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열기가 식었지만 한동안 내 싸이월드 미니홈피에서는 나이에 맞지 않는 노래가 배경음악으로 흘러나왔다.

바로 '찔레꽃'과 '허공'이다. 부모님의 애창곡들이다. '찔레꽃'은 돌아가신 어머니의, 그리고 '허공'은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 15년을 혼자 살고 계신 아버지의 애창곡이다.

지금도 아버지는 가끔 조용필의 '허공'을 콧노래로 흥얼거리지만, 어머니의 애창곡인 '찔레꽃'은 다시는 들을 수 없는 노래가 됐다.

밤늦게까지 술을 마셨다. 어느샌가 어머니의 애창곡을 흥얼거리고 있다. 또 눈물이 났다. 이제는 어머니가 옥구슬 굴러가는 듯한 목소리로 부르는 '찔레꽃'은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문득 옛날 마을잔치에서 어머니가 부르던 그 노래가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나그네 위해 우물까지... '따뜻했던' 내 고향

내 고향 반곡리 170여 가구가 살던 내 고향 반곡리. 지금은 터만 남아있다. 사진은 지난해 추석에 찍은 사진.

▲ 내 고향 반곡리 170여 가구가 살던 내 고향 반곡리. 지금은 터만 남아있다. 사진은 지난해 추석에 찍은 사진. ⓒ 김동이


'찔레꽃'. 장사익의 '찔레꽃'도 이연실의 '찔레꽃'도 아니다. 1940년대 초 일제강점기 말 가수 백난아가 부른 찔레꽃이다. 한국적인 정서가 담겼다 해서 국민가요로까지 불린 노래다.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 나라 내 고향
언덕 위의 초가삼간 그립습니다
자주 고름 입에 물고 눈물 젖어
이별가를 불러주던 못 잊을 사람아


지금은 세종시로 바뀌어 조상 대대로 살았던 집의 위치조차 찾기 어려워진 내 고향 반곡리. 정확히는 충남 연기군 금남면 반곡리였다. 마을 밖을 감싸며 휘돌아 흐르는 삼성천과 아름다운 금강,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줄기가 어우러진 모습이 마치 둥근 소반 모양과 같다 해서 붙여진 이름 반곡리(盤谷里). 반곡리는 행정도시복합도시 건설 특별법이 공포되던 2005년을 기준으로 볼 때 176가구에 435명(남자 220명, 여자 215명)이 거주하는 인심  좋은 마을이었다.

얼마나 인심이 좋았던지 외지 사람들이 드나드는 길목에는 우물이 있어 나그네들의 목마름을 해결해줬고, 무더운 여름 등나무 아래에서 수박이라도 쪼개 먹을 때면 행인에게 선뜻 한 조각을 건네는 그런 인심좋은 마음이었다.

인심과 정이 넘치다 보니 마을에서 환갑잔치나 결혼식, 경로잔치가 열릴 때면 온 마을 사람들이 다 함께 경사를 축하해주고 음식을 나누는 잔칫날로 변했다.

어린아이부터 80대 노인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어우러지는 잔칫날이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게 바로 출장 밴드였다. 음악과 함께 하는 마을잔치가 얼마나 신명 나겠는가.

특히, 이런 날은 동네에서 노래 한자락 하는 '마을 가수'들의 목청 좋은 노랫가락이 흥을 더해주기도 한다.

어릴 적 TV가 잘 나오지 않았던 시골마을에는 작은 카세트가 집마다 있었는데, 그 카세트에서는 대개 신명 나는 트로트가 흘러나왔다. 이런 연유로 마을잔치에서 트로트가 흘러나와도 어린아이들까지 어른들의 무대에 동화되면서 춤판에 어울리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엄마! 노래 한 자락 해봐~"
"노래 못해유. 노래는 무슨."
"○○네 엄마 노래 잘 하잖여. 한 자락 해봐~ ○○네 엄마보다 낫잖여!"


은근히 주변에서 한 곡 부르라고 부추기기도 한다. 마지못해 나간 무대지만, 동네 어머님들은 평소 일하면서 흥얼거리던 노래를 밴드의 반주와 곁들여 솜씨를 뽐낸다. 안 시켰으면 어쨌을까 싶을 정도로.

무대가 한창 무르익을 무렵, 숙기가 없던 우리 어머니가 마이크를 잡았다. 나와 동생들이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수줍은 듯 백댄서를 자처했다.

밴드의 음악이 흘러나왔다. 어머니는 수줍은 듯 앞을 주시하지 않고 한곳을 바라보며 고운 음성으로 애창곡인 '찔레꽃'을 열창했다. 박수가 쏟아졌다. 어머니는 인사를 하고는 급히 일손이 부족한 곳으로 향했다.

아직도 어머니의 수줍어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 건만, '찔레꽃'을 열창하던 어머니는 지금 곁에 없다.

노래방 갈 때마다 울적한 우리 가족

 내 인생의 영원한 BGM이 된 찔레꽃. 어머니의 애창곡이다. 우리 곁을 떠나신 지 15년이 흘렀지만 어머니의 '찔레꽃'은 여전히 생생히 귓전에 맴돈다. 사진은 어머니 산소에 술을 따르고 있는 조카.

내 인생의 영원한 BGM이 된 찔레꽃. 어머니의 애창곡이다. 우리 곁을 떠나신 지 15년이 흘렀지만 어머니의 '찔레꽃'은 여전히 생생히 귓전에 맴돈다. 사진은 어머니 산소에 술을 따르고 있는 조카. ⓒ 김동이


어머니가 우리 곁을 떠난 지 어느덧 15년. 지금도 우리 가족이 노래방에 가서 부르는 첫 노래는 '찔레꽃'이다. 마지막에 부르자고 해도 꼭 첫 곡으로 뽑는다. 이 노래를 부를 때면 감정에 북받쳐 훌쩍거리면서도 꼭 가장 먼저 부른다.

노래를 좋아하는 막냇동생과 함께 찔레꽃을 부르다가 눈물을 흘린 적도 있다. 이런 연유로 우리 가족이 노래방에 가면 한 시간 동안 흥이 날 리가 없다. 아버지의 애창곡도 '허공'이니 분위기가 가라앉기 일쑤다. 가끔 어린 조카들이 동요를 부르며 애교를 떨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흥겹지 못하다. 그래도 가족들은 명절만 되면 어머니를 떠올리며 노래방을 찾는다.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찔레꽃'을 흥얼거려본다. 내 고향 반곡리에 울려 퍼지던 어머니의 꾀꼬리 같던 노랫가락을 떠올리면서.

백난아의 찔레꽃 영상보기 https://youtu.be/zL2iEt4ixbc

덧붙이는 글 내 인생의 BGM 응모글입니다.
BGM 찔레꽃 반곡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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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의 지역신문인 태안신문 기자입니다. 소외된 이웃들을 위한 밝은 빛이 되고자 펜을 들었습니다. 행동하는 양심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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