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로 조국 광복을 염원하다

노래로 조국 광복을 염원하다 ⓒ EBS


72주년이다. 그 어느 해보다도 '광복'이란 의미가 크게 다가왔던 올해의 광복절, 하지만 그 흔한 광복절 특집 드라마 하나 없이 영화 <암살> 재방과 한류 뮤직뱅크로 축하를 하는 시절이 되었다. 광복은 이제 그런 것일까? 세계 역사상 식민지의 기간 내내 독립 운동을 멈추지 않았던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무이하다는데, 과연 그 자부심을 현재의 우리는 제대로 알고 있기나 한 걸까? 이에 성실하게 답한 건 그래도 다큐밖에 없었다. 그 중에서도 음악을 통해, 그리고 독립 운동가들이 쓰던 암호를 통해 독립 운동을 살펴보고자 한 EBS <노래로 조국 광복을 염원하다>와 KBS 1TV <독립운동의 비밀 병기, 암호>는 주목할 만하다.

노래로 조국 광복을 염원하다

우리는 한국 혁명군/ 조국을 찾는 용사로다
우리는 한국 광복군/ 악마의 원수를 쳐물리자
나가! 나가! 압록강 건너 백두산 넘어가자     
- <압록강 행진곡> 박영만 작사, 한유한 작곡

방송을 통해 '나가, 나가 압록강 건너 백두산 넘어가자' 노래가 나오는데 가슴이 뜨거워졌다. 한국 광복군가였다는 이 노래는 70,80년대 학생 운동권에서 회자되던 노래이기도 하다. 이 노래를 부르면 당장이라도 압록강을 넘어 백두산을 넘을 만큼 열정이 차오르게 했던 노래다. 하지만 이 노래를 만든 주인공에 대해서는 정작 알려지지 않았다. EBS 광복절 특집 다큐 <노래로 조국 광복을 염원하다>는 <1부 망국의 노래, 깊이 생각>, <2부 중원에서 별이 되다>로 이를 다루었다.

 노래로 조국 광복을 염원하다

노래로 조국 광복을 염원하다 ⓒ EBS


다큐는 이제는 기록에서조차 희미해진 그 노래를 오늘날의 노래로 되살리려는 노력과 함께 진행된다. 항일 가요의 시작은 1914년 민족정신을 담은 최신 창가집으로 본다. 북간도 민족학교 광성중학교에서 발행된 이 창가집은 발행 1년 만에 일제에 의해 압수돼 내용이 남겨지지 못했다. 하지만 독립 운동 역사의 갈피갈피에 음악이 함께 했다. 1908년 만주로 독립 운동의 근거지를 옮긴 민족운동 세력이 명동학교를 설립하고 영국 국가의 곡을 차용하여 '아무런 일 겁낼 것 없구나 정신은 자유요 의기가 용감한' 교가를 만들었다. 이런 민족의 의분이 담긴 교가의 유래는 1899년 약관 21세의 안창호 선생이 평안남도에 최초의 사립학교인 점진학교를 세우며 '쾌하다, 장검을 비껴들었네, 오늘날 우리 손에 잡은 칼은 요동 만주에 크게 활동하던 동명왕의 칼이 방불하구나'라고 쓴 '격검가'에서 찾을 수 있다.

저기 정순이 쉬던데/ 피던 꽃 떨어지고
뻐국 색도 울고 가니/ 지났구나 봄철이  
- <거기 정순이 쉬는데>, 동해수부 작사, 외국곡

의기가 넘치는 곡만 있는 건 아니다. 3.1운동 당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다 처참하게 죽은 정순이란 여학생의 소식을 전한 미국의 민족신문 <신한일보> 기자였던 동해수부 홍언 선생은 정순의 슬픈 사연을 서정적으로 승화시킨 <거기 정순이 쉬는데>를 발표했다. 당시 음악들을 보면 '항일 의식' 고취를 중요시해 가사는 우리의 손으로 짓는 반면, 곡은 당시 사람들에게 익숙한 외국곡을 차용한 사례가 많았다. 이렇게 다큐는 당시 곡들의 특징과 함께, 동해수부나 한유한 등 곡을 만든 이들의 흔적을 찾아간다. 또한 독립운동 시기의 음악을 꾸준히 연구하다 작고한 고 노동은 교수의 <항일음악 330곡집>과 고등학교 교사를 하면서 평생을 일제 시기 음악 발굴에 헌신하겠다고 공언한 황선열 교사 등을 소개한다.

다큐를 통해 소개된 항일 음악들의 의의는 무엇일까. 일찍이 안창호 선생은 음악이 정서와 감흥을 울려 독립 운동의 투쟁심을 끌어내는 건 물론, 치료 효과조차 갖는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황선열 선생은 손으로 쓰여 입으로 향유된, 한국 문학의 빠져서는 안 되는 중요 장르라 정의 내린다.

 독립 운동의 비밀 병기, 암호

독립 운동의 비밀 병기, 암호 ⓒ KBS


독립 운동의 비밀 병기, 암호

20여 곡의 작사가로 항일 음악사에 이름을 남긴 도산 안창호 선생의 이름은 KBS 1TV에서 방영된 광복절 특집 다큐 <독립운동의 비밀 병기, 암호>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1930년대,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수감자들은 벽이나 나무 바닥을 두들겨 정보를 주고받았는데, 이것이 바로 다큐가 첫 번째로 소개한 '타벽통보법'이다. 하지만 만주와 미국 등 외국 생활을 오래 한 안창호 선생은 이 대화법을 몰랐고, 때문에 안창호 선생 방에서 신호가 끊기기 일쑤였다. 그런 안창호 선생에게 '타벽통보법'을 알려준 것은 옆방의 김정련 선생이었다. '타벽통보법'은 자음과 모음, 숫자 등을 주먹, 손가락, 손바닥을 이용하여 벽과 벽을 통해 전달하는데, '내일 오후 두시 만세 시위'라는 문장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23번의 타벽이 필요하다. 일제의 감시에서 이 타벽 통보법은 그만큼의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실제 안창호 선생에게 타벽 통보법을 전달하려다 걸릴 뻔한 김정련 선생은 스스로 똥물을 뒤집어쓰고 미친 척하며 암호를 지켜냈지만, 독방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해야만 했다.

다큐는 독립운동의 암호 연구에는 아이러니한 면이 있다고 말한다. 성공한 작전의 암호는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 작전의 성공은 곧 암호의 비밀 보장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니 암호 연구는 결국 실패한 작전, 기사 등을 통해 알려진 흔적을 통해 유추해 볼 수밖에 없는 한계를 지닌다.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1930년대 호서은행 불법 금융사기 사건이다. 당시 기사에 따르면, 일제는 암호 문서를 단서로 이 사기 사건을 발각해 1만 7천 원을 회수했다. 호서은행은 당시 충남의 대표적인 은행이었다. 겉으로 드러난 사건은 미곡상 최석영이 서류를 위조하여 여러 은행에서 불법으로 대출을 받은 사건이지만, 그 뒤에는 고향 예산에서 독립 운동자금을 모으려고 했던 독립운동가 신현상이 있다. 일제는 이 사건으로 중국 베이징 등지에서 신현상 외 5인을 체포했다.

 독립 운동의 비밀 병기, 암호

독립 운동의 비밀 병기, 암호 ⓒ KBS


중국 텐진 화평구 일본 조계지의 정실은호 일본 은행 금고가 대낮에 털린 사건에서 활약한 건 암호 '닭다리'라 칭해졌던 권총이었다. 또한 1920년대 만주 독립운동의 중심이었던 우당 이회영 선생이 고국에 보낸 서신에 등장한 '새우젓', '골뱅이젓'은 당시 독립운동 자금을 위해 접촉할 사람들의 별명이었다. 당시 친일파는 모이를 주면 앞뒤를 가리지 않고 덤빈다 하여 꿩이라 하거나, 밀정은 여우라는 식으로 빗댄 은어를 흔히 사용했다.

이런 은어는 1921년 일제에 의해 발각된 후 보다 체계화되어갔다. 일본 외무성에 남겨진 자료 중 가장 오래된 1919년 2월 28일 자료에 따르면, 독립운동 암호는 자음과 모음을 숫자로 표시하는 식으로 변화했고 3.1만세 운동 이후 보다 고도화되어 갔다. 일본의 감시와 검거가 치열해지는 만큼 암호체계도 서신용-전보용으로 분화되고, 자릿수도 두 자리에서 세 자리로 복잡해졌다. 변화의 주기가 점점 짧아진 것도 특징이다.

실패한 작전을 통해 유추해본 비밀 병기 암호는 한 편의 첩보 영화 소개 프로그램처럼 흥미진진했다. 해방의 순간까지 끊임없이 일제에 항거했던 우리 선열들의 치열한 결과물로써 암호만큼 명확한 증거도 없을 것이라는 걸 다큐는 여실하게 보여준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이정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5252-jh.tistory.com)와 <미디어스>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노래로 조국 광복을 염원하다(E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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