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대중 문화사에서 가장 큰 분기점이 된 시기는 1990년대입니다. 이때를 기점으로 기존과는 다른 대중 예술가들이 출현하여 각 분야에서 완전히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 냈지요. 여기에 토대가 된 것이 바로 80년대의 사회 경제적 변화였습니다.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은 민심을 무마하기 위해 70년대 박정희 시절과 다른 유화책을 폈습니다. 컬러 TV 방송 시작,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같은 스포츠 행사 유치, 프로야구 개막 등으로 국민의 관심을 돌리려 했습니다. TV, 냉장고, 세탁기 등 기초 가전제품의 보급률이 가구당 1대를 넘어서며 생활 수준의 상향 평준화가 이뤄진 것도 이 시기였습니다.

 영화 <라붐>의 한 장면. 소피 마르소의 청순한 매력이 돋보이는 영화.

영화 <라붐>의 한 장면. 소피 마르소의 청순한 매력이 돋보이는 영화. ⓒ (주)앤드플러스미디어웍스


청소년들 사이에서 외국 유명 배우의 사진이 들어간 책받침이나 브로마이드가 유행한 것이 이 시기의 특징이었죠. 80년대 초중고생들은 누구나 브룩 실즈나 소피 마르소, 피비 케이츠를 알았고, 곧이어 홍콩의 영화 스타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대부분 영화보다 배우를 먼저 알게 된 다음, 그들이 나온 영화를 찾아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때 큰 역할을 한 것이 8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보급된 VCR입니다. 영화를 보려면 시내 극장을 찾아야 했던 시기에, 동네 비디오 가게에서 테이프를 빌려 볼 수 있다는 것은 매우 혁신적인 영화 감상 방식이었습니다. 한 영화를 반복 관람하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에 배우나 감독에 대한 팬덤이 생길 수 있었고, 이전보다 영화라는 매체 자체에 흥미를 느끼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아졌습니다.

한국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 KOFA에서는 8월 9일부터 27일까지 '어른들을 위한 여름방학 특선'이란 이름의 기획전을 열고 있습니다. 80년대 초중고생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던 배우들의 대표작들을 한데 모아 상영하는 프로그램입니다.

소피 마르소의 <라붐>(1980), 브룩 실즈의 <블루 라군>(1980), 피비 케이츠가 나오는 <리치몬드 연애소동>(1982)뿐만 아니라 톰 크루즈의 <탑건>(1986)이나 리버 피닉스와 키아누 리브스 주연의 <아이다호>(1991) 같은 할리우드의 남성 스타들의 작품도 상영됩니다.

대부분 80년대 작품으로서, 우리나라에서는 극장 개봉 당시보다는 TV 방송이나 비디오 대여점을 통해 더 널리 알려진 것이 특징입니다. 이번 기획전을 통해 해당 영화의 무삭제판을 극장의 큰 화면으로 처음 보는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 같습니다. 블루레이로 상영되는 두 작품을 제외하고는 모두 35mm 필름과 DCP로 상영될 예정입니다.

광복절이 끼어 있는 한 주 동안에는 '1945, 전쟁의 기억'이라는 제목의, 2차 대전과 그 여파를 다룬 영화들을 집중적으로 상영하는 기획전도 열릴 예정입니다. 전쟁에 대한 책임을 지지지 않으려는 일본 사회를 비판한 이마무라 쇼헤이의 수작 <검은 비>(1989), 비운의 가족사를 통해 대만의 근현대사를 조명한 허우 샤오시엔의 대표작 <비정성시>(1989) 등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 영화로는 위안부 문제를 다룬 김향기, 김새론의 주연의 <눈길>이 상영될 예정입니다.

'어른들을 위한 여름방학 특선' 프로그램 중에서 세대를 불문하고 챙겨 보면 좋을 추천작 네 편을 골라 봤습니다. 상영 시간표 등 자세한 사항에 관해서는 시네마테크 KOFA 홈페이지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영화 <리치몬드 연애소동>의 한 장면. 브래드(저지 레인홀드)의 성적 판타지 속에 관능적인 모습으로 등장한 린다(피비 케이츠).

영화 <리치몬드 연애소동>의 한 장면. 브래드(저지 레인홀드)의 성적 판타지 속에 관능적인 모습으로 등장한 린다(피비 케이츠). ⓒ 유니버설 픽처스


[하나] <리치몬드 연애소동>(1982)

캘리포니아의 리치몬드 고등학교 재학생인 스테이시(제니퍼 제이슨 리)는 아르바이트를 같이하는 학교 선배 린다(피비 케이츠)의 코치를 받아 여러 남자를 만나며 진짜 사랑을 찾아 헤맵니다. 모든 것이 평탄했던 스테이시의 오빠 브래드(저지 레인홀드)는 아르바이트에 잘리고 오래 사귄 여자친구에게 차이는 등 수난을 겪습니다. 서핑에 미친 제프(숀 펜)는 꼬장꼬장한 역사 선생님과 번번이 부딪치죠.

고등학생들의 일상을 솔직하게 다룬 것이 특징인 이 작품은, 이후에 나온 고등학생의 성 경험을 소재로 한 R등급 코미디 영화의 원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감독 에이미 해커링은 과감한 코미디를 시도하면서도 청소년에게 섹스가 어떤 의미인지 섬세하게 짚어내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피비 케이츠의 과감한 노출 장면으로도 유명합니다.

[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1984)

누들스(로버트 드 니로)는 어린 시절부터 뒷골목 친구들과 밀수 일을 하며 살아온 유대계 건달입니다. 친구의 복수를 하고 감옥에 들어갔다가 금주법 시대에 출소한 그는 어린 시절의 첫사랑 데보라(엘리자베스 맥거번)와 재회하고 밀주 사업에도 손대지만 금주법 폐지로 인해 위기를 맞습니다.

<황야의 무법자>(1964) 시리즈와 <옛날 옛적 서부에서>(1968) 등의 수정주의 서부극으로 명성을 떨친 세르지오 레오네의 대작으로서, 갱스터 장르의 기념비적인 걸작입니다. 시대의 공기까지 재현한 탁월한 화면구성, 로버트 드 니로의 잊지 못할 연기, 범죄자의 숙명 등 이야기 전개가 탁월한 작품입니다. 데보라의 어린 시절을 연기한 제니퍼 코넬리의 미모가 입소문을 타기도 했죠. 2015년에 재개봉된 251분짜리 복원판으로 상영됩니다.

[셋] <천녀유혼>(1987)

온갖 범법자들로 세상이 혼란스럽던 중국의 어느 시대, 수금하러 다니는 영채신(장국영)은 장부가 지워져 돈을 하나도 받지 못한 채 하룻밤 묵을 숙소도 구하지 못하는 처지가 됩니다. 우여곡절 끝에 오래된 절을 찾아 잠을 청하지만, 이 절은 미모의 귀신 섭소천(왕조현)이 남자들을 유혹하여 목숨을 빼앗는 곳이었습니다

귀신으로 나온 왕조현의 매력을 아시아 전역에 알린 작품입니다. <영웅본색>의 장국영이 순진한 영채신의 매력을 워낙 잘 살리기도 했지요. 홍콩 특유의 와이어 액션을 중심으로 한 스턴트와 어딘지 어설픈 듯한 특수 효과가 묘한 분위기를 내는 판타지 활극으로서, 한 번 보면 결코 잊히지 않을 아름다운 장면들이 꽤 있습니다.

[넷] <허공에의 질주>(1988)

대니(리버 피닉스)는 70년대 반전 운동 과정에서 저지른 실수 때문에 FBI의 수사망을 피해 도망다니는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이사를 자주 다니고 매번 이름과 직업을 바꿔야 하는 고단한 생활 속에서, 대니에게 위안을 주는 것은 피아노입니다. 음악적 재능이 뛰어난 대니는 줄리어드 음악원에도 합격하지만, 부모의 상황 때문에 입학을 포기해야 하는 처지에 놓입니다.

늘 사회에 대한 관심을 잃지 않았던 시드니 루멧의 수작으로서, 시간이 지날 수록 더욱 더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작품입니다. 부모 세대가 쌓은 업보를 극복하고 자신의 미래를 개척해야 하는 자식 세대의 운명, 현실에 맞지 않는 급진적인 행동이 과연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반추, 잘못을 한 대가를 치르는 일에 관한 성찰이 돋보입니다.

 영화 <허공에의 질주>의 한 장면. 이 영화에서 리버 피닉스는 딜레마 상황에 놓인 소년의 내적 갈등을 출중하게 표현하였다.

영화 <허공에의 질주>의 한 장면. 이 영화에서 리버 피닉스는 딜레마 상황에 놓인 소년의 내적 갈등을 출중하게 표현하였다. ⓒ Double Play



덧붙이는 글 권오윤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 http://cinekwon.wordpress.com/에도 게재된 글입니다.
시네마테크 KOFA 여름방학 특선 80년대 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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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책에 관심 많은 영화인. 두 아이의 아빠. 주말 핫케익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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