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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에 등장하는 특정한 공간이나 장소는 그 자체만으로 고유한 의미를 지니는 경우가 적지 않다...(중략) 지금까지 문학 연구가 주로 '무엇이 일어났는가'에 초점을 맞췄다면, 앞으로의 문학연구는 '어디서 일어났는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유물론의 관점에서 보자면 소설 등 문학작품 속 상부구조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과거에서부터 오늘날까지 출간된 다수의 한국 소설은 주인공으로 설정된 인물을 중심으로 사건과 갈등이 발생하고, 상황에 대한 그 인물의 선택이 결말의 형태를 결정해왔다.

그랬기에 현재까지 대부분의 문학연구는 '(그 인물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에 주목해온 것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세상이 '문학평론가'로 부르는 사람들의 주요 임무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를 분석하고 해석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문학평론가에 관한 '보편적 규정'에 문제를 제기하는 소장학자가 있어 이채롭다. 바로 이경재 숭실대 국문과 교수다. 이 교수는 기사의 첫머리에 인용했듯 "이제 문학연구의 방식이 '무엇이'에서 '어디서'로 옮겨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최근 출간된 <한국 현대문학의 공간과 장소>(소명출판)를 통해서다.

이 교수의 이러한 시도는 문학의 상부구조만이 아닌 '토대'에도 주목하자는 주장으로 읽힌다. 그는 평소 "공간이나 장소에 대한 이해가 문학에 대한 이해를 보다 심화시킨다"고 말해온 사람이다. 이 말은 결국 '인물(상부구조)'과 함께 '공간(토대)'에 관한 연구 역시 문학평론가의 역할이 돼야 한다는 것일 터.

'생활의 공간' 서울에서 '멀고 낯선' 뉴욕과 까마우...

소설 속 공간성을 탐구한 이경재의 신간 <한국 현대문학의 공간과 장소>.
 소설 속 공간성을 탐구한 이경재의 신간 <한국 현대문학의 공간과 장소>.
ⓒ 소명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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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문학의 공간과 장소>는 이경재가 자신의 주장을 현실적으로 입증하기 위해 소설 속 배경이 된 공간과 장소를 찾아 떠돈 기록이다. 머리와 발이 동시에 고생하지 않으면 만들어질 수 없었던 저서. 해서 이 책은 '땀의 편력기'라 불러도 좋을 듯하다.

이 교수는 그간 <단독성의 박물관> <끝에서 바라본 문학의 미래> <다문화 시대의 한국소설 읽기> <재현의 현재> 등을 내놓으며 성실성을 인정받은 문학연구자다. 이번에도 이경재는 <한국 현대문학의 공간과 장소>의 완성을 위해 그 성실성을 십분 발휘했다.

많은 한국 문학의 공간적 배경이자 평소 그의 생활공간인 서울의 구석구석을 돌아본 것은 물론이고, 중국의 북경, 장춘, 하얼빈, 미국의 뉴욕과 일본의 삿포로,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와 베트남의 까마우까지 펜과 노트북을 들고 헤맸다. 열정과 탐구심이 함께 작동하지 않으면 해내기 힘든 작업이 분명했다.

그 기나긴 여정을 통해 이 교수는 최서해와 한설야, 이기영과 이효석의 문학을 '만주'라는 키워드로 탐구했고, 이상과 이광수, 유진오와 이범선, 이문구와 최인호의 소설에서 '서울'이라는 공간이 가지는 의미를 재해석한다.

김사과, 이기호, 해이수 등 비교적 젊은 한국 소설가가 '장소'를 사유하는 방식을 연구한 '공간체험의 변화-무장소성의 등장'도 흥미롭게 읽힌다. 동년배 작가들의 익숙한 이름 탓일 것이다.

본격적인 문학평론서임에도 무겁지 않은 이유

<한국 현대문학의 공간과 장소> 중 가장 즐거운 '독서 체험'을 내게 제공한 부분은 '아시아의 도시'로 명명된 마지막 6부다. 이경재는 삿포로와 블라디보스토크, 이스탄불과 까마우에서 직접 찍은 사진까지 동원해 '즐거운 책읽기'라는 선물을 독자들에게 제공한다.

통상의 문학평론서는 낯선 전문용어와 딱딱하고 학술적인 문장으로 인해 독자들에게 적지 않은 심리적 압박감을 줘왔다. 이 교수도 이를 잘 알고 있었던 듯하다. 본격 평론이라기보다는 부담 없이 읽기 좋은 수필에 가까운 6부를 '보너스 트랙'처럼 배치한 센스가 돋보인다.

한 권의 책으로 교양과 재미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함께 잡아보고 싶은 사람, 문학평론가가 안내하는 소설 속 공간으로 올여름 휴가를 떠나고 싶은 이들에게 <한국 현대문학의 공간과 장소>를 정중하게 권한다.


한국 현대문학의 공간과 장소 - 미쓰비시 사택에서 뉴욕의 맨해튼까지

이경재 지음, 소명출판(2017)


태그:#이경재, #한국 현대문학의 공간과 장소,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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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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