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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얼음 속 뜨거운 불꽃처럼 살다가 스물일곱에 우리 곁을 떠난 록밴드 ‘도어스’의 보컬리스트 짐 모리슨.
 차가운 얼음 속 뜨거운 불꽃처럼 살다가 스물일곱에 우리 곁을 떠난 록밴드 ‘도어스’의 보컬리스트 짐 모리슨.
ⓒ 이찬욱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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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초반부터였다. 프랑스 파리로 향하는 비행기를 타고 싶었던 건.

3만5천 점의 고대와 현대 미술품을 전시하고 있다는 '루브르 박물관'이나 고흐와 모네 등 19세기 인상파 화가들의 명작이 줄줄이 내걸린 '오르세 미술관'이 궁금해서가 아니었다.

파리를 상징하는 불 밝힌 에펠탑 아래서 인증사진을 찍거나, 몽마르트르 언덕 '화가의 거리'에서 싸구려 초상화의 모델이 되고 싶어서는 더더욱 아니었다. 20년 넘는 시간 동안 내게 파리는 '페르 라셰즈'(Pere Lachaise) 혹은 '짐 모리슨'(Jim Morrison·1943~1971)과 등호였다.

1960년대 활동한 록밴드 도어스(The Doors)의 보컬리스트였던 짐 모리슨은 절망과 희망, 빛과 그림자, 고통과 환희, 삶과 죽음…. 이 모든 심각한 단어의 절정을 살아냈다.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질주하고자 했던 영혼이 지구에서 증발했을 때 그의 나이 겨우 만 스물일곱. 삶의 허리가 가혹하게 부러진, 두말 할 것 없는 요절(夭折)이었다.

<플래툰>과 < JFK > 등의 영화를 통해 1960년대 미국의 역사에 천착해온 올리버 스톤(Oliver Stone) 감독도 젊은 시절부터 짐 모리슨에 매료돼 있었다.

"차가운 얼음 속에서 뜨겁게 타고 있던 불꽃"이라 불러도 좋을 짐 모리슨의 굴곡 많았던 일대기를 그려내고자 한 올리버 스톤의 영화가 바로 <도어스>'(제작 1991년)다.

파리 거리에선 짐 모리슨의 20대를 떠올리게 하는 거리의 예술가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파리 거리에선 짐 모리슨의 20대를 떠올리게 하는 거리의 예술가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 홍성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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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 만난 '페르 라셰즈'를 찾아 지하철에 오르다

우울한 얼굴과 곱슬거리는 긴 머리칼을 가졌던 짐 모리슨의 인생이 독한 위스키와 마리화나, 마구잡이의 난교(亂交)만으로 이뤄졌을 것이라 착각해온 관객들은 이 영화에 경악한다.

사실 짐 모리슨은 10대 때부터 프랑스의 표상주의 시인 랭보와 독일의 철학자 니체의 책을 옆구리에 끼고 살던 조숙한 문학청년이었다. 어릴 적 여행에서 본 아메리카 인디언의 죽음을 평생 잊지 못했던 그는 누구도 쉽게 볼 수 없는 삶의 이면(裏面)을 꿰뚫어 본 사람이다.

제 또래 군인들이 억울하게 끌려간 베트남전에서 다른 나라 젊은이들을 죽이거나, 반대로 죽어가는 '냉전의 비극'에 마음 아파했던 짐 모리슨은 '반전(反戰)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짐 모리슨이었으니 '광기'로 가득한 1960년대를 정면에서 마주 보기 힘들었을 터. 자학과 다를 바 없는 폭음과 보통의 상식으로는 이해될 수 없는 무대에서의 기행(奇行·짐 모리슨은 수천 명의 관객과 경찰들이 지켜보는 콘서트에서 바지를 벗어버리기도 했다)은 그가 1960년대를 견디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어쨌건, 미국인이었던 짐 모리슨은 프랑스 파리에서 죽는다. 해군 제독이었던 아버지는 아들의 시체 인수를 거부했고, 짐의 시신은 파리에 묻힌다. 그곳이 바로 '페르 라셰즈 공동묘지'다.

올리버 스톤의 영화 <도어스>의 마지막 장면은 카메라가 짐 모리슨의 무덤을 향해 천천히 다가가는 2~3분의 과정을 담고 있다. 배경음악으론 알비노니(Albinoni)의 '아다지오'(Adagio)가 비장하게 흐른다.

그 영화를 본 게 스물한 살 때였던가? 25년의 시간이 흐르고서야 짐 모리슨의 묘지를 찾아가게 된 내 심정은 첫 키스를 앞둔 열일곱 소년처럼 떨리고 있었다. 숙소 인근 브레게 사방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페르 라셰즈역을 향했다. 역에서 10여 분을 걸어가니 묘지의 입구가 보였다. 초여름, 파리의 새파란 하늘에서 갑작스레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밤처럼 어두워진 거리에서 심장은 더욱 세차게 뛰었다. "문학과 영화, 음악이 없다면 세상은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말하던 10대 소년이 자신의 우상을 마흔여섯 살이 돼서야 만나게 된 것이다. 비록 짐 모리슨이 말 한마디 나눌 수 없는 지상의 사람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 가슴 떨림은 제어할 길이 없었다.

페르 라셰즈를 헤매다가 우연히 발견한 소설가 발자크의 무덤.
 페르 라셰즈를 헤매다가 우연히 발견한 소설가 발자크의 무덤.
ⓒ 홍성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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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사람들이 영원히 잊지 말아야 할 단어는 뭘까?

페르 라셰즈 공동묘지엔 짐 모리슨 외에도 수많은 예술가들이 잠들어 있다. 프랑스 소설가 오노레 드 발자크(Honore de Balzac)와 아일랜드 작가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 극작가인 동시에 배우로도 유명했던 몰리에르(Moliere)도 부침(浮沈)이 거듭됐던 고단한 생애를 그곳에 눕혔다.

페르 라셰즈는 규모 또한 상상력의 한계를 뛰어넘었다. 내렸다 그쳤다를 반복하는 소나기를 맞으며 3시간쯤을 헤매 다녔다. 그럼에도 그 지역의 10분의 1도 보지 못한 느낌이었다.

폐르 라셰즈는 공동묘지가 아닌 아름다운 조각들의 전시장처럼 느껴진다.
 폐르 라셰즈는 공동묘지가 아닌 아름다운 조각들의 전시장처럼 느껴진다.
ⓒ 홍성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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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르 라셰즈는 공동묘지가 아닌 아름다운 조각들의 전시장처럼 느껴진다.
 폐르 라셰즈는 공동묘지가 아닌 아름다운 조각들의 전시장처럼 느껴진다.
ⓒ 홍성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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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르 라셰즈는 공동묘지가 아닌 아름다운 조각들의 전시장처럼 느껴진다.
 폐르 라셰즈는 공동묘지가 아닌 아름다운 조각들의 전시장처럼 느껴진다.
ⓒ 홍성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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짙은 초록색 이끼가 낀 공동묘지의 오래된 조형물들의 미적 완성도를 보자면 페르 라셰즈는 공동묘지라기보다 조각 전시장에 가까웠다. 묘지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그날 처음 알았다.

그리고 사라졌던 태양이 어두운 하늘 구름을 헤치고 다시 모습을 드러낸 순간, 짐 모리슨의 묘지가 눈앞에 나타났다. 생각보다 작았고 의외로 초라했다.

프랑스 파리 ‘페르 라셰즈 공동묘지’에 자리한 짐 모리슨의 묘지.
 프랑스 파리 ‘페르 라셰즈 공동묘지’에 자리한 짐 모리슨의 묘지.
ⓒ 홍성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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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에 수만 명의 숭배자들이 찾아온다는 사실은 무덤 앞에 놓인 수천 장의 낡은 쪽지가 증명하고 있을 뿐이었다. 영어, 스페인어, 독일어, 프랑스어, 일본어, 중국어, 한국어, 심지어 크메르어와 태국어까지. 짐의 죽음을 슬퍼하는 메시지는 수십 개의 언어로 적혀 있었다.

같은 대상을 좋아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사람들은 쉽게 친해질 수 있다. '도어스'의 음악에 매료된 세계 각국의 젊은이들은 짐 모리슨의 묘지 앞에서 금방 친구가 됐다.

이스라엘에서 온 두 명의 청년은 기타를 연주하며 '피플 아 스트레인지'(People are Strange)를 불러 참배객들의 박수를 받았고, 몸 곳곳에 피어싱을 한 네덜란드 여대생은 내 스마트폰에서 흘러나오는 '웨이팅 포 더 선'(Waiting For The Sun)의 리듬에 맞춰 요정처럼 춤을 췄다.

브라질과 독일에서 페르 라셰즈를 찾아온 청년들과 짐 모리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친구가 됐다.
 브라질과 독일에서 페르 라셰즈를 찾아온 청년들과 짐 모리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친구가 됐다.
ⓒ 홍성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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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와 춤으로 추모할 대상이 있는 그들은 어느새 '우리'로 변해 있었다. 나 역시 어느 틈엔가 페르 라셰즈에서 펼쳐진 '기이한 축제'의 일원이 돼있었다. 청춘의 열기로 뜨거워진 짐의 무덤으로 한 줄기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 바람에 실려 온 짐 모리슨의 목소리를 우리는 분명히 들었다.

"열정을 버리지 않는 자에게 청춘은 영원하다. 해서, 나는 늙지도 죽지도 않을 것이다. 너희도 그런 삶을 살아라."  



태그:#페르 라세즈, #짐 모리슨, #프랑스, #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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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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