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리 태프트 'Love Like You' 뮤직비디오의 장면들. 과연 이 곡은 케이팝일까 아닐까.

찰리 태프트 'Love Like You' 뮤직비디오의 장면들. 과연 이 곡은 케이팝일까 아닐까. ⓒ SM 엔터테인먼트


'케이팝은 무엇일까.'

찰리 태프트의 'Love Like You'가 던지는 질문이다.

그는 지난주 SM 엔터테인먼트를 통해 데뷔한 영국인, 백인 아티스트다. 레드벨벳의 'Automatic' 등 한국인 아티스트의 곡 작업에 몇 번 참여했지만, 한국이란 나라와 직접적인 인연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는 영어로 된 노래를 부르지만 SM엔터테인먼트 소속인 만큼 작업엔 당연히 한국인 스태프들이 다수 참여했고 뮤직비디오의 댄서들도 동양인을 썼다.

무엇이 케이팝을 케이팝으로 정의하는가

당연히 이런 질문이 나온다. 이 곡은 케이팝인가? 가수의 국적은 영국인이고 영어로 노래를 부르는데? 그럼 팝 곡인가? 그렇게 보기엔 한국인 스태프의 참여도가 너무 크다. 만약 이 가수가 어설프게나마 한국어로 노래했다면 어땠을까? 많은 이들이 이 곡을 케이팝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이미 우린 한국어로 노래를 부르는 일본인, 중국인 아티스트는 케이팝 아티스트라고 부르고 있지 않은가.

이런 혼란은 토론을 넘어 유튜브에서 댓글 설전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ID Kfa**는 그가 SM 소속이란 이유만으로 케이팝 아티스트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한지 물으며, SM엔터테인먼트가 하는 것은 '엔터테인먼트 산업'일 뿐 '케이팝'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ID keoni*역시 SM의 Station 프로젝트는 한국인 아티스트에 국한된 게 아니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반박하는 이들은 SM이 자신의 브랜드를 내건 '프로젝트 앨범'이므로 케이팝이라고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몇몇 댓글들은 인종 문제까지 언급한다. 이 음악을 케이팝으로 보지 못하는 것이 인종차별이라는 주장도 눈에 띈다.

그러나 이 대립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것은 인종 문제도, 아티스트의 국적 문제도 아님을 알 수 있다. 본질은 케이팝을 하나의 장르로 이해하느냐, 아니냐이다. 케이팝 뮤직비디오엔 영미권 팝 음악 비디오에서 볼 수 없는 요소들이 많이 등장한다. 흐느적거리는 안무보다 각 잡힌 군무를 선호하고, 귀여운 이미지 뒤에 섬뜩한 기호를 숨기며, 뮤직비디오의 명도는 높고 채도는 낮은 것 등이 대표적 '요소'다.

찰리 태프트의 데뷔 뮤직비디오에도 이런 특징들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전 남자친구를 상징하는 귀여운 곰돌이 젤리는 접시 위에서 목이 잘리고, 각자의 안무를 소화하던 세 명의 여성 댄서들은 총을 들고 대열을 맞춘다. 가수의 외양만 빼놓고 보면 이건 그냥 케이팝 비디오다.

찰리 태프트가 동양인 여성이고 한국어로 노래했다면 어떠한 의심도 없이 이 곡은 케이팝으로 분류됐을 것이다. 실제로 현재 SM에 있으면서 케이팝 아티스트로 불리는 외국인 중 솔로 싱글을 낸 가수들, 이를테면 헨리, 앰버, NCT텐 등은 이 논쟁에서 완전히 자유로웠다. 그 점에 있어서 단순히 백인이란 이유로 케이팝 아티스트가 맞는지 논쟁이 붙는 것 자체가 인종차별적이라는 주장은 설득력 있다.

하지만 정치적 공정성을 잠시 접고 바라보면 결국 이 논쟁 자체가 SM의 상술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욕할 것 없다. 상업 음악을 하는 이들이 상술을 부리는 건 무용수가 춤추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일이니. 비윤리적이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SM은 그냥 백인 가수를 데뷔시켰을 뿐이다. 이것으로 논쟁을 만드는 몇몇 이들이 비윤리적이라면 모를까 SM은 비윤리적이라고까지 보기는 어렵다. 좀 얄미울지는 몰라도.

곡은 지난 7월 28일 발표됐고 논쟁은 '이 곡을 케이팝이라고 보지 말고, 한 곡의 괜찮은 아르 앤드 비로 생각하자'는 쪽으로 좁혀지는 양상이다. 이 노래를 굳이 케이팝으로 부르겠다는 이들은 인종주의자로 내몰리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이 곡을 '굳이' 케이팝이라고 부르고 싶다. 케이팝과 팝의 차이는 가수 및 스태프의 국적과 인종만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도 인터넷엔 자신을 빅뱅 팬, 소녀시대 팬이 아닌 '케이팝 팬'으로 부르는 이들이 수두룩하다. 이들은 왜 한국 음악을 좇을까? 그 안에 서린 우리 민족의 흥을 귀신같이 알아챈 것일까? 천만에. '아직은' 뭐라고 정리하기 어려운 '케이팝스러움'이 이들을 모은다고 봄이 더 타당하다.

그럼 그 케이팝다움이란 것은 결국 무얼까.

물음표 아닌, 느낌표

결국, 우리는 처음 던졌던 질문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찰리 태프트의 데뷔곡은 케이팝의 정의란 무엇인지, 케이팝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케이팝의 무엇을 좋아하는 것인지. 케이팝을 케이팝이라고 부르게 만드는 요소들은 가수와 소속사의 국적 외에 또 무엇이 있는지에 대한 '성공적인 물음표'가 됐다.

그러나 작업의 완성도는 물음표가 아닌 느낌표다. 껄끄러운 설전을 일으키고 말았지만, 그가 케이팝 가수 같은 메이크업을 하고 케이팝 뮤직비디오 특유의 부드러우면서도 밝은 조명 아래서 영국식 영어로 노래하는 것을 보고 있으면 그냥 즐겁다. 곡 역시 정통 리듬 앤드 블루스의 공식을 따르면서도 8bit 음과 죽죽 밀리는 듯한 전자음을 덧대 모던함을 더했다. 정확히 필요한 만큼의 감정만 싣는 찰리 태프트의 창법 덕에 여러 번 듣기에도 부담이 없다.

싸이는 최근 '강남스타일의 무엇이 그렇게 특별했는지 아직도 모른다'는 인터뷰를 했다. 이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케이팝인가' 하는 질문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인들은 '두유 노 강남스타일'을 그토록 애타게 물어댔지만 이건 그냥 '알고 모르고'의 문제가 아니었던 셈이다.

소속사가 어디인가와는 별개로 곡에는 분명 케이팝의 흔적이 있고, 퍼포머가 영국 백인 여성임을 고려하고도 이 곡을 케이팝이라고 부르는 순간 우리는 '브릿 팝'이나 '디트로이트 사운드'같은 하나의 '장르'를 얻게 된다. 다소 무리해서라도, '이것은 케이팝이 맞는가?' 하는 SM의 얄미운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하고 싶은 건, 이제 케이팝이 그 정도 위상까지 가 주었으면 하는 바람도 담겨 있기 때문이다.


찰리태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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