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농업'은 우리 사회에서도 더는 생소한 용어가 아니다. '도시에서 농사'를 짓는 건 이 시대 삶의 대안적 담론으로 '귀농' 만큼이나 매력적이다. 그렇기에 8월 21일 EBS 국제다큐영화제(이하 EIDF)의 첫째 날 EBS를 통해 방영된 <도시 농부 프로젝트>도 또 하나의 실용적 해외 도시 농업 다큐인가 싶었다. 하지만 <도시 농부 프로젝트>는 이 영화의 원제 'Wild Plants'처럼 식물의 철학, 아니 식물을 빌려 인간의 대안적 삶을 모색해보는 삶의 화두를 던진다. 

이 영화의 부제는 Transform(변화)이다. 우리 시대의 변화란 기존의 것을 부수고 거기에 새로운 것을 만들거나 쌓아올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다큐가 말하는 변화는 전혀 다르다.

 도시농부 프로젝트

도시농부 프로젝트 ⓒ EIDF


아직 얼음이 녹지 않은 황량한 겨울 들판에서 시작된 서정적인 영상, 겨울의 추위를 이겨내지 못하고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쓰러져 간다. 마치 '없음'을 상징하는 듯한 겨울을 이제 더는 사람이 머물지 않는 앙상한 폐건물이 대신하고, 그렇게 다큐는 디트로이트란 공간을 설명해 들어간다.

폐건물에서 건져낸 삶과 죽음의 철학

그리고 다음, 앤드류 캠퓨가 폐허가 된 집기들 사이에서 땅을 판다. 그는 "내 마당의 쓰레기들에서 멋진 작품이 탄생할 것"이라며 같이 일하는 청년 말릭에게 말을 건넨다. 그 쓰레기들에서 생애 주기를 느끼고 삶과 죽음을 끝이 아닌 변화로 느껴보라고. 흙을 대하는 과정은 종교와도 같다고. 앤드류의 잠언과도 같은 말에 청년 말릭은 래퍼처럼 답한다. 쓰레기에서 무언가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은 이해를 하려하면 할 수 있지만, 거기서 삶과 죽음에 대한 경지까지는 어쩐지 쉬이 다가오지 않는다고.

이 동문서답 같은 앤드류와 말릭의 대화가 바로 이 다큐가 던지는 질문이다. 익숙한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 거기서 생략된 질문, 죽음 이후, 심지어 죽음조차도 거창하고 장식적인 형식 속에 휩쓸려 들어가 버리는 세상에서 우리는 그 이후에 대한 질문을 잃었다. 원주민 노인 마일로 예롱우헤어의 말이다.

물론 우리 사회에서도 '농업'의 의미, 도시 농업, 텃밭 가꾸기는 '자연 친화적'인 삶의 방식으로 존중받는다. 기업화된 식량 생산에 대한 대안으로도 유의미하다. 그런데 다큐는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도시농부 프로젝트

도시농부 프로젝트 ⓒ EIDF


제네바의 혁신적 노동조합 자르댕 드 코카뉴에는 젊은 청년들이 여럿 모여 텃밭을 일군다. 허리를 펴지 못하고 잡초를 뽑는 이들. 심지어 밤에 꿈에 나올 정도라고 서로 농담을 할 정도다. 하지만 그렇게 고된 노동을 선택한 이들에게 텃밭 가꾸기는 식량을 얻는 것 이상이다. '상업적 활동'이 아니라, 도시의 소비자들과 연계하여 필요한 만큼의 생산을 모색하고자 하는 이들. 그들에게 이 일은 도시에서 원자화되었던 삶을 벗어나 공동체를 이루는 일이요, 하늘과 생명과 나를 연결하는 과정이 된다. 그 풍성한 활동으로서의 농업은 이들에게 끝나지 않는 삶의 사이클로서의 자각을 일깨운다.

그들에게 식물은 그저 농사의 대상이 아니라, 느리게 사는 것을 가르쳐주는 선생이다. 여리게만 보이지만 식물 역시 존재하는 모든 것과 관계를 맺고, 생존을 위한 싸움을 쉬지 않는 존재다. 이들은 이런 식물에서 종교와도 같은 영감을 얻는다. 한 발 더 나아가 제네바의 젊은이들에게 이런 식물적인 삶(?)은 정치적인 자기표현이기도 하다. 익명성의 세상에서 협동심을 키우고, 생산과 사람간의 거리를 좁히는, 이 세상의 흐름을 혁명적으로 거스르는 정치적인 '저항'이다.

이런 과정을 마일로 노인은 '노래'라 칭한다. 자연의 언어를 이해하는 과정, 내 피부는 흙과 같고, 내 숨결은 바람이 되며, 내 피는 흐르는 물과 같으니, 우리 인간도 하나의 식물로써 변화의 과정을 겪게 된다는 것이다. 그 변화의 과정을 이해하는 '아름다운 경지'에 이르면 자신의 안에서 울려 퍼지는 '노래'를 들을 수 있단다. 라코타 어로 노래를 부르는 노인, 우리의 할 일은 '창조'를 거듭하는 것이라는 내용이다.

식물과 동지가 되어

그 '창조'의 의미를 오랜 시간을 걸려 실천하는 이가 있다. 제네바의 모리스 마기이다. 늦은 밤 제네바의 거리, 이제 노년에 이른 한 사람이 거리를 헤맨다. 가로등만 덩그러니 서있는 황량한 공간. 그곳에 모리스는 땅을 파고 무언가를 심는다. 모리스의 가방 안에 들어있는 식물의 씨앗, 키 별로 네 종류로 나뉜 씨앗들은 거리의 척박한 땅에서도 심지어 콘크리트 틈에서도 잘 자랄 수 있는 선구 식물들이다.

선구식물을 자신의 정치적 동지라 부르는 모리스. 사향 엉겅퀴와 같은 이들 식물에서 삭막한 취리히를 10년 안에 숲이 우거진 도시로 만들고자 하는 모리스는 동지애를 느낀다. 척박한 땅과의 싸움을 통해 선구식물들은 그 보다 순한 다른 식물들도 자랄 수 있는 토양의 개선을 이뤄낸다. 그리고 그 과정은 누구 하나 시키는 사람 없이 홀로 취리히의 거리에 거미줄 같은 식물의 지도를 만들어낸 모리스의 행보와 일치한다.

 도시농부 프로젝트

도시농부 프로젝트 ⓒ EIDF


또 다른 도시 디트로이트의 앤드류 부부도 마찬가지다. 식물을 키우는 과정을 통해 자신처럼 농사를 지었던 할머니 세대의 삶을 이해하게 된 앤드류의 아내. 어린 시절 어머니의 죽음 이후 관계에 대해 깊은 고민을 가졌던 그녀는 식물의 사이클을 통해 죽음이 끝이 아닌, 거름으로서 새로운 순환의 시작이라는 새로운 차원을 이해하게 된다. 우리가 버린 것에서 다시 무언가를 돌려받는 과정, 생명이 끝난 것 같던 계절 뒤의 새 생명 잉태. 결국 그 과정은 우리 인간의 죽음 이후의 과정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연다. 끝이 아닌 휴지기, 다시 새로운 생명을 위한 헌신. 그리하여, 삶의 단계는 서로 차별 없이 하나의 순환으로 이해되고, 살아가고 나이 들고 변하는 것에 기꺼이 순응하게 된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계란 등을 둘러싼 해프닝은 결국 우리 사회가 살아가고 있는 담론의 문제로 귀결된다. 자본주의적 시스템에서 늘 과잉된 생산물을 '소비'하는 주체로서만 자신을 증명하는 세상, 그러나 우리에게 물건으로 행복감을 주는 이 사회를 <사피엔스>의 유발 하라리는 동물 잔혹사와 불행을 깔고 앉은 사회라 단언한다.

<도시 농업 프로젝트>는 '농사'의 기술이 아니라, 식물을 통해 벌어지는 대순환의 사이클에 대한 진득한 천착을 통해 삶의 새로운 담론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저 숲에 들어가 한동안 아무 것도 하지 않았어도 배움을 얻는 아이들, 죽음이 끝이 아니라 더는 두렵지 않은 부부, 그리고 땀 흘려 일하고 그것을 나누는 기쁨이 자신의 존재 이유가 된 젊은이들. 그들을 통해 얻는 건 농사의 기술이 아니라, 삶의 새로운 철학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이정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5252-jh.tistory.com)와 <미디어스>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도시 농부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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