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에서 들락날락 거렸을 수많은 곡들이 있었을 겁니다. 다 기억나진 않아도 그것들이 주로 발라드곡들이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 곡들은 저의 부족한 삶의 경험치를 보완해 주는, 살아가면서 희로애락을 느끼고 이야기를 공유하는 데 필요할 감성의 임계치를 조절해주는 역할이었을 겁니다. 그 들 중에 한곡을 골라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정확히 제가 생각한 범주에서 고르진 못했습니다. 이상하게도 BGM이라는 단어 앞에 '인생'이라는 단어가 붙으니 유독 그 곡이 생각났습니다. 정말 알 수 없는 인생입니다. 이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기 전까진 그 곡을 내 인생의 BGM으로 이름붙일 지는 몰랐으니까요.

내 하얀 폴더폰 속의 컬러링

그 곡은 서영은의 '혼자가 아닌 나'입니다. MBC에서 방영되었던 드라마 <눈사람>의 주제가로 사용되며 유명해졌죠. 그 때가 정확히 언제쯤인지 잘 기억나지 않아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았습니다. 드라마 방영 시점이 2003년. 꽤 오래 전입니다. 그 때 제 나이 서른을 갓 넘긴 시점이었습니다. 아직은 스마트폰이 나오기 전이었고, 당시 제 하얀 폴더폰의 컬러링으로 꽤 오랫동안 사용했습니다.

 가수 서영은

가수 서영은 ⓒ MBC


"이젠 다시 울지 않겠어. 더는 슬퍼하지 않아.
다신 외로움에 슬픔에 난 흔들리지 않겠어.
더는 약해지지 않을게 많이 아파도 웃을거야
그런 내가 더 슬퍼 보여도 날 위로하지마
행복은 늘 멀리있을 때 커보이는 걸
(후렴구) 힘이 들 땐 하늘을 봐 나는 항상 혼자가 아니야
비가 와도 모진 바람 물어도 다시 햇살은 비추니까
눈물나게 아픈 날엔 크게 한번만 소리를 질러봐
내게 오려던 연약한 슬픔이 또 달아날 수 있게."

처제가 형부를 사랑한다는, 조금 파격적인 주제를 다룬 드라마의 주제가로 사용되었는 데도 노래풍이나 가사는 사실 그냥 들으면 마치 어렸을 때 봤던 들장미소녀 캔디의 주제가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어쩌면 이 노래 덕분에 파격적인 취향과는 거리가 멀었던 내가 이 드라마를 끝까지 보았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무난(하다 생각)한 내 인생에서는 도저히 벌어질 것 같지 않은 드라마 스토리가 이 노래와 맞아 떨어진다는 느낌까지 갖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나같은 시청자만 있다면 드라마 연출자 입장에서 아주 훌륭한 선곡인 셈입니다.

 드라마 <눈사람>

드라마 <눈사람> ⓒ MBC


내 늦은 사춘기의 시작

하지만 당시 이 노래를 좋아하고 심지어 컬러링으로까지 사용했던 건 드라마에 빠져서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이 노래가 좋았습니다. 듣고 나면 정말로 울던 캔디가 다시 활짝 웃으며 달릴 것 같았습니다. 그 때 전 한참 일할 때였습니다. 지금처럼 아이를 키우면서 사는 삶은 상상하지도, 꿈꿔보지도 못했지요.

스물아홉에 과장으로 승진 후 정말 야근과 철야를 밥먹듯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동료들과 저녁을 먹고 무거운 몸으로 사무실 책상 앞에 앉아 PC와 씨름을 하자면 귀에 이어폰 하나는 꽂고 있어야 견딜 수 있었습니다. 몸을 쉬게 할 땐 발라드가 좋았지만 뭔가 집중적으로 속도를 내어 일을 할 땐 다소 빠르고 희망적인 느낌의 노래가 좋았습니다. 아마도 서영은의 '혼자가 아닌 나'도 그 때 들었던 노래 중 하나 였을 겁니다.

가수 서영은의 목소리는 참 예뻤습니다. 하지만 그 예쁨이 다는 아니었습니다. 노랫말은 혼자가 아니라고 외치는 데 서영은의 목소리에 실린 혼자가 아닌 나는 애틋함 같은 게 어렴풋이 묻어났습니다. 그 어렴풋이 좋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 그 때 저에겐 용기 보다는 위안이 더 필요했을 때라서 그랬나 봅니다.

당시 전 자취생활 4년차를 넘어서고 있었습니다. 혼자만의 자유나 해방감을 만끽하던 시절은 이미 건너가 버렸을 때입니다. 물론 그 때 엄청나게 바빴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하는 거라곤 그저 씻고 자고 간편한 음식들로 요기하는 게 다였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사무실로 향했습니다. 그래도 그 땐 그렇게 사는 게 최선이라 믿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승진이나 연봉 인상 같은 보상도 주어졌습니다. 내가 바쁘면 바쁠 수록, 스트레스가 커지면 커질 수록 대가가 주어졌습니다. 기쁘기도 했습니다. 받지 못한 건은 아니었으니까요. 열아홉에 가족을 떠나 서울로 올라오며 나도 이 나라의 중심도시에서 번듯하게 한번 살아볼거라는 꿈이 이루어지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때도 제가 흐릿하게 나마 알았던 게 하나 있습니다. 이게 다가 아닌 것 같은. 밥을 먹어도 다 채워지지 않는 허기 같은 게 있다는 걸.

그럼에도 그 때 나는 내 안의 작은 목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그 때 일터와 집을 오가며 들었던 수많은 노래들은 나를 폭발하지 않게 해주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2~3년 후 쯤 삼십대 중반 즈음에 들어설 무렵, 나는 내 인생 처음으로 중요한 '때'를 만났습니다. 중고등학생 시절에도 겪지 않았던, 아니 참아내고 막아내었던, 사춘기라 불러도 좋을 때를 만났습니다. 나를 누르고 돌보지 않은 대가를 그 때서야 치렀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때 행복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노래 '덕'에 나를 들켰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니 이 노래는 그 중요한 '때'의 징후였을 지 모르겠단 생각이 듭니다. 왜 다른 노래를 제쳐두고 이 노래를 컬러링으로 오랫동안 사용했었는 지, 기억나진 않지만 그저 지금은 짐작만 할 뿐입니다. 당시만 해도 휴대폰을 갖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노래를 컬러링으로 사용하는 게 아주 대유행이었습니다. 컬러링은 사실 내가 듣는 게 아니라 나에게 전화를 거는 사람이 듣게 될 노래이므로, 생각해보면 컬러링으로 선택한다는 건 내가 좋아하는 노래 그 이상의 의미가 있지 않았을까요? 내가 좋아한다거나 혹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다는 이유만으로는 선택되지 않을 특별함. 혹은 내가 생각하는 나의 이미지이거나 누군가와 소통하고 싶은 느낌까지 담은 그런 것.

 가수 서영은

가수 서영은 ⓒ KBS


이 노래가 내 휴대폰에 존재하는 동안 나에게 전화를 걸었던 사람들은 꽤 오랫동안 이 노래의 후렴구인 '힘이 들 때 하늘을 봐, 나는 항상 혼자가 아니야'를 들었을 것입니다. 아마 그 부분이 지나가는 즈음에 내가 전화를 받았을 테니 말입니다. 가끔 내 컬러링에 대해 얘기해주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어울리지도 않는 굵은 아저씨 목소리로 나를 놀리며 능청스럽게 부르는 남정네도 있었던 것 같고. 나는 이 노래를 내 컬러링곡으로 오랫동안 마음에 들어했습니다. 힘들어도 꿋꿋하고 밝은 나라고 외치고 싶었던 내가,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몇년이 지난 후, 그 땐 이미 폴더폰이 사라지고 스마트폰으로 바뀐 후였습니다. 어느 날 엄마가 문득 예전의 내 컬러링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어쩌면 친구나 고객 전화보다 부모님 전화를 더 놓쳤을 가능성이 컸을 그 때, 엄마는 그 컬러링을 가장 자주 들은 사람이었을 지 모릅니다. 엄마는 가사와 멜로디를 따라 부를 수 있을 만큼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엄마가 그 노래를 내게 이야기했을 때 난 바로 그 노래가 서영은의 '혼자가 아닌 나' 라는 걸 바로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엄마는 뜻밖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네가 서울서 혼자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 노래를 틀어놨겠냐" 라고. 그 순간 어찌나 놀랬었는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내 마음을 송두리째 들킨 느낌. 나도 다 몰랐던 나를 엄마 혹은 누군가는 알고 있었을 수도 있겠다는 추측까지. 의도하진 않았지만 나는 그렇게 티내고 있었습니다. 감추어지지 않는 비밀이었습니다.

나는 '그냥 딸'이었습니다

사실 난 나에 대해 엄마가 걱정하는 게 싫어 어렸을 때도 내 얘기를 잘 하지 않았습니다. 엄마는 나 말고도 걱정이 너무 많으니 나라도 걱정을 덜어드려야 한다는 강력한 확신 같은 게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기숙사에서 생활했던 고등학생 시절, 아예 내가 자란 고향을 떠나 서울로 와서 대학을 다니고 직장을 다니던 그 장시간의 세월동안 난 엄마가 나를 그저 든든하고 뭐든 잘 해 내는 능력있는 딸로 생각해 줄거라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엄마가 그 얘길 꺼낸 순간, 난 유능한 딸이 아니라 '그냥 딸'이었다는 걸 알았습니다. 어찌할 수 없이 마음주고픈 딸. 그럼에도 그 오랜 시간동안 엄마는 그 얘길 하지 않았습니다. 멀리서 나를 알아버렸으면서도 들추지 않았던 것입니다. 유능해보이고 싶은 내 딸을 위해 한발짝 더 생각했을 엄마.

마흔이 넘고 나도 딸 하나를 키웁니다. 아직 어린 데도 이 아이의 마음이 들여다보일 때면 애잔할 때가 많은 데 우리 엄마가 내 목소리 듣고 싶어 나에게 전화를 걸 때 마다 그 노래를 들었을 생각을 하니 마음이 짠해집니다. 하지만 그 때 엄마가 내게 바로 얘기를 해 주지 않아서 오히려 고마웠습니다. 만일 그 때 엄마가 나에게 이야기했더라면 난 아니라고 아주 명랑한 목소리로 얘기했을 게 분명합니다. 웬 쌩뚱맞은 걱정이냐고. 그렇게 걱정할 시간있으면 밥이나 챙겨드시라고. 난 잘 살고 있다고. 그렇게 외치며 내가 나를 부인하고 싶었을 때 모른 척 아무 말 하지 않은 엄마를 생각하니 눈물이 핑돕니다.

"힘이 들 땐 하늘을 봐 나는 항상 혼자가 아니야."

말복이 지나고 입추가 지나니 더위가 수그러들고 가을빛 하늘을 준비하려는 지 꽤나 쾌청합니다. 그 때도 이 노랠 들으며 저런 하늘을 한번쯤은 보았겠지요. 오랜만에 이 노래를 다시 들으며 어렸던 나를 꼭 안아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엄마에게 전화 한 통화 넣어야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내 인생의 BGM' 응모글입니다.
인생BGM 혼자가 아닌 나 서영은 컬러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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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떠오르는 것들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글로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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