 하나였다.

그러다 2006년 3월 김주하 앵커를 이어 평일 <뉴스데스크>를 맡게 된 박혜진 아나운서는 MBC 뉴스가 시청자와 다소 멀어졌다는 내부 평가를 인식한 듯 "객관적이고 공정한 목소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며 "갈증 날 때 당장은 톡 쏘고 달콤한 음료가 입에 맞겠지만, 결국은 무색무취의 맑은 생수처럼 공감할 수 있는 뉴스를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소신을 밝힌 바 있다.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은 공정성과 자연스러운 전달력은 박혜진 아나운서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이를 반영한 듯 2006년 한 아카데미가 진행한 설문에서 예비 아나운서들이 가장 만나고 싶은 여성 아나운서 1위에 박혜진의 이름이 오르기도 했다.

"뉴스 앵커 이미지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성이라고 생각한다. 신뢰성을 바탕으로 시청자와 앵커 그리고 일선에서 취재하는 기자가 아는 것을 시청자들에게 전달하는 기능을 해야 한다. (중략) 시청자들을 가르치려 하거나 오만한 태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시청자의 눈높이에서 함께 이야기하고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2006년 시청자와의 만남 자리에서)   

언론노조 총파업에 동참한 박혜진 앵커 전국언론노동조합이 총파업에 돌입한 가운데 26일 오후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언론장악 7대 악법저지 언론노조 파업 출정대회'에 MBC <뉴스데스크> 박혜진 앵커가 참여하고 있다. 

박 앵커는 전날 <뉴스데스크> 클로징 멘트를 통해 "조합원인 저는 이에 동참해 당분간 뉴스에서 여러분을 뵐 수 없게 됐습니다. 방송법 내용은 물론 제대로 된 토론도 없는 절차에 찬성하기 어렵습니다. 경제적으로 모두 힘든 때, 행여 자사이기주의 그리고 방송이기주의로 보일까 걱정되지만 그 뜻을 헤아려주시기를 바라겠습니다."라고 시청자들의 사전 양해를 구한 바 있다.

전국언론노동조합이 총파업에 돌입한 2009년 12월 26일 '언론장악 7대 악법저지 언론노조 파업 출정대회'에 참가한 박혜진 앵커. 박 앵커는 전날 <뉴스데스크> 클로징 멘트를 통해 "조합원인 저는 이에 동참해 당분간 뉴스에서 여러분을 뵐 수 없게 됐습니다. 방송법 내용은 물론 제대로 된 토론도 없는 절차에 찬성하기 어렵습니다. 경제적으로 모두 힘든 때, 행여 자사이기주의 그리고 방송이기주의로 보일까 걱정되지만 그 뜻을 헤아려주시기를 바라겠습니다."라고 시청자들의 사전 양해를 구한 바 있다. ⓒ 남소연


최장수의 오명과 부채감

사실 박혜진 아나운서가 강조한 공정성, 그리고 무색무취는 이미 <뉴스데스크>를 거쳐 간 엄기영 전 MBC 사장 등 선배 아나운서들이 언급한 덕목이다. 그만큼 상식적이며 기본적인 덕목이라는 뜻이다. 그런 상식이 대체 언제부터 무너졌을까. 답은 분명하다. 정권의 공영방송 장악 프로젝트가 본격 가동되기 시작한 후 몇차례 파업에 이어 2012년 노조원들의 총파업이 장기화되면서다.

이 중심엔 신동호 MBC 아나운서 국장과 배현진 아나운서, 최대현, 양승은 등이 있었다. 총파업 103일 째 배현진 아나운서 등은 업무에 복귀했고, 현재 배현진 아나운서는 MBC 내 여성 앵커 중 6년 9개월 간 <뉴스데스크>를 진행하며 백지연 아나운서가 세운 6년 6개월의 기록을 갈아치웠다.

파업 참여에 적극적이었던 이들 중 오상진, 문지애 아나운서가 이미 퇴사했던 상황, 2014년 박혜진 역시 퇴사를 결정했다. 당시 "(퇴사) 이유를 한마디로 말씀 드리기가 어렵다. 나보다 나를 더 근사하게 꾸며줄 그런 무대를 막연히 기다렸던 것 같다"고 뭉뚱그려 심경을 전했지만 언론계에선 사측의 일방적인 보복 인사 등으로 간판급 아나운서들이 많이 상처받고 힘들었다는 게 주지의 사실로 회자되곤 했다.

퇴사 직전까지 박혜진 아나운서는 결국 TV 뉴스를 맡지 못했다. <뉴스데스크>에서 내려온 직후 휴가를 다녀온 그는 6개월 뒤인 2009년 10월에야 방송에 복귀했다. 그것도 한글날 특집 프로로. 그리고 시사교양과 예능, 라디오 프로의 MC를 맡으며 근근이 업무를 이어갔을 뿐이다. 어느새 시청자들은 뉴스를 전달하던 박혜진이 아닌 2010년 물리학도와 결혼한 박혜진, 영화 음악을 소개하거나 예능인들 틈에서 매끄러운 역할을 하는 진행자 박혜진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 5년의 무력감 때문이었을까. 2014년 5월 전격 퇴사를 결정한 이후 그는 <뉴스타파>의 세월호 1주기 다큐 내레이션과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식의 사회를 보는 등 그 행보를 넓혀갔다.

 박혜진 아나운서는 <뉴스타파-세월호 참사 1주기 특집 '참혹한 세월, 국가의 거짓말'>(2015.4.16)의 내레이션을 맡았다.

박혜진 앵커는 MBC 퇴사 후, 독립언론 뉴스타파에서 세월호 관련 다큐멘터리 작업과, 세월호 콘서트, 노무현 전 대통령 추도식 사회 등에 참여했다. ⓒ 뉴스타파


아마 박혜진이 퇴사하지 않고, MBC가 파업 이후 곧바로 정상화 길을 걸었다면 최장수 여성 앵커 타이틀은 박혜진의 것이 될 수도 있었다. 현재까지도 공영방송 정상화 투쟁이 이어지고 있는 와중에 이런 가정법이야 무의미하겠지만 '(제작 거부에 동참하는 동료들을) 온 마음을 담아 응원한다'는 SNS 상 박혜진 아나운서의 발언은 여러 복잡한 생각을 들게 하기 충분하다.

'공범자들' 박혜진 아나운서  박혜진 아나운서(전 MBC 뉴스데스크 앵커)가 9일 오후 서울 메가박스동대문에서 열린 영화 <공범자들> 시사회에서 사회를 보고 있다. <공범자들>은 <자백>을 제작한 최승호 감독의 신작으로 KBS와 MBC 등 공영방송을 망친 주범들과 공범자들의 실체를 다룬 기록영화다. 17일 개봉.

박 아나운서는 지난 8월 9일 영화 <공범자들> 시사회에서 사회를 맡았다. ⓒ 이정민


아무도 가지 않은 길

얼마전 박혜진 아나운서는 공영방송 몰락기를 다룬 다큐 영화 <공범자들> 언론 시사회에 나타났다. 보통 홍보대행사 인원 혹은 인기 방송인이 진행하던 것과 달리 이 날 기자간담회는 박 아나운서가 마이크를 잡았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연출자인 최승호도 영화 속 주요 인원들도 MBC 해직기자거나 현재 투쟁 중인 이들이었으니. 그래서 질문 대상자가 아니었음에도 박혜진에게 직접 물었다. 지금은 외부 인원이지만 영화를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저도 파업 현장에 있었고, 내부자였기에 영화를 보고 몇몇 장면에서 웃으면서도 그 끝이 쓰고 아팠다. 힘든 시간을 보내며 사실 굉장한 무기력감을 느꼈다. 아나운서로서 존재가치를 부정당한 시간이었다. 자의로 전 프리랜서를 택했지만 솔직히 말하면 그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탈출한 1인일지도 모른다. 그 이후 친정(MBC)을 비롯해 공영방송이 제 목소리를 못 내고, 제 선후배 동료의 아픔을 보면서 분노하고 마음이 아팠다. 전 나왔지만 제가 작게나마 도움이 된다면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 오늘 간담회도 요청이 왔기에 선뜻 한다고 했다." (박혜진 아나운서)

어쩌면 이 말은 3년 전 고심하다 퇴사를 택했을 때부터 품고 있던 것이었을지 모른다. 당시에도 그리고 지금도 동료들에게 피해가 갈까봐 선뜻 자신의 진심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던 박 아나운서. 짧은 말로 동료들을 응원하는 그에겐 여전히 끝까지 남아 함께 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부채감이 담겨있었다.

"뉴스를 진행하는 동료들은 오늘 큐시트에 어떤 뉴스가 있을까 두려워했다. 다들 뉴스에 들어가게 될까봐 무섭고 두려워한다. 뉴스 앵커가 명예이고 자랑이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제는 '멍에'가 됐다. (중략) 김소영 아나운서는 10개월 동안 벽만 보고 있다 떠났다. 그다음 차례는 나일까, 옆자리 선배일까, 알 수 없다. 사소한 개진도, 건전한 비판도 할 수 없다." (지난 8월 22일 제작거부 관련 기자회견 자리에서 이재은 아나운서의 발언 중)

신동진 MBC아나운서 '손석희, 박원순 인터뷰 했다고 사측 압력' MBC아나운서 27명이 김장겸 사장을 비롯한 경영진과 신동호 아나운서 국장 사퇴를 촉구하며 22일 오전 서울 마포구 상암동 MBC사옥앞에서 ‘방송거부-업무거부 돌입 기자회견’을 열었다. 2012년 파업 당시 한국아나운서협회장을 맡았던 신동진 아나운서가 손석희 JTBC사장(MBC출신), 박원순 시장, 해직언론인 등을 다룬 협회지 ’아나운서 저널’을 보여주며, 이 내용을 이유로 사측의 압받을 받아야 했다고 폭로했다. 업무거부에 돌입한 아나운서는 변창립, 강재형, 황선숙, 최율미, 김범도, 김상호, 이주연, 신동진, 박경추, 차미연, 한준호, 류수민, 허일후, 손정은, 김나진, 서인, 구은영, 이성배, 이진, 강다솜, 김대호, 김초롱, 이재은, 박창현, 차예린, 임현주, 박연경 이상 27명.

▲ 신동진 MBC아나운서 '손석희, 박원순 인터뷰 했다고 사측 압력' MBC아나운서 27명이 김장겸 사장을 비롯한 경영진과 신동호 아나운서 국장 사퇴를 촉구하며 지난 8월 22일 오전 서울 마포구 상암동 MBC사옥앞에서 ‘방송거부-업무거부 돌입 기자회견’을 열었다. ⓒ 권우성


자사의 뉴스 전달을 두려워하는 지경에 이른 동료들을 보며 박혜진 아나운서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는 '지금은 내부 구성원들의 이야기가 중심이 돼야 한다'는 문자를 통해 언론 인터뷰를 정중히 고사했다. 자신은 '결국 버티지 못하고 나온 사람 중 하나'이기에 꾸준히 저항하고 투쟁하는 사람들 이야기부터 전해지는 게 맞다는 것이었다. 부채감만으로 해석할 수 없는 무언의 지지와 응원. 그의 이 문자 하나가 울림이 클 수밖에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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