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선의 연기가 좋아서 클립 영상을 봤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본방 사수'를 하고 있었다. 지난주 종영한 드라마 <품위있는 그녀>의 이야기다. 포스터, 등장 인물 정보 등으로도 알 수 있듯 이 이야기는 김희선-김선아라는 여성 배우 투톱 드라마였다. 여성 서사에 언제나 목마른 시청자로서는 그야말로 반가운 일이었다. 로맨스가 이야기를 함께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되긴 했지만 그것이 이야기의 가장 주된 서사는 아니었다. 오히려 로맨스를 통해 가족이나 인간으로의 당위, 윤리 등을 말했다. 물론, '가족'이라는 소재는 그 어떤 가족 서사보다 세련되게 담아냈다.

'상류 사회'를 담아내는 방식도 독특했다. 흔히 한국 서사에서 상류 사회를 모티브로 할 경우 둘 중 하나였다. 하나, 상류 사회를 환상화하고 우상화하여 그들이 사는 세계를 동경하게 만든다. 대표적으로는 <꽃보다 남자>나 <상속자들> 류의 로맨스 물이 떠오른다. 그게 아니라면, '상류 사회'를 풍자하는 이야기다. <품위있는 그녀>는 그 맥락을 보자면 후자에 속한다. 하지만 분명 여태까지의 방식들과 달랐다. 더 세련되기도 했고, 비현실적이라 믿고 싶을 정도로 현실적이기도 했으며, '상류 사회'에 소속되는 것보다 더 필요로 할, 어떤 '품위'에 대해 이야기하는 데에 상류 사회가 그 모티프가 되어주기도 했으니 말이다.

 품위있는 그녀

품위있는 그녀 ⓒ jtbc


성실한 작가, 버려지지 않는 캐릭터

필자는 잘 쓴 이야기의 조건 중 하나를 '캐릭터를 낭비하지 않는다'로 보는 편이다. 작가는 펜을 들며 인물들의 삶을 설계할 일종의 '권력'을 가진다. 작가의 힘에 의해 인물은 가장 비참한 인생을 맞이하기도, 가장 행복한 순간을 맛보기도 한다. 작가는 어떤 인간의 삶을 관리할 권리를 가지는 만큼, 그 인물들의 삶이 헛되지 않도록 이야기를 써야 한다. 그 인물들이 가상일지라도 말이다. <품위있는 그녀>는 그런 점에서, 잘 쓴 이야기였다. 모든 인물들이 각자의 개성과 캐릭터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버려지지 않았다.

그 중 가장 인상 깊던 것은 마지막 결말, 박복자를 죽인 범인이 된 운규다. 이미 네티즌 수사대는 19화의 예고편을 통해서, 어쩌면 그 이전부터 '혹시 운규가 범인이 아닐까?'라는 추측을 내놓았다. 그리고 20화에서 운규가 범인임이 밝혀졌을 때, 시청자들의 의견은 갈렸다. 어떤 시청자들은 '별로 드러나지도 않던 인물이 진범이라고 하니, 작가가 너무 반전에 목숨을 걸고 억지 엔딩을 낸 것 같다'라는 입장을 내기도 했다. 하지만, 오히려 <품위있는 그녀>는 운규가 진범이 됨으로써 그 작품성이 강화된다. 운규가 캐릭터로 존재해야 할 이유가, 마지막 결말로 인하여 생겨나는 것이다. 특히 <품위있는 그녀>가 애초에 죽은 복자의 회고를 통해 진행된 서사라는 점을 보았을 때, '존재감도 없던' 운규가 굳이 서사에 등장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운규가 범인으로 밝혀지자, 그 이전의 아진이 복자에게 했던 말이 복선으로 새롭게 다가오기도 했다. 방영 당시에는 '아진이 참 친절하구나, 역시 '갓아진'이구나. 저 순간에 복자에게 하는 부탁조차 운규에 관한 부탁이라니' 정도로 느껴졌던 대사였다. 하지만 복자를 죽인 것이 운규인 이상, 그리고 그 이유가 복자가 집안으로 들어오면서 운규가 더욱 느껴야 했던 혼란과 분노였던 이상, 해당 대사는 복선이 된다. 그 대사는 다음과 같았다.

'주제 넘지만, 제가 한가지 부탁 드릴게요. 운규가 고3이에요. 내성적이고 말수가 적어서 내색을 안 하지만, 상처가 많아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나 원망, 알 수 없는 감정들도 내색을 안 해요. 일전에 실수하신 거, 운규한테 꼭 사과해주세요. 사과가 힘드시면,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건네주세요.' (<품위 있는 그녀> 8화 중)

더 나아가 아진의 딸 안지후라는 캐릭터도 그러하다. 물론 지후는 꾸준히 서사를 진행하는 데에 큰 역할을 해왔다. 똑똑하고 똑부러진 성격으로 아빠에게 할 말을 하는 캐릭터이면서 엄마를 위해주는 마음이 돋보였다. 극 중 가장 어린 캐릭터이면서 지후는 아진과 시청자들에게 운규가 범인이었음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계기를 제공하는 인물이었다. 지후의 영어 일기, 그리고 운규에 대한 이야기로 아진과 시청자는 살인범을 알게 됐으니 말이다. 또한 앞으로 강기호 변호사와 아진의 관계를 더욱 끈끈하게 이어줄 역할을 할 것 같다고 기대하게 하기도 한다.

 <품위있는 그녀>의 한 장면

<품위있는 그녀>의 한 장면 ⓒ JTBC


억지스럽지 않은, 부담스럽지 않은 메시지

공익광고를 비롯한 광고, 포스터, 표어를 보는 것이 아닌 이상 메시지는 담겨 있되 직접적이지 않아야 한다. 너무 대놓고 드러내는 메시지는 이야기를 촌스럽게 만든다. 메타포나 메시지가 없는 서사는 재미는 있을지 몰라도 그 서사는 '오락성 작품에 그치지 않는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결국 작가는 이야기를 재밌게, 교훈을 담아서, 하지만 직접적이지 않게 써야 하는, 몹시 어려운 일을 해낼 역량을 지녀야 한다.

아진이 보여주던 품위는 '상류층'의 품위가 아니다. 아진의 품위는 범 인류로서 가져야 할 품위였다. 그녀의 삶에 대한 고민은 그녀가 '상류층'이기에 가진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결국 안락한 선루프가 아닌, 자신의 길을 택한다. 이는 끝까지 박복한 인생을 살고 갔던, '상류층의 품위'를 갈망하던 박복자와 대조된다. 돈과 명예 등을 좇으며 당위성, 도덕, 윤리, 삶에 대한 고민이 부차적인 것으로 치부되는 세상에 이 서사가 가지는 메세지는 인상 깊다. 그 속에서 보여주는 '상류층'의 실상 또한 메세지를 돋보이게 해준다.

또한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운규가 복자를 살해했다고 했을 때 어른들의 잘못됨은 어른들의 잘못에서 그치지 않고 그 다음 세계로-그리고 그것을 대변하는 '운규'라는 인물로 '계승'됨을- 지속됨을 보여준다. 운규가 불안해하며 병원에 실려가는 것은 <품위있는 그녀>가 지속적으로 이야기하던 메시지, '잘못된 일을 저지르면 불행할 수밖에 없다'와 맞닿는다.

더 나아가, 운규가 체포되지 않고 그의 아버지가 체포되면서 운규의 범죄가 은닉된 것은 우리가 진실이라 믿는 세계와 실제 진실과의 간극이 있을 수 있음을 보여줬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는 진실이 아닐 수 있다는 의심이다. 하지만 다소 비관주의적으로 끝날 수 있는 엔딩은 경찰들이 운규의 출국 기록을 확인하고 그가 출국한 적이 없었다는 것을 앎과 동시에 일종의 희망으로 바뀐다. 은폐된 진실이 밝혀질 수 있다는 희망 말이다. 또한 이는 열린 결말로, 작가가 제공하지 않았기에 시청자의 판단에 따라 진실이 밝혀질지 계속 은폐될지 결정된다.

덧붙이자면, <품위 있는 그녀>는 지후와 운규라는 캐릭터를 통해 어른들의 세계에 따라 어떤 아이들이 탄생할 수 있는지를 내포하기도 했다. 물론 두 인물은 온전히 대조되지는 못한다. 지후의 아빠는 바람을 피웠지만, 결국 이는 이혼 사유가 된다. 하지만 그야 말로 '품위있는' 엄마를 닮아 현명하고 사랑스럽던 지후는 운규와 비교된다. 살인 미수범 아버지와 사랑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가족'으로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 가족에서의 운규와 말이다. 둘이 극 중 가장 중요한 자녀 세대로의 인물들이라는 점에서 더더욱.

 jtbc <품위있는 그녀>

jtbc <품위있는 그녀> ⓒ jtbc


백미경 작가의 드라마 세계가 기대된다

<품위있는 그녀> 종영 후 많은 팬들은 댓글 등을 통해 행복하고 고맙다고 제작진에게 일종의 '고백'을 하기도 했다. 나또한 그런 입장 중 하나였다. 우선 드라마를 잘 챙겨보지 않던 나에게는 '챙겨봐야 할' '글 잘 쓰는' 작가를 알게 되어 기쁜 드라마였다. 많은 시청자들이 그러할 것이다.

'기승전 로맨스'라는 한국 드라마의 한계를 깬 드라마, 하지만 동시에 '로맨스'라는 가장 매력적인 서사의 소재를 가져온 드라마, 여성 캐릭터를 전면으로 내세우면서 어쨌든 '여성 서사'로 기능한 드라마, 또한 '선과 악', '윤리', '도덕'을 통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이야기하던 드라마, 이 모든 서술들이 한 드라마 <품위있는 그녀>에 대한 서술이라는 점이 놀랍다.

제1회 MBC 프로덕션 영화 시나리오 공모에서 우수상이라는 수상 경력이 있지만, <품위 있는 그녀>의 작가 백미경의 본격적인 작품 활동은 2014년 강구 이야기였고, 본격적인 수상 또한 2012년부터 였다. 여태껏 써낸 작품보다 써낼 작품들이 많을  이 작가와 이 작가의 드라마 세계에 기대를 품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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