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동감> 공식 포스터.

영화 <동감> 공식 포스터. ⓒ 한맥영화


비슷하지만 다른 리듬으로 수십 년간 발전을 거듭해온 두 세계가 있다. 하나는 1990년대 후반에 이르러 중흥의 전기를 맞이한 한국 영화계이고, 다른 하나는 세계 영화계를 선도하며 끊임없이 혁신을 거듭해온 미국 할리우드다.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고 한국 극장가에선 치열한 경쟁자이기도 했던 두 영화계가 기묘하게 교차한 순간을 오늘 아래에 소개하려 한다.

전과 전혀 다른 세상이 열릴 것이라는 기대가 팽배했던 2000년. 닮은 듯 다른 두 편의 영화가 한국 관객을 찾았다. 하나는 유지태·김하늘의 열연과 임재범이 부른 노래 '너를 위해'로 유명한 <동감>, 다른 하나는 데니스 퀘이드와 제임스 카비젤이 주연한 <프리퀀시>다. 이들 영화는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대륙 양편에서 제작됐고 멜로와 SF 스릴러라는 장르적 차이가 있었음에도 표절 논란이 일 만큼 유사한 부분이 많아 눈길을 끌었다.

<동감>은 1979년과 2000년을 잇는 멜로 드라마다. 1979년에 사는 여대생 소은(김하늘 분)은 우연히 고물 무선통신기기를 하나 얻는다.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이 기계에서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무선기를 통해 그 목소리의 주인공과 이야기를 나누던 소은은 그가 자신과 같은 대학교에 다닌다는 것을 알고 그와 시계탑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한다.

소은과 만나기로 약속한 남자는 2000년에 사는 대학생 지인(유지태 분)이다. 무선통신을 즐기던 지인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소은과 통신을 하게 된 것인데 서로에게 호기심을 느낀 둘의 약속이 거듭 엇갈리며, 둘은 상대가 자신과 같은 시대에 살고 있지 않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깨닫는다.

영화는 21년의 세월을 초월해 통신을 이어가는 둘의 모습을 통해 두 시대 청춘의 사랑과 우정, 삶을 대하는 방식을 이야기한다. 영화가 개봉했을 당시 많은 이들이 1979년의 풍경에 향수를 느꼈다지만 <동감>이 한국 영화계가 낳은 명작 가운데 한편으로 자리한 오늘에 이르러서는 2000년 당시의 모습을 추억하는 젊음도 적지만은 않은 듯하다.

<동감>과 <프리퀀시>, 두 명작의 기묘한 만남

 영화 <프리퀀시> 공식 포스터.

영화 <프리퀀시> 공식 포스터. ⓒ 시네마서비스


그레고리 호블릿의 <프리퀀시>는 미국에선 <동감>보다 한 달 먼저, 한국에선 여섯 달 늦게 개봉한 영화다. 30년을 가로질러 1969년의 아버지와 무선통신을 하는 아들 존(제임스 카비젤 분)의 이야기를 다뤘다. 지난 해 인기리에 방영된 tvN 드라마 <시그널>을 연상시키는 설정이다. <프리퀀시>는 이런 설정 영화의 원조 격이며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깊은 외로움 속에서 살던 존은 아버지의 서른 번째 기일을 하루 앞두고 오래된 기계 하나를 발견한다. 소방관이던 아버지가 즐겨 쓰던 무선기기로 존은 이를 통해 그토록 보고 싶었던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는 신기한 경험을 한다. 믿을 수 없는 사실에 둘은 서로의 존재를 의심하기도 하지만 차츰 서로가 제 아들이며 아버지임을 깨닫고 마음의 문을 연다.

아들은 통신을 통해 다음날 있을 아버지의 죽음을 막아낸다. 하지만 그로부터 다른 사건이 뒤틀리고 또 다른 비극이 잉태된다. 존은 아버지와 무선통신을 이어가며 새롭게 생겨난 비극을 막아내고자 분투한다.

<동감>과 <프리퀀시>는 무선통신기기로 수십 년 전 누군가와 통신을 하게 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뤘다. 한 편은 잔잔한 멜로드라마이고 다른 한 편은 긴장감 있는 SF 스릴러로 상당한 차이가 있지만, 그보다는 유사점이 두드러진다. 타임머신을 통해 시공간을 전격적으로 오가는 영화는 많았지만 무선통신을 통해 두 시점이 통한다는 설정은 이전에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었다. 태평양 건너 두 영화가 불과 한 달의 차이를 두고 배급·상영된 건 그래서 신기하게 여겨졌다.

<군함도>와 <덩케르크>... 같지만 같지 않은

 영화 <군함도> 공식 포스터.

영화 <군함도> 공식 포스터. ⓒ CJ 엔터테인먼트


이후 두 세계는 오랫동안 각자의 길을 걸었다. 그리고 17년이 흐른 2017년에 이르러 두 세계는 다시 기묘하게 겹쳐졌다. 올여름 개봉한 두 편의 대작, <군함도>와 <덩케르크>에서였다. 둘은 각각 한국 영화계와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유명 감독이 연출했다는 점부터 유사하다. <군함도>는 류승완이, <덩케르크>는 크리스토퍼 놀란이 감독했는데 두 작품 모두 거대 영화사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최성수기 상영을 확정 지었다.

한국과 영국의 역사적 사건을 다룬 사극이란 점부터 다룬 시기가 1940년대 있었던 2차대전 당시라는 점도 비슷하다. 전쟁 그 자체보다는 전쟁이 개인의 삶을 어떻게 파괴하는지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 인물들이 전쟁이 낳은 참혹한 공간으로부터 고향으로 탈출하기까지의 이야기란 점도 닮았다. 2차 대전의 결정적 두 순간, 다이나모 작전과 일본에의 원자폭탄 투하 장면이 담겼다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다른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건 두 영화 속 인물들이 모두 배를 통해 탈출을 감행하며 그 배에 타기 위해 반드시 다리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군함도에서 조선 땅을, 덩케르크 해안에서 영국 땅을 바라보며 고국을 그리워하던 이들은 일본군과 독일군의 방해를 뚫고 배를 통한 탈출을 시도한다. 이들 앞엔 각기 다른 어려움이 놓여있는데 영화는 이 같은 상황을 인상 깊게 연출한다.

<군함도>의 주인공들은 경비병의 감시를 뚫고 석탄을 선적하는 시설을 다리 삼아 배에 오르려 한다. 영화는 주인공들이 일본군에 맞서 이 시설을 사수하는 과정을 클라이맥스로 삼는다. <덩케르크>에선 흘수(배가 물 위에 떠 있을 때 물에 잠겨 있는 부분의 깊이)가 깊은 배들이 얕은 해안으로 들어오기 어려워 바다로 길게 뻗은 잔교 위에서 병사들을 배에 태우는 장면이 의미 있게 등장한다. 병사들은 탈출을 위해 잔교 위에 늘어설 수밖에 없는데, 감독은 병사들이 적의 폭격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상황을 일종의 재난물처럼 연출했다.

2000년과 2017년, 두 세계가 만난 해

 영화 <덩케르크> 공식 포스터.

영화 <덩케르크> 공식 포스터.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불과 1주일의 격차를 두고 개봉한 서로 다른 세계의 영화가 이처럼 유사한 특징을 내보이는 건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단순한 우연으로 치부할 수도 있겠으나 17년 전 개봉한 두 영화와 함께 생각해보는 작업도 나름의 의미가 있을 듯하다.

돌이켜보면 17년 전 두 영화가 한데 얽혀 거론된 건 한국의 영화팬들에게 무척이나 자랑스러운 일이다. <쉬리> 이후 한국영화는 비로소 전성기로 들어서고 있었고 내용과 형식 모두에서 발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동감>은 <프리퀀시>와 비교해도 만듦새가 떨어지는 영화가 아니었을뿐더러 17년이 지난 오늘까지 영화 애호가 가운데서 종종 언급되는 명작으로 남았다.

그러나 오늘의 두 영화는 어떤가. <군함도>와 <덩케르크>가 노정한 차이는 단지 선택의 차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크고 무거워 보인다. 결정적인 전투의 순간에서 슬로모션이 난무하고, 주요한 인물들은 할 말을 죄다 쏟아놓고 한 명씩 죽어 나가는 그런 영화 한 편이 있다. 저편엔 새로운 화법으로 전쟁을 이야기하려 고심한 흔적이 역력한 작품이 있다. 이 두 편의 영화가 내보인 격차는 한국영화계와 할리우드라는 두 세계의 거리만큼이나 먼 것도 같다.

단 두 편의 영화로 두 세계의 오늘을 이야기하기엔 무리가 따르겠으나 2000년과 2017년 있었던 두 세계의 겹침이 준 감흥은 그토록 달랐다. 다음 두 세계가 겹치는 때가 온다면 나는 다시 어떤 이야기를 할까.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김성호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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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오마이뉴스 스타팀에서 방송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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