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국내 상영관들은 역사적 사건을 제재로 한 영화들로 인해 북적인다. 1980년 광주 5·18 민주화 운동을 다룬 <택시운전사>가 1000만 관객을 돌파하며 흥행 중이고, 얼마 전에는 스크린 독과점과 리얼리티 부족으로 논란을 빚은 <군함도>가 700만 관객을 동원했다.

<부산행>(2016), <암살>(2015), <베테랑>(2015) 등 1000만 관객을 돌파한 이전 상영작들도 역사성이나 시사성에 편중되다 보니 개개인이 주인공인 일상이 소홀해진 듯한 아쉬움이 든다. 그러면서 떠오른 게 2015년 상영작 <화장>이다.

  생(化粧)과 사(火葬)를 오가며

생(化粧)과 사(火葬)를 오가며 ⓒ 리틀빅픽쳐스


임권택 감독의 102번째 작품인 <화장>은 소설가 김훈의 동명 작품(2004년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작)이 원작이다. 작가는 화장의 중의성, 즉 화장(火葬)과 화장(化粧)으로써 암 투병 중인 아내의 스러짐을 통해 인생을, 그리고 젊은 부하 여직원의 고혹적인 매력을 통해 젊음을 부각시키며 그 사이에서 갈등하는 중년남성의 심리를 절묘하게 표현한다. 

영화는 원작의 의도를 십분 살려 오 상무(오정석, 안성기 분)의 자기 내면 관조(觀照)에 앵글을 맞춘다. 아내(김호정 분)와 딸(전혜진 분)의 애먼 소리와 힐난을 통해 부부관계가 원만하지 못했음을 연출하면서, 아내 간호에 열성인 오 상무의 반듯함과 흔들림을 비추며 캐릭터를 완성한다.

오 상무의 갈등이 안성기의 호연으로써 무리 없이 전달되는 중에 나는 오 상무를 '화장(化粧)하는 남자'로 바라보고 만다. 원작이 의도하는 화장(化粧)이 부하 여직원(추은주, 김규리 분)을 지시함을 아는 데도 그렇다.

자기 마음을 바라보며 갈등을 일으키는 욕망을 조율하는 오상무는, 원작을 흉내 내면, 인간으로서 윤리색(色)을 덧바르는 화장(化粧)을 하는 셈이다. 그 과정에서 욕망을 없애는 화장(火葬)이 행해진다. 

 사물 너머를 보게 하는 두 몸

사물 너머를 보게 하는 두 몸 ⓒ 리틀빅픽쳐스


오 상무는 아내를 정성스럽게 간병하지만 아내의 삶에 연연하지 않는다. 화장실 출입 등을 보살피는 허드레꾼 몸짓에 주저함이나 성긴 데가 없으나 냉정할 정도로 담담하다. 의료기기를 착용해야 자신의 오줌을 뽑아낼 수 있는 상황에서도 중역이나 남편으로서 고됨을 내색하지 않는다.

그러한 오 상무의 극기는 가면이 아니라 화장이다. 자기 속내를 알기에 추스르고 조심하는. 아내를 화장하는 장례식 중에도 상사가 아닌 남자의 욕망으로 추은주를 엿보지만 끝내 추행에서 비켜난다. 그를 향해 별장까지 달려오는 그녀와 함께하고픔을 떨치고 발가락을 드러낸 채 황황하게 길로 나선다. 그렇게 고독을 감내하는 화장은 민낯과 가면 사이의 줄타기, 즉 인생이다.

오랜만에 안성기(63세)가 주연이다. 장년의 주름과 마른 얼굴 및 탄탄한 근육으로써 화장하는 남자를 무리 없이 풀어낸다. 과묵한 정성, 선선한 중역, 환한 음색의 중후함, 두 팔 늘어뜨린 뒷모습 등을 연출하는 그는 내공 어린 변환 모드다. 그에게 몸을 내맡겨 병자의 수치심을 호연한 김호정에게도 박수 친다. 두 역이 빚은 몸은 사물 너머를 보게 한다.

오 상무처럼 누구든 자기 욕망을 화장(火葬)하며 인생을 화장(化粧)할 수 있다. 지금 여기를 살기 위해 새롭게 화장(化粧)할수록 화장(火葬)은 불가피하다. 그렇게 생(化粧)과 사(火葬)를 오가며 대개 유기체는 나름 살맛을 지향한다. 살맛은 앞선 언행에서 우려먹을 수 없는 일회성이다. 순간순간 화장(火葬)으로 벗어나 화장(化粧)으로 변화해야 맞이할 수 있다.

화장 임권택 안성기 김호정 김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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