씩씩해진 델마 어린 아이 같았던 델마는 의외의 상황에서 크게 변화한다.

▲ 씩씩해진 델마 어린 아이 같았던 델마는 의외의 상황에서 크게 변화한다. ⓒ 조이앤시네마


여성들은 집 밖을 나갈 때 조심하고 경계를 늦추지 않는 것이 유전자에 새겨져 있다. 그런데도 힘의 균형에서 약자인 여성들이 이유 없이 당하는 사건이 종종 일어나는 현실이다. 영화 <델마와 루이스>가 개봉한 지 25년이 넘었지만 지금 봐도 공감이 될 정도로 여성들의 위치는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영화는 친구인 두 명의 여성, 델마와 루이스 여행길에서 발생한 이야기를 그린다. 설렘과 기대로 부푼 여행이었으나 얼마 가지 않아 델마가 성폭행을 당할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 현장에서 친구인 루이스는 얼떨결에 성폭행하려던 남자를 사살하고 만다. 급작스러운 일에 당황한 두 사람은 허겁지겁 도망간다. 경찰에 신고하자는 델마의 이야기에 루이스는 냉소적이다. 사람들이, 세상이 곧이곧대로 믿어주지 않을 거라는 판단이었다.

왜 델마의 말 대로 경찰에 가지 않았을까? 성폭행 피해자로 정당방위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거기에는 루이스의 아픈 과거가 있었다. 텍사스에 살았던 시절에 성폭행을 당했고 아마도 정당방위로 상대 남자를 사살한 것으로 보인다. 법적으로 보호를 받았다지만 세상은 그녀에게 가혹했던 기억이 있다. 다시는 텍사스 땅을 밟지 않으려는 강한 의지는 그녀가 당했을 상처가 얼마나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는지 일깨워준다. 심지어 도주의 목적지인 멕시코에 가려면 가장 빠른 길인데도 피하고 싶은 텍사스였다.

루이스와는 달리 델마는 집과 남편의 그늘에 살아서 세상 경험이 거의 없었다. 그렇다고 그녀가 여성으로서 존중을 받고 산 것이 아니라 보수적인 남편과는 상당히 굴욕적인 관계였다. 루이스 말대로 문제가 생길 때마다 순진한 척 제정신이 아닌 척, 넘어가면 늘 누군가가 해결해 주는 수동적인 삶을 살았었다. 이렇게 깊은 상처를 가진 루이스와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살던 델마는 법 없이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평범한 인물 설정은 많은 사람의 공감을 끌어낼 수 있었으며, 촘촘하게 짜인 영화는 세상에 내몰린 험한 여정 속에서 자신을 깨닫고 성장하는 과정을 깊이 있게 그린다.

위기 앞에서 전사가 된 델마

전사가 된 델마와 루이스  자신들을 우롱하고 비하하는 탱크로리트럭을 폭파하는 그녀들!

▲ 전사가 된 델마와 루이스 자신들을 우롱하고 비하하는 탱크로리트럭을 폭파하는 그녀들! ⓒ 조이앤시네마


모든 희망을 멕시코로 걸었던 그녀들은 가까스로 도주 자금을 마련하였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목숨줄 같던 돈을 하루아침에 도둑맞았으니 그 절망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최악의 상황에 닥치자 의외로 델마는 매우 용감해진다. 오히려 지금까지 델마와 달리 어른스러웠던 루이스는 극도의 공황상태에 빠져 반쯤 넋을 잃는다.

"걱정할 것 없어!"

이 사건을 기점으로 어린아이 같았던 델마와 어른 같은 루이스의 역할이 완전 역전된다. 영화'델마와 루이스'의 시나리오의 탁월한 지점은 바로 이 부분이다. 트라우마를 안고 살았던 루이스는 고통에 도망치고 움츠리며 살았다. 보통 그런 경우 고통의 크기를 익히 잘 알고 있기에 두려움이 앞서는 법이다. 반면 델마와 같이 고통의 경험이 없는 경우 오히려 잘 헤쳐 나간다. 이제부터 관객은 전사처럼 씩씩해진 델마와 자신의 트라우마를 넘어서는 루이스를 지켜보게 된다.

잘생긴 사기꾼 남자에게 빠져(브래드 피트의 전성기 시절이다) 돈을 몽땅 잃어버린 델마는 슈퍼를 강탈하여 돈을 마련한다. 도대체 델마의 변화의 동인은 어떤 것인지 지금까지 스스로 살아내 본 적이 없는 그녀의 급격한 변화는 좀 의아하긴 하지만 사기꾼 제이디의 교습이 제대로 실현되는 최고의 학습효과 결과다. 더 갈 곳이 없는 상황에서 발휘되는 인간의 초능력과도 같은 힘인지, 어쨌든 델마는 이후 끌려다녔던 모습에서 오히려 루이스를 이끄는 모습으로 변모한다.

대자연 앞에 마주 선 루이스

서부의 광활한 대지를 달리는 델마와 루이스 멕시코를 향해 달리는 그녀들은 점차 단단해져 간다.

▲ 서부의 광활한 대지를 달리는 델마와 루이스 멕시코를 향해 달리는 그녀들은 점차 단단해져 간다. ⓒ 조이앤시네마


돈을 강탈한 이후 영화는 한층 차분해진다. 광활한 서부의 자연풍광과 그녀들의 환호 소리는 꺼져 들어가던 루이스와 용감하게 탈바꿈한 델마의 새로운 변화의 전환점이 되어준다. 그러나 아직도 루이스는 갈피를 잡지 못해 전전긍긍한 밤을 지낸다. 자신의 실책으로 빚어진 일이란 자책으로 복잡한 그녀의 심경과는 달리 광활한 서부의 밤하늘은 시리도록 아름답다.

하지만 대자연의 아름다운 밤하늘 아래 홀로 서 있는 루이스는 이제까지 피하고 도망치고 싶었던 자신과 맞닥뜨리는 시간이 된다. 루이스의 뒷모습, 어두운 밤에 오직 달빛만이 대지를 비춘다. 루이스의 심경의 변화를 표현한 이 시퀀스는 영화 중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 아닐까 한다. 아무 대사 없이 처리한 이 장면은 영화만이 가질 수 있는 강점을 극대화하였다. 역시나 뛰어난 미쟝센으로 정평이 나 있는 리들리 스콧 감독이었다.

이후 루이스는 텍사스의 일을 묻는 델마에게 버럭 화를 내며 흥분하던 이전의 모습과는 달리 침착하고 단호하게 말할 정도로 달라진 모습을 보인다.

"경고하는데 그 얘기 다시는 꺼내지 마!"

우발적인 저항에서 적극적인 응징으로

평범함을 꿈꾸었던 델마와 루이스 바닷가에서 칵테일을 마시자. 이름도 바꾸고, 휴양지에서 일자리도 구할거야.

▲ 평범함을 꿈꾸었던 델마와 루이스 바닷가에서 칵테일을 마시자. 이름도 바꾸고, 휴양지에서 일자리도 구할거야. ⓒ 조이앤시네마


서부영화에서 정의는 악에 대한 응징이 매우 빠르고 즉각적이다. 어쩌면 서부영화의 묘미가 여기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억울하지만 참아야 하고 또 그 절차도 복잡한 오늘날 법의 심판 대한 사람들의 통쾌한 한풀이가 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델마와 루이스의 배경이 되는 서부의 광활한 대지는 그 옛날 서부 개척자 시대의 응징을 끌어올 수 있는 장소로 적합한 설정이었다.

델마와 루이스는 절박한 며칠의 여정으로 자신들이 어떤 위치에 있으며 이제껏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깨닫는다. 남자들에 의해 발생한 사건으로 위험에 처하게 된 것이며, 여행을 떠나기 전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볼 수 있는 분별력이 생겼다. 다시는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또 그렇게 살지 않겠다는 그녀들은 자신의 미래를 꿈꾼다.

"너 깨어 있니?"
"한 번도 이렇게 깨어 있어 본 적이 없는 것 같아. 모든 게 달라 보여!"


이러한 변화는 세 번씩이나 마주친 탱크로리 기사를 대하는 태도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처음엔 희롱하고 지나가는 트럭운전사를 그저 역겨워하였다. 두 번째 마주칠 때는 그의 혐오스러운 모습을 무시하고 가는 것으로 모른 척 넘긴다. 그러나 세 번째 만났을 때 그녀들은 이미 여성을 혐오하고 비하하는 비열한 인간들을 응징하는 전사가 되어 있었다.

수동적으로 피하기만 했던 그녀들은 트럭 기사를 통쾌하게 응징한다. 그 옛날 그 자리에서 정의로운 심판을 내리던 서부 개척시대의 카우보이처럼!

엔딩 장면 새로운 삶을 위해 비상하는 델마와 루이스.

▲ 엔딩 장면 새로운 삶을 위해 비상하는 델마와 루이스. ⓒ 조이앤시네마


그녀들이 꿈꾸는 세상은 지극히 평범한 일상이었다.

루이스는 자신이 착용하고 있던 귀걸이, 반지, 시계를 카우보이 모자와 바꾼다. 얼른 보기에도 그 가치를 훨씬 뛰어넘는 보석과 허름하여 볼품없는 모자인데도 별 미련 없이 바꾼다. 그동안 지녔던 힘없는 여성성과 힘을 상징하는 모자와의 교환이었다면 마지막 장면은 이것마저도 기꺼이 벗어 버린다. 처음 여성스러운 의상과 달리 그녀들의 외적인 모습은 남성적으로 변한다. 그러나 이러한 남성적인 변화조차도 그녀들이 바라는 세상을 실현해 줄 수 없었다. 수많은 총부리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힘과 편견으로 옥죄던 삶을 뛰어넘어 꿈꾸는 세상을 향해 비상하는 이 장면은 최고의 엔딩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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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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