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셀로나가 완전히 침몰했다. 바르셀로나는 스페인 프리메라리가(라리가) 개막 직전에 라이벌 레알 마드리드에게 굴욕적인 패배를 당했다. 완벽한 팀으로 거듭나고 있는 레알은 바르셀로나를 완파하면서 기분 좋은 스타트를 끊었다.
17일 오전 6시(한국시각) 스페인 마드리드에 위치한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경기장에서 2017 스페인 슈퍼컵 2차전이 열렸다. 스페인 슈퍼컵은 지난 시즌 라리가 우승팀과 컵 대회인 스페인 국왕컵 우승팀이 리그 개막을 앞두고 맞붙는 이벤트성 경기다. 대회 자체는 이벤트적 성격을 띠고 있지만 레알 마드리드(이하 레알)와 FC 바르셀로나(이하 바르사)가 만나면 얘기는 달라진다. 프리시즌 경기에서도 치열하게 맞붙는 두 팀이기에 타이틀이 걸린 대회인 슈퍼컵을 임하는 자세는 양 팀 모두 진지했다.
바르사의 홈구장인 캄프 누에서 열린 1차전은 레알의 3-1 승리였다. 1차전 전반전은 팽팽하게 진행됐지만, 후반전 초반 피케의 자책골이 터지면서 레알로 급격하게 판세가 기울었다. 후반 31분 리오넬 메시의 패널티킥 동점골이 터지긴 했지만, 교체 투입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와 마르코 아센시오의 연속골에 바르사는 무너졌다. 바르사 입장에서 두 점 차이로 벌어진 점수 차보다 크게 다가온 것은 레알과의 경기력 차이였다. 특히 레알의 에이스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는 이스코와 레알 특유의 빠른 역습에 공포감을 느꼈다.
네이마르의 PSG 이적과 지지부진한 영입으로 시작 전부터 격차가 보이긴 했지만, 라이벌 클럽에게 홈구장에서 두 점 차 패배를 당한 것은 바르사에게 굴욕이었다. 2차전에서 복수가 필요했다. 바르사의 신임 감독 에르네스토 발베르데는 변화를 택했다. 바르사의 기본 전형이 4-3-3 포메이션을 포기하고 3-5-2 포메이션으로 2차전에 임했다.
골키퍼 장갑은 여전히 테어 슈테켄이 꼈고, 쓰리백 라인은 움티티-피케-마스체라노로 구성했다. 미드필드진은 알바-고메즈-부스케츠-라키티치-세르지가 나섰고, 공격진에는 수아레즈와 메시가 출격했다. 한편 레알은 1차전 퇴장으로 호날두가 결장함에도 이스코와 카세미루을 벤치에 앉히는 여유 속에 4-3-3 포메이션을 들고 나왔다. 케일러 나바스가 최후방을 지켰고, 포백은 마르셀로-라모스-바란-카르바할이 나섰다. 중원은 코바치치를 중심으로 모드리치와 크로스가 역삼각형 형태를 이뤘고, 공격진은 아센시오-벤제마-바스케스가 낙점을 받았다.
'4분'의 굴욕발베르데 감독의 의도는 명확했다. 2차전에서는 1차전 승부의 결정적인 패인이었던 중원 싸움에서 밀리지 않겠다는 의중이 선발 라인업에서 드러났다. 기본적으로 미드필더 숫자를 다섯 명으로 늘려서 절대적인 수적 우위를 점하려 했다. 오른쪽 윙백으로 알레이스 비달 대신 중앙 미드필더 성향이 강한 세르지 로베르토를 기용하면서 중원에서의 영향력을 기대했다. 또한 네이마르의 이탈로 확실한 왼쪽 측면 공격수를 보유하지 못한 것도 쓰리톱 대신 투톱을 선택하게끔 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단순히 숫자를 늘려서 공략할 정도로 레알의 중원은 허술하지 않았다. 레알은 경기 시작 휘슬과 동시에 물러서지 않고 바르사 진형에서 강한 압박을 시도했다. 레알의 전투적인 전방 압박에 바르사 선수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고 쉽게 공을 잃었다.
일단 중원의 질 차이가 컸다. 카세미루보다 수비력을 떨어지지만 공을 잘 다루는 코바치치 기용이 레알의 지네딘 지단 감독의 '신의 한수'였다. 바르사는 중원 지역에서 공을 잃으면 다시 소유권을 찾기 위해 도전했지만 레알 중원 삼인방의 탈압박 능력은 바르사의 재압박을 벗어나기에 충분했다. 바르사 중원에 배치된 세 선수는 크로스-코바치치-모드리치 라인의 패스 워크와 탈압박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중원이 힘을 잃다보니 양 쪽 측면에 배치된 윙백들은 순식간에 잉여 자원으로 전락했다. 특히 왼쪽 윙백 호르디 알바는 빌드업을 위해 높은 위치로 올라갔다가, 바르사가 중원에서 공을 뺏기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바르사 선수들간의 간격은 자꾸 벌어졌고, 그 공간에서 레알의 공격 자원들은 자유롭게 뛰어놀았다. 정확히 4분 동안 레알의 압도적인 퍼포먼스와 바르사의 우왕좌왕이 이어졌고, 자유를 얻은 '원더 키드' 아센시오는 '원더골'을 터뜨리며 레알의 아름다운 4분의 마침표를 찍었다. 90분 경기를 다 볼 필요가 없을 정도로 4분 만에 레알의 강점과 바르사의 약점이 모두 드러났다.
실패로 끝난 발베르데의 선택레알의 압도적인 퍼포먼스에 대응하기 위해 발베르데는 첫 번째 선택을 내렸다. 공격수 메시의 활동 범위를 후방 지역까지 늘려 절대적으로 밀리는 중원 영향력 회복을 노렸다. 메시의 중원 가세는 곧장 바르사에게 힘을 줬다. 드리블과 탈압박에 모두 능한 메시의 존재감으로 인해 바르사는 어느 정도 레알과 중원에서 힘을 겨룰 수 있게 됐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메시의 공격진 이탈로 공격수는 루이스 수아레즈만 홀로 남게 됐다. 수아레즈 혼자서 패스를 받아 득점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동료들의 지원이 필요했다. 양 측면의 알바와 세르지가 전보다 다소 높은 라인에서 수아레즈의 공격을 돕기 시작했다.
약점인 중원을 강화하고 가능성이 있는 측면에서 승부를 보겠다는 바르사의 선택은 나쁘지 않았다. 허나 간과한 것이 있었다. 메시는 중원 지역에서 수비에 능한 선수가 아니다. 바르사가 공격을 하다 레알에게 공을 내주면 레알 미드필더 삼인방이 바르사 중원을 농락하는 모습이 이어졌다.
더 큰 문제는 공격 지원에 나섰던 알바와 세르지의 수비 가담이 전보다 더 늦어졌다는 점이다. 두 윙백의 공격 가담으로 바르사의 점유율은 다소 늘었지만, 공격이 실패하면 후방에는 광활한 공간만이 남았다. 넓은 공간은 역습에 능한 레알에게 훌륭한 먹잇감이 됐다. 레알의 양 측면 공격수 아센시오와 바스케스는 충분한 공간 속에서 바르사의 스토퍼 마스체라노와 움티티를 돌파했다.
위기감을 느낀 발베르데는 두 번째 선택을 가져갔다. 강하게 흔들리는 팀의 안정을 위해 양 쪽 윙백을 수비적으로 내려 '파이브백'을 구축했다. 하지만 악수였다. 알바와 세르지의 후퇴는 레알의 풀백인 마르셀로와 카르바할의 전진을 가져왔다. 마르셀로와 카르바할은 세계 최고의 공격력을 가진 풀백들이다(물론 수비도 세계 최고다). 두 풀백의 가세로 레알의 측면은 한층 강해졌다.
결국 추가골은 레알의 강해진 측면에서 비롯됐다. 후반 39분 마르셀로가 정확한 땅볼 크로스를 벤제마에게 배달했고, 벤제마는 환상적인 터치 이후의 깔끔한 마무리로 골을 신고했다. 바르사 선수들이 더 많았지만 벤제마는 크게 방해받지 않았다. 파이브백 자체에 익숙하지 않은 바르사 수비진과 미드필더들은 자신의 마크맨을 찾지 못하고 벤제마의 플레이를 쳐다보기 바빴다.
일말의 희망은 남긴 후반전전반전을 통해 그동안 팽팽했던 두 팀의 관계는 적어도 이날 경기에서는 이제 상하 관계가 됐다. 그대로 있다가 바르사는 2-0 스코어를 감사해야 할 정도로 크게 무너질 공산이 컸다. 때문에 참패를 면하기 위해 바르사는 실리적인 자세로 후반전을 임했다.
후반 5분 만에 바르사는 수비의 핵 피케 대신 오른쪽 풀백 넬슨 세메두를 투입했다. 수비 라인은 포백으로 전환됐고 미드필드진은 세르지가 오른쪽, 안드레 고메즈가 왼쪽 측면에 위치하면서 일(一)자 라인을 구축했다.. 전형적인 4-4-2 포메이션으로 변화를 택한 바르사였다.
어찌보면 바르사 입장에서는 가장 참혹한 순간이었다. 그동안 바르사는 압도적인 경기력을 바탕으로 4-4-2 포메이션의 '버스 두 줄'을 뚫는 강자였다. 상대팀에게 강제로 버스 두 줄을 세우게 만들었던 바르사의 영광이 라이벌 팀에게 대패를 피하고자 버스 두 줄을 오히려 세우는 굴욕으로 바뀌었다. 레알과 바르사의 정권 교체를 완전히 대변하는 장면이었다.
그래도 4-4-2 포메이션 전환의 효과는 있었다. 기본적으로 8명이 간격에 맞춰 수비 진형을 구축하니 레알의 공격진도 쉽게 그 틈을 공략할 수 없었다. 단순히 수비 지역으로 내려 앉지 않고 적절하게 전방 압박을 섞어 전반전보다 쉽게 수비에 성공했다. 신입생 세메두가 준수한 활약상을 보여줬고, 이날 바르사의 미드필더 선발 라인업에서 유일하게 전진 드리블에 능한 세르지가 경기력을 되찾으면서 한 때 레알의 골문을 위협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미 무너진 경기를 되돌리기에는 늦었다. 슈테켄 골키퍼의 선방만이 종종 시도되는 레알의 효율적인 공격을 막아냈다. 바르사는 후반 중반부터 강한 전방 압박으로 상대를 잠시 당황시켰으나, 나바스라는 훌륭한 골키퍼와 골대 불운을 넘지 못했다. 레알 선수들은 남은 시간 동안 즐겁게 경기장을 누볐고, 교체로 들어온 이적생들과 가볍게 발을 맞추며 경기를 마쳤다. 반면 바르사는 승리에 대한 모든 의지를 잃은 채 표류하며 종료 휘슬을 기다렸다.
그나마 바르사에게 위안이 되는 부분은 슈테켄 골키퍼의 선방쇼와 세르지의 경기력이었다. 세메두와 부스케츠가 경쟁력을 보여줬고, 메시도 종종 차이를 만들어냈다. 지난 시즌 간혹 활용해 쏠쏠한 재미를 봤던 4-4-2 포메이션의 가능성도 가늠했다. 다만 일말의 희망보다 레알에게 입은 상처가 더 큰 것이 바르사에게 씁쓸함을 안겨준다.
바르사는 패배의 원흉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총체적인 난국 속에 있다. 발베르데 감독의 역량과 메시의 천재성만으로 다가올 시즌을 버텨내기에는 한계가 명확하다. 작별한 네이마르의 대체자 영입이 성사되면 상황은 다소 바뀌겠지만, 네이마르가 보여줬던 능력을 새로운 선수에게 기대하는 것은 과도한 욕심이다.
현재 바르사와 레알 사이에 크나큰 간극이 생긴 것의 원인은 확실하다. 바르사는 주축 선수들의 노쇠화를 탓하지만 레알의 핵심 선수들의 나이도 비슷한 것이 사실이다. 주축 선수들의 문제가 아니다. 레알은 베테랑 선수들이 중심을 잡아주고, 이스코와 아센시오 등 젊은 선수들이 본인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반면 바르사는 지난 몇 년 간 좋지 않은 이적 시장을 보냈고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는 중이다. 젊은 선수들의 동시다발적인 급성장이 없으면 바르사는 네티즌들의 조롱처럼 '몰락셀로나'가 될 가능성이 높다. 바르사가 남은 여름 이적 시장의 태풍의 눈이 될 것은 자명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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