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옥과 함께 온 딸 소희는 배에서 내려지기 무섭게 유곽으로 끌려가는데, 피징용자와 함께 온 가족을 위안소로 보내는 경우는 없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강옥과 함께 온 딸 소희는 배에서 내려지기 무섭게 유곽으로 끌려가는데, 피징용자와 함께 온 가족을 위안소로 보내는 경우는 없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 외유내강


영화 <군함도>의 역사 왜곡 논란이 뜨겁다. 영화를 만든 이들의 역사의식이 부족하고 실제 역사와 너무 동떨어져 보기 불편하다는 지적 등이다. 잔인한 식민지배를 하고, 전쟁을 일으키고, 한국인들을 끌고간 것은 일본인데, 한국인끼리 반목하고 분열하는 스토리도 강제징용이라는 소재에 적절치 않다는 의견이 많다.

<군함도>의 황당하고 엉뚱한 상상력은 관객을 불편하게 만들고, 관객이 스토리 안으로 자연스럽게 이입해 들어가는 것을 방해한다. 강옥과 함께 온 딸 소희는 배에서 내려지기 무섭게 유곽으로 끌려가는데, 피징용자와 함께 온 가족을 위안소로 보내는 경우는 없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또 동원된 여성들이 위안소로 연행돼 가면서 나오는 "정신대로 갔는데 위안부가 됐다"는 대사도 일반의 오랜 오해로, 실제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 정신대로 갔는데 위안부가 됐다는 증언은 현재까지 1개가 확인돼 신빙성에 의문이 있고, 양자가 모두 여성을 동원 대상으로 했기에 오랫동안 '정신대=위안부'라고 잘못 알려진 것으로 보인다.

(근로)정신대와 위안부는 동원경로가 다르고, 하는 일도 다르다는 것이 학계 일반의 공통된 견해다. 지난 70년간 수많은 정신대 동원 피해 여성들이 위안부로 오해를 많아 불행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많은 지적을 받았듯, 한국인 노동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토론을 할 정도의 자유가 있었다거나(촛불 신) OSS와 연합한 광복군이 하시마에 침투한다거나 거물 독립운동가가 탄광에 억류된다는 설정도 엉뚱하기 그지없다. 윤학철이 치안유지법을 위반했다면 그에 따라 조사를 받고 재판에 넘겨져 형량을 정하면 된다. 전향이나 변절은 그 이후의 문제다. 

황당하고 엉뚱한 <군함도>의 상상력, 그럼에도

그러나 이러한 부정확한 묘사들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징용 피해자와 생존자들의 고통과 아픔까지 훼손하는 비윤리적인 작품이라고 하긴 어렵지 않을까 한다.   

영화는 3명의 어린 탈주자들을 등장시켜 이 인공섬에서 탈출하는 것이 왜 불가능했는지를 그리며 시작한다. 곧이어 폐소공포증이 생길 것만 같은 어둡고 숨막히는 갱도 안의 소년 탄부를 보여준다. 강제징용 연구자에 따르면, 탈출 시도는 많았지만 헤엄을 치다 익사해 인근 해안에 시신으로 떠밀려 오거나, 천신만고 끝에 육지에 닿았어도 미리 도착한 경찰에 의해 연행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이러한 인상적인 오프닝에 뒤이어 빠르고 흡인력 있는 전개 속에 강제동원의 참상을 세세하게 담아낸다. 인공섬 안으로 끊임없이 들이치는 커다란 파도, 습기찬 다다미 방, 인공도시 속 일본인 구역과 조선인 구역의 실감나는 풍경 등은 감독과 영화 관련자들이 실제 증언과 남아 있는 흑백필름 등을 꼼꼼히 참고해 이 섬의 실제 모습을 영화 안에 충실히 묘사했음을 잘 드러내준다. 

 인공섬 안으로 끊임없이 들이치는 커다란 파도, 습기찬 다다미 방, 인공도시 속 일본인 구역과 조선인 구역의 실감나는 풍경 등은 감독과 영화 관련자들이 실제 증언과 남아 있는 영상 등을 꼼꼼히 참고해 이 섬의 실제 모습을 영화 안에 충실히 묘사했음을 잘 드러내준다.

인공섬 안으로 끊임없이 들이치는 커다란 파도, 습기찬 다다미 방, 인공도시 속 일본인 구역과 조선인 구역의 실감나는 풍경 등은 감독과 영화 관련자들이 실제 증언과 남아 있는 영상 등을 꼼꼼히 참고해 이 섬의 실제 모습을 영화 안에 충실히 묘사했음을 잘 드러내준다. ⓒ 외유내강


노무자용 기업 위안소의 모습도 한국 영화에서 처음으로 나왔다. 군인뿐 아니라 군속이나 노무자들이 이용하는 위안소도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경성제대 출신 엘리트의 징용도 흔한 일은 아니지만 당시 대학생이 징병을 거부하자 징용에 보내버렸다는 진술이 있다. 말년의 몸에 강제로 새겨진 문신과 반항하는 여성을 일본군이 못판에 올려 굴려버렸다는 그녀의 대사는 실제 북한 거주 위안부 할머니의 증언이다. 이 증언은 수백 개의 비슷비슷한 평균적 증언 사이에서 매우 두드러지는 극단적인 증언이지만, 일본의 포토 저널리스트 이토 다카시가 촬영한 영상 속 할머니의 증언은 매우 구체적이고 생생해서 가슴을 친다.

또 말년이 한국인도 위안부 동원에 협력했다고 원망하는 모습도 실제 사실에 부합한다. 일본인 업자는 한국어를 모르기 때문에 실제 동원과정에서 한국인의 개입이 있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고, 한국인 포주도 꽤 있었음이 최근 발굴된 <일본군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를 통해 드러난 바 있다.

중요한 것은 실제의 객관적 사실을 정확히 인지한 후에라야 일본에 사죄 요구도, 진지한 자기반성도 가능하다는 점이다. 이것이 전제되지 않으면 일본에 대한 비판도, 화해와 속죄도 영원히 원점을 맴돌 뿐이다.

허투루 들어가지 않은 듯한 수많은 영화 속 묘사들
      
그밖에 매끄럽게 이야기 안에 잘 녹아든 군사훈련 장면도 휴일에도 남녀 모두를 군사훈련에 동원해 고통스러웠다는 피해자의 진술을 감독이 허투루 듣지 않았다는 것을 드러내준다. 또 영화 속 말년과 최칠성처럼 광복 후 고국으로 돌아갈 배를 기다리며 한국인끼리 모여 집단생활을 하던 중 위안부와 징용자 커플이 부부로 맺어진 예가 종종 있다.

이렇게 영화는 우리가 서류나 자료, 피해자 진술로만 알던 강제징용을 스토리와 영상의 힘으로 재구성해 보여준다. 그러나 같은 일제강점기 배경 소재라도 '독립운동'에 비하면 '강제징용' 자체는 영화적 소재로 적합하지 않다는 인상을 준다. 어떤 인간이 계속해서 고난과 고통, 억압을 당하는 모습을 2시간 내내 보여주는 것은 그다지 영화적인 스토리는 아니다. 특히 특별한 스펙터클과 비일상적인 체험을 담아내는 것에 주력하는 상업영화라면 더욱 그렇지 않을까 한다. 그래서 감독이 광복군 박무영을 외부에서 온 구원자로 등장시키고, 후반부의 '대탈출'에 힘을 쏟는 무리수를 둔 것은 아닌가 한다. 

많은 비판을 받은 한국인끼리의 반목과 분열에 관한 끝없는 묘사도 화해와 대탈출을 위한 사전 장치로 작용했던 것 같다. 다툼과 배신만 반복하던 조선인들이 힘을 합해 무리지어 석탄운반선으로 향하는 모습은 그래서 더 감동적이다. 강제동원 연구자에 따르면, 한국인들은 징용지에서도 당당히 항의하며 자기 권리를 찾으려는 노력을 했다고 한다. 덩치 큰 한국인들을 일본인 노무계가 두려워했고, 그래서 한국인끼리 싸우고 오해하게 만들면서 분열을 야기해 힘을 분산시켰다고 한다. 영화 속 묘사도 이런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흔히 관찰되는 사실은 아니겠지만, 이와 관련해 인상적인 증언도 있다. 1945년 초, 히로시마의 구레 해군공창(병기나 함선을 만들거나 수리하는 공장)에서 한국인 징용공 700여 명이 가혹한 노동조건에 항거해 파업과 봉기를 일으킨 예가 있다. 이들은 잔인하게 진압당했고 주모자는 감방에서 죽었지만 오늘날 시사하는 의미는 적지 않다. 영화에서 묘사된 것처럼 대규모는 아니었으나, 삼삼오오 무리 지은 탈출은 어느 작업장에서나 흔히 있었다. 일하다 죽느니, 도망가다 죽겠다는 심정의 표현이었다.

 많은 비판을 받은 한국인끼리의 반목과 분열에 관한 끝없는 묘사도 화해와 대탈출을 위한 사전 장치로 작용했던 것 같다.

많은 비판을 받은 한국인끼리의 반목과 분열에 관한 끝없는 묘사도 화해와 대탈출을 위한 사전 장치로 작용했던 것 같다. ⓒ 외유내강


강제징용사엔 여성과 미성년, 노인이 끌려간 가슴 아픈 사연이 너무 많다. 전쟁은 성인 남자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본군의 군복 천을 만들러 방적공장으로 끌려간 9살 소녀도 있었고, 아버지 대신 여러 해 동안 광산과 토목 공사장으로 끌려 다닌 12살 소년도 있었다. 성인도 견디기 힘든 강제노동을 10살 전후의 아이들이 어른들 사이에서 어떻게 견뎠을까 생각하면, 누구라도 이 아이들을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한다. 미쓰비시 비행기제작소에 동원돼 비행기 부품을 만든 13살 소녀도 있었다. 예쁘고 똑똑한 소녀였지만, 일본에 다녀왔다는 것이 큰 약점이 돼 평생을 고단하게 살았다. (앞서 밝혔듯 근로정신대를 위안부로 오해한 일반의 무지와 편견 탓이었다) 강제작업장을 탈출해 무사히 귀향했지만 '징용기피죄'로 체포돼 소년형무소에서 죽은 15살 소년도 있다. 

그리고 <군함도> 속에도 수많은 소년 광부가 등장한다. 전쟁이 말기로 치닫으면서 노동력 부족이 심각해지자 10대 초반 미성년들도 닥치는 대로 끌고 간 것이다.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영화 속에 세세히 녹아든 설정과 묘사들을 보며 영화의 허술함이나 약점과는 별개로 영화를 만든 이들이 700만 명이 넘는 징용 피해자들에게 누를 끼칠 의도가 없었다는 점은 분명히 느껴진다.

탄광은 일제강점기 내내 누구나 기피하는 징용지였다. 그래서 일본인 인솔자들이 목적지가 탄광이라는 것을 숨기는 경우가 허다했다. 일본의 탄광은 원래 죄수 노동 중심이었고, 개발된 지 오래돼 갱도가 깊고 위험하다. 그것을 자료로 보고 아는 것과 영화 속에 입체적으로 묘사해 전달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이 영화 이전에 막장의 지옥 같은 모습을 이토록 생생하게 묘사한 영화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역사 왜곡? 실제 역사가 무엇이었는지부터 알아야

역사적 사실과 영화적 상상력이 제대로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영화적 재미를 위해 종종 실제 역사를 희생시키긴 해도 생존자의 경험을 충실히 영화에 반영한 것은 높이 살 만하고, 그들의 한을 영화에서나마 풀고자 후반부의 대탈출을 넣었다는 감독의 말은 변명처럼만 느껴지지 않는다.

그동안 강제징용은 그 실체와 참상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갔다 온 이들은 우리 주변에 늘 있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이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일 기회가 없었다. 전적으로 <군함도>의 영향력은 아니지만, 오랫동안 침묵을 강요당했던 약자들의 이야기가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를 이 작품이 제공했음은 분명하다. 

사람들은 역사를 왜곡했다는 말을 종종 하지만, 실제 역사가 무엇이었는지 우리 중에 제대로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식민지배의 진실을 잊지 않고, 집단의 기억으로 끌어올리는 노력엔 이런 대중을 타깃으로 한 상업영화도 보탬이 된다. 사람들이 귀를 기울일수록 피해자가 스스로 피해 사실을 숨기며 움츠러들지 않고 당당히 피해를 말하고 일본의 '속죄'를 요구할 수 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조사및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지원위원회에서 제공받은 피해자 구술 기록과 각종 자료, 정혜경 박사의 <지독한 이별> (선인, 2011) 등을 참고해 작성했습니다.
강제동원 강제징용 군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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