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보강: 8월 23일 오후 5시 33분]

"저, 대학 안 가고 음악하며 살겠습니다."

수능 시험을 두 달 정도 앞둔 어느 날 나는 부모님께 깜짝 선언을 했다. 서울로 재수하러 간 아들에게 보내는 생활비가 공연관람비나 문학도서, 사회과학도서 구입비 같은데 쓰이고 있다는 걸 모르실 부모님에게는 뜻밖의 반란이었을 것이다.

나는 사회에 대해 알고 싶었다. 그래서 사회과학을 전공하기 위해 대입을 준비했다. 그러나 청강생으로 들었던 대학 강의는 오만한 당시의 나에게 기대 이하였다. 캠퍼스 밖의 현실 세상에서 직접 경험하며 배우는 것이 비싼 대학 등록금을 아끼는 방법이라 생각했다.

나의 삶을 이끈 또 하나의 빛은 음악이었다. 최근 유네스코 지정 음악도시가 된 통영에서 살아온 나를 키운 '팔할'은 바다이다. 어선에 맹렬히 부딪히는 파도는 리듬을 만들었다. 그 위에 생존의 그물을 끌어올리는 선원들의 구령은 새로운 비트로 바다에 울렸다. 하루 종일 바다를 감상하고 집에 들어오면 좁은 방 한 켠에 비틀즈, 메탈리카, 퀸, 너바나가 인생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나도 그런 이야기가 되고 싶었다.

예상대로 부모님은 반란을 허용치 않았고, 남다른 길을 걷는 선구자라면 응당 그래야한다는 듯이 나는 출가를 결의하고 서울로 왔다.

하지만 나의 반란은 오래 가지 못했다. 수능 시험 3일전, 서울의 친구 하숙방에 기생하고 있던 나를 친형이 찾아냈다. 형은 집에 다시 돌아오라며, 수능 시험만 보면 괜찮은 일자리를 마련해 주겠다고 제안을 했다. 대졸자도 취직이 어려운 시기라 수입 없이 친구에게 고생만 시키던 나에게 솔깃한 이야기였다.

분명, 시험만 보면 된다고 했다. 잘 봐야 한다는 게 아니었다. 대충 시험을 본 뒤 일자리를 얻으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짧은 반란을 어설프게 끝내고 '작전상 후퇴'라 자위하며 집에 복귀했다. 그리고 느긋한 마음으로 수능 시험을 봤는데, 긴장을 안 하고 봐서인지 결과가 나쁘지 않았다. 그러자 형은 두 번째 딜을 했다. 대학 입학시험만 보면 한 달 치 생활비도 준다는. 그래서 나는, 어쩌다 대학생이 되었다.

 김영동 프로젝트 <다른 미래를 향해> 앨범커버

김영동 프로젝트 <다른 미래를 향해> 앨범커버 ⓒ 김영동


음악, 잠시 멈춤 그리고 재생

내가 입학한 대학교 앞에는 자그마한 사회과학 서점이 있었다. 정의의 피가 심장에 가득한 학생들이 거리에 모이는 날이면 그 서점에는 학생들이 잠시 맡기고 간 가방들로 가득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가방들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여전히 세상엔 분노하고 저항할 일들이 가득한데, 그 많던 가방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나는 가방이 있던 자리를 다시 채워가고 싶었다. 그래서 음악을 하며 사는 것은 후일로 미루었다.

그리고 10여년이 흘렀다. 그 사이 나는 불량 국민이 돼있었다. 등록금대출, 아버지 병원비 등으로 이 나라의 늘어나는 가계 부채비율에 일조하고 있었고, 비행기 삯이 없어서 대통령님이 바라듯 중동까지 가서 일자리를 갖지도 못했다. 다만, 이 나라 대졸자 중 가장 많은 이들이 종사하는 학원강사로 한동안 지낼 뿐. 그마저도 입시지옥이라는 헬조선의 한 불구덩이에 봉사하는 것같아 그만두었다. 그저, 이윤 창출에 도움 안 되는 소설과 시 따위나 끄적거리는 비생산적 인구일 뿐이었다.

한숨이 나의 언어가 된 날들이 이어졌다. 작년 그 날도 그런 한숨 자욱한 날들 중 하나였다. 정부에서는 소비 지출 증대를 통해 경제활성화를 꾀한다며 5월 6일을 임시공휴일로 정했다. 소비할 돈이 없던 나에게는 그냥 보통 날이었다. 한마디로, 알쓸신잡(알고 있어도 쓸데없는 신기루같은 잡날)이다. 사막화되어가는 나의 영혼에 예술 한 바가지 부어 응급조치라도 할 생각에 국립현대미술관을 혼자 찾았다.

한국 현대 사진의 흐름을 보여주었던 그 전시장의 온도는 적당했다. 조금만 걸어 올라가면 있는 청와대로부터 우주의 기운도 적당히 느껴졌다.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의 중간에 끼어 어린이와 어버이들이 가득한 미술관에 어린이도 아니고 어버이도 아니고, 자랑스런 한국인도 아니고 몰락한 나라의 이민자도 아닌 내가 끼어 있었다. 군사시설 기무사를 헐고 지어올린 미술관에서 총성의 빈 자리를 채우는 빛나는 무언가에 취해 한참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나는 노래 한 곡을 만들었다.

<다른 미래를 향해>

작사/곡_ 김영동
노래_ 김영동 프로젝트 (객원보컬 예아)

긴 어둠을 접어서
큰 날개를 만들지
먼 그 곳을 향해서
난 오늘도

아니라는 그건 아니라는
퍼 붓는 비 구름보다
높이 날아서

엔진을 켜
열망의 엔진을 켜
다른 미래를 향해

긴 여행의 시작
저 절망을 넘어
깨지 않는 꿈을 따라서
깨지 않는 꿈을 따라서
미랠 향해

내 영혼의 바다엔
늘 새로운 해가 떠
밤 암흑을 물들인
내 아침바다

잊으라는 이제 잊으라는
몰아치는 해일보다
깊이 흐르며

썩지않는 질문을 던지리라
난 어디로 가는지

긴 여행의 시작
저 절망을 넘어
깨지 않는 꿈을 따라서
깨지 않는 꿈을 따라서
미랠 향해

나의 삶 그리고
너의 손을 꼭 잡고
다른 미랠 만나

긴 여행의 시작
저 절망을 넘어

다른 미래를
다른 미래를
다른 미래를 향해

나는 작년 8월부터 '김영동 프로젝트'라는 팀명으로 음악활동을 시작했다. 내가 작사, 작곡을 하고 객원보컬이 노래하는 팀이다. 그리고 올해 4월12일, 세월호 참사 추모곡 '봄꽃',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위한 노래 '나비소녀'와 함께 이 노래 '다른 미래를 향해'를 디지털 싱글앨범으로 묶어 발표했다.

이 노래는 내가 한숨에 질식당하지 않게 한 노래이다. 그래서 나를 살린 내 인생의 BGM이다. 더불어, 사회의 한숨을 불꽃으로 피워낸 광장의 시민들에게 헌정하는 노래이기도 하다. 물론, 아직 부족한 사운드들 때문에 내놓기 많이 민망하기도 하다. 하지만 멈췄던 음악을 다시 시작한 지금이 좋다. 파도가 세상의 일이라면 그물을 올리며 비트를 만드는 것은 나의 일이다. 높이 날지 못하더라도 즐겁게 날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10년간 병과 싸우다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씀드리려 한다.

"저, 한숨 안 쉬고 음악하며 살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내 인생의 BGM' 공모글입니다.
김영동 김영동프로젝트 다른미래를향해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예혁'이란 이름으로 활동하며 노래 만들고 글을 쓰고 지구를 살리는 중 입니다. 통영에서 나고 서울에서 허둥지둥하다가 얼마 전부터 제주도에서 지냅니다.

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