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군함도>의 포스터. 이 작품을 일본에서 불편해 하고 있다.

영화 <군함도>의 포스터. 이 작품을 일본에서 불편해 하고 있다. ⓒ CJ 엔터테인먼트


영화 <군함도>에 대해 일본 정부가 불편한 시선을 보내고 있다. 영화 속 강제노역을 근거로 한국인들이 배상금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까 우려하는 눈초리다.

일본 언론들의 보도에 따르면, 내각 총무이자 정부 대변인인 스가 요시히데 내각관방장관은 "감독 자신이 창작이라 말했다"면서 "징용자 문제를 포함해 일·한 간의 재산청구권은 해결됐다"고 기자회견에서 언급했다. <군함도> 속 사건이 식민지배 배상문제와 연결되지 않도록 차단하고 있다.

군함도 강제노동은 형식상으론 미쓰비시 기업에 의해 수행됐다. 그런데도 일본 정부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미쓰비시가 자신들의 대리인이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책임을 피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외무성 대변인(보도관)의 언급은 더욱 구체적이다. 외무성 홈페이지에 따르면, 마루야마 노리오(丸山則夫) 대변인은 스가 관방장관의 언급에 더해 "사실을 반영한 기록영화 부류가 아니다"라며 "일·한 쌍방이 미래지향적 관계를 발전시키려 노력하는 상황에서 이 건이 그런 노력에 물을 끼얹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덧붙였다.

마루야마 대변인 역시 "일·한 간의 재산 및 청구권 문제는 일·한 청구권협정에 의해 완전하면서도 최종적으로 해결됐다"고 강조했다. 배상금이나 국가 위신 문제로 연결되지 않을까 염려하고 있다.

아베 신조 집안과 <군함도>

 <군함도>에 관한 마루야마 외무성 대변인의 언급. 청색으로 커서 친 부분. 오른쪽 사진은 외무성 홈페이지.

<군함도>에 관한 마루야마 외무성 대변인의 언급. 청색으로 커서 친 부분. 오른쪽 사진은 외무성 홈페이지. ⓒ 일본 외무성


관방장관과 외무성 대변인이 저토록 선제적 방어 태세를 취하는 것은 스스로 양심이 없음을 드러내는 일이다. 자신들의 수반인 아베 신조 총리의 집안이 강제징용 문제와 무관치 않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일본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선제적 방어 태세를 갖추는 게 아니다. 사과하고 배상할 의사가 없으면 그냥 가만히 있어야 한다.

일본이 아시아 침략을 벌일 때 경제정책 및 식민지 주민 동원 정책에 결정적 역할을 한 관료가 있다. 아베 신조의 외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다. 1945년 A급 전범 혐의로 체포된 인물이다.

친할아버지도 아닌 외할아버지의 전쟁범죄를 갖고 아베 신조를 비판할 수 있을까? 외할아버지보다 친할아버지가 친숙한 사회는, 여성과 관련해 출가외인 관념이 존재하는 사회다. 한국보다 훨씬 오랫동안 데릴사위 문화가 존재한 일본에서는 그런 출가외인 관념이 약했다. 그래서 친할아버지보다 외할아버지가 친숙한 경우가 훨씬 많았다.

아베 신조 집안의 가업은 정치다. 그는 아버지 아베 신타로의 정치 가업을 잇고 있다. 아베 신타로는 10선 의원으로 자민당 총재와 장관직을 역임했다. 아베 신타로가 정치 가업을 갖도록 만든 장본인이 바로 장인인 기시 노부스케다. 장인의 가업을 이어받았으니 아베 신타로는 기시 노부스케의 정치적 데릴사위다.

이런 집안에서 태어났으니, 아베 신조한테는 기시 노부스케가 친숙할 수밖에 없다. 아베 신조 역시 기시 노부스케의 도움을 받아 정치에 입문했다. 노다니엘의 <아베 신조의 일본> 제2장에 이런 대목이 있다.

"대개 장남이 가업을 물려받는 일본의 풍토 속에서 둘째인 신조가 가업 특히 아버지의 선거 지역구를 물려받아 국회의원이 된 데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가장 두드러지는 점은 그의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의 총애이다."

아베 신조는 기시 노부스케의 은혜를 입었을 뿐 아니라 동일한 정치적 목표까지 갖고 있다. A급 전범 혐의로 감옥살이하다가 미 군정의 배려로 불기소처분을 받고 석방된 기시는, 자기 때문에 군인으로 끌려가고 강제징용을 당하고 위안부로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사죄나 반성을 하지 않았다. 그런 상태로 군국주의와 군사 대국화를 추진했다. 그가 못 이룬 꿈을 마치 선왕의 유조처럼 떠받들며 일본을 그쪽으로 이끄는 지도자가 바로 아베 신조다.

<군함도> 속의 강제징용에 대해 기시 노부스케한테도 책임이 있다. 아베 신조는 그런 기시에 힘입어 지도자가 됐고 또 기시의 꿈을 대신 이루려 하고 있으니, 그 역시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다. 그런데도 일본 정부가 선제적 방어태세를 취하고 있으니, 비양심적 집단이라고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아베의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와 강제징용

 기시 노부스케. 아베 현 일본 총리의 외할아버지인 인물이다.

기시 노부스케. 아베 현 일본 총리의 외할아버지인 인물이다. ⓒ 위키 커먼스


명성황후가 시해된 다음 해인 1896년, 일본 본토 서남쪽 끝인 야마구치 현에서 기시 노부스케가 출생했다. 아버지는 평범한 시청 공무원이었다. 당시의 조선식 표현으로 바꾸면, 관아 아전이었다.

머리가 뛰어나고 책을 좋아해 성적이 우수했던 기시 노부스케는 1917년 도쿄제국대학 법대에 들어갔다. 그리고 대학 3학년 때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했다. 고시 공부만 열심히 한 게 아니라 학교 공부도 열심히 해서 법대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농상무성을 선택했다. 최고 엘리트들이 선호하는 내무성을 버리고 비인기 관청을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기시의 결정은 결과적으로 대단한 선택이었다. 비인기 관청에 들어간 게 출세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당시 일본은 군국주의의 길로 나아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농상무성에 들어가고, 여기서 분리된 상무성에 배속된 그는 일본 경제정책을 군국주의로 전환하는 데 기여했다. 이를 발판으로 기반을 굳힌 그는 서른두 살 때인 1927년에는 국가 경제정책을 실무적으로 주도하는 위치에 오르게 됐다.

제국 일본은 대륙침략의 전진 기지인 만주국에 그를 파견했다. 1936년 그는 이 괴뢰국의 산업부 차관이 됐다. 차관이지만 실질은 장관 이상이었다. 그는 만주국 주민과 자원을 일본의 전쟁 수행을 위해 동원하는 한편, 만주국이 대동아공영권 건설에 이바지하도록 만들었다.

만주국에서 일본으로 복귀한 1941년 이후에는 상공부 차관 및 장관으로서 일본 국민 및 식민지 주민과 산업 자원들을 전쟁 중심으로 재편하는 데 힘썼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패망 뒤 A급 전범 혐의자로 지목됐다.

그랬는데도 미국의 후원으로 불기소 처분을 받고 1953년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55년에는 자민당 창당을 주도해 전쟁 이후 일본의 역사를 새로 썼다. 56년에는 외무장관이 되고 57년에는 총리가 되었다. 총리가 된 뒤 역점을 둔 작업이 외손자 아베 신조가 지금 하는 일들이다. 총리가 된 기시 노부스케는 군국주의 및 군사 대국화의 부활을 추진했다. 그가 일을 완수하지 못했기에 외손자가 그 유업을 향해 분투하고 있다.

기시가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짜놓은 국가정책 가운데 대표적인 게 통제경제다. 일본과 식민지의 인적·물적 자원을 전쟁 중심으로 재편하는 것이었다. 전쟁 수행을 위해 이른바 산업 합리화를 하자는 것이었다. <일본연구논총> 제15호에 실린 국방대학교 김준섭 교수의 논문 '기시 노부스케: 전후(戰後) 일본의 우익 정치인의 원형'에 이런 대목이 있다.

"기시는 개별 기업의 자유경쟁은 결국 국민경제에 해를 끼치게 되며, 이는 국제경제체제 속에서 그 국민경제의 패배를 초래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와 같은 일을 막기 위해서는 결국 국민경제 전체를 하나의 단위로 보고 이를 효율적으로 운용하기 위해서 통제할 필요가 있다고 본 것이다."

이런 통제경제 논리에 따라 미쓰비시·닛산·미쓰이 등이 정부와 혼연일체가 되어 전쟁 수행에 기여했다. 나아가 이 논리는 경제뿐 아니라 정치·문화·교육·일상의 전 영역에서 일본과 식민지 주민들을 통합하는 정책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렇게 모든 면에서 국가를 중심으로 통합된 상태를 국방국가라고 불렀다. 상공성에서 기시 노부스케가 작성하여 기획원에 넘긴 국방국가의 이미지가 1941년 기획원연구회가 펴낸 <국방국가 강령>에 소개되어 있다. 이 책은 위의 논문에 인용돼 있다.

"정치도 외교도 경제도 과학도 사상도 가정생활도 영화도 음악도 스포츠도 전쟁에 종속되고 국방에 기초하여 존재해야 한다. 국민은 한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국가와 함께 있으며 국가의 태반 속에서 영구히 살아가야 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이렇게 기시는 개인과 기업이 모든 영역에서 국가의 부속품이 되어 전쟁 수행에 참여해야 한다는 이론을 국가정책으로 승화시키는 데 기여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조선인들이 군함도의 미쓰비시 해저 탄광에 끌려가, 제대로 된 봉급은 물론이고 기본적인 의식주도 제공되지 않는 상태에서 마치 기계 부속품처럼 강제로 석탄 채굴에 종사하며 일본의 전쟁 수행에 참여했다.

물론 기시 노부스케가 강제징용 노동자들을 군함도까지 직접 인솔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가 그런 방향으로 일본의 국가정책을 유도했다. 그런 사람의 외손자로 태어나고 그런 사람의 은덕에 힘입어 국회의원이 되고 출세 가도를 달린 인물이 바로 아베 신조 총리다.

따라서 아베 신조 역시 군함도에 관한 원죄를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아베 신조와 그의 내각이 배상금 문제를 차단하고자 영화 <군함도>가 사실이니 아니니 운운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 일이다.

군함도 기시 노부스케 아베 신조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