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보통 자신의 기억을 좋은 쪽으로 미화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흑역사나 불리한 사실관계라 할지라도 어떻게든 자기한테 유리하게 해석하거나 좋은 의미를 부여하려고 노력합니다. 임의로 기억을 잊어버리기도 하지요.

이런 자기합리화와 선택적 기억 능력은 어쩌면 인간이라는 종이 생존하는 데 필수적인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과거의 불편한 기억을 모두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면 거기서 나온 죄책감과 우울증에서 벗어날 수 없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영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의 한 장면. 주인공 토니는 젊은 시절 첫사랑 베로니카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다.

영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의 한 장면. 주인공 토니는 젊은 시절 첫사랑 베로니카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다. ⓒ CGV아트하우스


이 영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주인공 토니(짐 브로드벤트)가 겪는 일들을 통해 기억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은퇴 후 빈티지 카메라 상점을 운영하는 그는 스마트폰도 쓰지 않는 다소 고지식한 노인입니다. 어느 날 첫사랑이었던 베로니카의 어머니 사라의 부고를 전하는 편지를 받게 되고, 그녀가 자신에게 일기장을 하나 남겼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 일기장은 고등학생 시절 토니의 절친한 친구였던 아드리안의 것이었죠. 토니는 이것을 손에 넣기 위해 베로니카와 연락하려 애씁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돌봐야 할 현재의 일상도 있습니다. 이혼한 전처와의 사이에 임신한 딸이 하나 있는데, 전처가 발을 다쳐서 출산 준비를 하는 딸을 그가 직접 뒷바라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와중에 토니는 전처를 만날 때마다 자신과 베로니카, 아드리언 사이에 얽힌 이야기들을 하나씩 꺼내 놓습니다.

이 영화는 2011년 맨부커 상을 받은 영국 작가 줄리언 반즈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입니다. 줄리언 반즈는 < 10과 1/2장으로 쓰는 세계 역사 > <내 말 좀 들어 봐> <플로베르의 앵무새> 등 대표작들이 국내에 모두 번역돼 있어 현대 영국 문학에 관심 있는 독자들에게 친숙한 작가죠. 서로 다른 관점을 교차시키거나 고전을 재해석하는 방식으로, 이미 벌어진 과거의 사실 역시 현재의 우리 삶만큼 유동적이며 아이러니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데 능합니다.

아름다운 추억 속의 비밀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토니가 털어놓는 과거의 기억들입니다. 매혹적인 연인 베로니카와 빛나는 추억, 감수성 예민하고 무척 똑똑했던 아드리언과의 우정이 빚어내는 이중주는 영화의 전반부를 수놓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기억 속에서 그토록 반짝였던 두 사람이 현재 토니의 삶 속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은퇴 후 시작한 빈티지 카메라 가게 정도가 베로니카의 흔적일 뿐입니다. 영화의 나머지 후반부는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된 것인지에 대해 좀 더 깊숙이 파헤칩니다.

 영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의 한 장면. 은퇴 후 빈티지 카메라 점포를 운영하는 토니(짐 브로드벤트)는 수십 년만에 첫사랑 베로니카(샬럿 램플링)와 재회하게 된다.

영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의 한 장면. 은퇴 후 빈티지 카메라 점포를 운영하는 토니(짐 브로드벤트)는 수십 년만에 첫사랑 베로니카(샬럿 램플링)와 재회하게 된다. ⓒ CGV아트하우스


토니 역할을 맡은 짐 브로드벤트는 영국을 대표하는 명배우답게 토니가 겪는 다양한 감정들을 섬세하게 표현합니다. 다소 주책맞게 질척거리는 모습부터 자신의 상황을 절실히 깨닫게 되는 순간의 내면 연기까지 모든 것이 아주 자연스럽습니다. 덕분에 관객은 맘 편히 토니라는 캐릭터에 감정 이입할 수 있습니다. 현재 시점의 베로니카 역할을 맡은 샬럿 램플링이나, 토니의 기억 속에서 사라 역할로 잠깐 나온 에밀리 모티머 역시 자기들의 이름값에 걸맞은 연기를 보여 줍니다.

토니와 베로니카의 젊은 시절을 연기한 빌리 하울과 프레야 메이버의 연기도 좋습니다. 토니의 억눌린 열정을 효과적으로 표현한 빌리 하울은, 또 다른 영국 작가 이언 매큐언 원작의 <체실 비치에서>(2018 개봉 예정)에서도 유사한 상황에 부닥친 남자 주인공 역할을 맡았습니다. <선샤인 온 리스>에서 주인공 데이비의 동생 역할로 얼굴을 알린 프레야 메이버는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의 베로니카를 매혹적으로 형상화합니다.

과거와 떼래야 뗄 수 없는 현재와 미래

흔히 '미래보다 과거를 더 많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늙은 것'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다가올 날들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말할 시간에, 과거의 좋았던 기억을 되뇌고만 있다면 늙었다는 말을 듣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하지만, 과거를 얘기하더라도 그때의 실패와 잘못을 되새겨 보다 나은 오늘과 내일을 위한 밑거름으로 삼을 수만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현재의 우리 모습은 우리가 지나온 삶의 궤적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미래에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지는 그 사람이 과거에 어떻게 살았고 또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들여다보면 예측이 가능해지죠.

이 영화 속의 토니도 수십 년이 지나 만난 베로니카에게 옛날하고 똑같다는 얘기를 들어야 했습니다. 사람은 그리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토니는 예기치 않게 날아온 유언장 덕분에 자신의 과거를 반추하고 기억을 교정할 기회를 얻습니다. 그리하여 '현재'의 소중한 사람인 전처, 그리고 딸과의 관계에서 작은 발전의 실마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렇듯 인간을 규정하는 인과 관계의 쳇바퀴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변화가 필요하고, 그것은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직시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자꾸만 과거를 미화하고 합리화하고 싶은 본능을 잠시 거두고, 나의 진짜 문제가 무엇이었는지 제대로 따져 보아야 합니다. 그게 자기 힘만으로 도저히 안 된다면 믿을 만한 주변 사람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렇지 못한 경우의 좋은 예는 뻔한 오판과 잘못을 반복하는 유력 정치인이나 기업가, 전문직 종사자들입니다. 이들이 점점 수렁에 빠지게 되는 것은, 자신의 영광스러운 과거만을 껴안고 살기 때문입니다. 주변에 그들의 한계와 잘못을 일깨워 주는 직언을 할 사람이 없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미 그런 사람은 대부분 다 정리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가 과거의 교훈을 거울삼아 보다 나은 현재와 미래를 설계하는 것이듯, 자신의 과거사를 되짚어 보는 것도 이제까지와는 다른 사람이 되기 위해서여야 하지 않을까요? 이것이 바로 차분하면서도 흥미진진한, 이 영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가 우리에게 건네는 제안일 것입니다.

 영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의 포스터. 맨부커 상 수상작인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이 작품은 인간의 기억과 변화하고자 하는 의지에 초점을 맞춘다.

영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의 포스터. 맨부커 상 수상작인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이 작품은 인간의 기억과 변화하고자 하는 의지에 초점을 맞춘다. ⓒ CGV아트하우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권오윤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cinekwon.wordpress.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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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책에 관심 많은 영화인. 두 아이의 아빠. 주말 핫케익 담당.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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