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의! 이 기사에는 <레이디 맥베스>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 <레이디 맥베스>

영화 <레이디 맥베스> 포스터. 다양한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는 작품이다. ⓒ 씨네룩스


한 소녀가 그녀의 작은 상체보다 두 배도 더 큰 베일 안에서 눈을 요리조리 굴린다. 소녀 옆에는 차려입은 한 남자가 서 있다. 성당에서 진행되는 그녀의 결혼식인 것 같지만, 하객도, 음악도 부재한 이상한 의식이다.

예식이 끝나고 소녀 캐서린은 저택에서 하녀가 치장해 주는 대로 입고 첫날밤에 든다. 남편은 멀찌감치에서 소녀에게 잠옷을 벗으라고 명령하고는 그녀의 벗은 몸을 응시하고 말도 없이 잠이 든다. 그 이후로도 남편은 캐서린과 의도적으로 관계를 피하고 그녀의 눈앞에서 자위하는 것으로 그녀를 기만한다. 영화는 곧 이 이상한 결혼의 실체를 드러낸다. 소녀는 양가 사이에 맺어진 재산 거래의 계약으로 온 것이고, 그녀의 남편은 원치 않지만, 악마 같은 아버지의 명을 따라 억지로 결혼하게 된 것이다.

탄광을 소유하고 있는 이 가문의 남자들은 캐서린에게 방 안에서 나오지 말라는 '명'을 내리고 긴 여정을 떠난다. 이를 어기고 캐서린은 들판으로, 집안의 곳곳으로 매일 탐험을 떠난다. 이 대목부터 영화는 <오즈의 마법사>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같은 소녀의 출가 서사를 전복한다. 19세기 영국을 배경으로 사춘기를 막 지난 소녀가 집을 나가는 이야기가 아닌, 반대로 집 안에 강제로 남게 되어 일어나는 사건들이 이 영화의 기본 골자다.

 영화 <레이디 맥베스>

성당에서 진행되는 그녀의 결혼식인 것 같지만, 하객도, 음악도 부재한 이상한 의식이다. ⓒ 씨네룩스


결혼 첫날밤에 방치된 소녀, 그녀의 일탈

수많은 인간 군상과 사회의 창조물들을 경험할 수 있는 집 밖 세상이 아니라면 집 안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바로 욕망이고 사랑이다. 매일 하루를 숨통을 조르는 코르셋으로, 고문과도 같은 빗질로 시작했던 소녀가 이 모든 것을 거부하고 '맨몸'으로 처음 만나게 되는 사람은 집안일을 도와주는 흑인 혼혈 하인 세바스찬이다. 하인이면서 유색인종인 비혼자 세바스찬은 모든 면에서 소녀의 반대선 상에 있는 사람이지만, 그렇기에 소녀의 이상(理想)을 채워줄 유일무이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들이 종속된 인종, 계급, 제도는 그들이 서로의 옷을 벗기듯 한꺼번에 너무나도 쉽게 무너진다.

이들의 사랑이 커질수록 캐서린은 대담해진다. 중간에 돌아와 그녀의 일탈을 심문하는 시아버지에게 반항하고 그를 죽이기에 이른다. 그녀는 세바스찬과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뭐든지 할 것을 다짐하고 그 후로도 몇 차례의 살인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녀의 선택을 영화는 단죄(斷罪)하지 않는다.

거시적으로 보면 <레이디 맥베스>는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지배적 여성상인 '성녀-창녀(Madonna-Whore Complex) 콤플렉스를 다룬다. 1800년대 말부터 여성의 권리와 성적 자유로움을 주장하는 움직임들이 생겨나고 이러한 움직임들이 빅토리아 문학(Victorian literature)에서는 성녀가 창녀로 전락하는 '추락하는 여성(fallen women)'의 플롯으로 드러났다. 이러한 문학들과 공통점을 가진 영화로 한국의 호스티스 문학/영화(시골 처녀가 도시로 가서 성 노동자가 되는 이야기)나 미국의 1930년대 추락 여성 사이클(fallen women genre: 가정주부가 집 나가서 겪게 되는 고생담)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흥미로운 것은 호스티스 문학/영화나 추락 여성 영화들과는 달리 빅토리아 여성의 '성적인 추락담'은, 많은 경우 여성의 수난사가 아닌 모험담 혹은 독립성을 찾아가는 방식으로 은유 된다. 이런 맥락에서 Madonna(성녀)가 Whore(창녀)가 되는 것은 불명예가 아닌 시대적 변화에 맞는 마땅한 섭리였을 것이다(빅토리아 문학에서의 여성 재현을 다룬 연구 및 글은 Margaret Attwood 와 Ralph Wardlaw 참조).

<레이디 맥베스>가 훌륭한 것은 이러한 빅토리아 시대의 여성성(female sexuality)의 다이내믹을, 혹은 크게 말해 인간 '제도권 안에서의 성'이라는 주제를, 계급과 인종의 거대 담론과 함께 다루어 낸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영화는 박해당하는 여성의 성, 혹은 그것을 상징하는 캐릭터를 통해 인종과 계급적인 박해로 희생당하는 이들을 조명한다.

 영화 <레이디 맥베스>

그녀는 세바스찬과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뭐든지 할 것을 다짐하고 그 후로도 몇 차례의 살인을 주저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녀의 선택을 영화는 단죄(斷罪)하지 않는다. ⓒ 씨네룩스


사랑을 위해 억압하는 남자들을 처단하는 캐서린

캐서린은 본인의 사랑을 추구하기 위해 자신을 억압하는 남자들을 처단한다. 어떻게 보면 제도권에 맞서는 영웅이 해야 할 마땅한 행보처럼 보이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러나 영화의 시점적 혹은 사고(思考)의 반전은 캐서린이 살인죄에 대한 처벌을 피하고자 택하는 선택에서 일어난다. 그녀는 죄를 벗기 위해 그녀가 가진 백인, 상류층 계급을 이용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질식해 가던 사회와 그곳의 원칙이 이러한 존재적 특권을 가진 그녀에게 승리의 손을 들어준다.

따라서 <레이디 맥베스>는 젠더에 관한 영화(만)는 아니다. 영화는 극 중 캐서린을 단죄하지 않음으로써 이 사회의 많은 것을 단죄하고자 한다. 비교적 짧은 시간인 90분을 가지고 영화는 참 많은 이야기를, 혹은 '두꺼운' 주제를 섬뜩하게도 그려낸다.

또한, 주목할 점은 영화의 묘사적 특성(descriptive mode)이다. 서사의 폭에 비해 영화는 놀라울 정도로 폐쇄적인 방식으로 보는 이를 '답답하게' 만든다. 가령, 이야기 대부분이 집 안에서 일어나기에 인물들의 동선이 넓지 않은 데다, 가끔 눈을 가늘게 떠야 인물이 보일 정도로 라이팅을 통제한다. 더욱이 인물들의 대화가 그들이 유지하는 위계에 근거한 명령법(남편/시아버지/캐서린 vs. 하인들/캐서린)으로 이루어져 있어 간결하지만 이러한 제한성은 등장인물들이 가진 제도적 장애, 혹은 그것에서 오는 심정적/시점적 갈등과 일치함으로써 이들이 이끌어 가는 서스펜스의 동력으로 작용한다.

참으로 오랜만에 작은 것에서 엄청난 것을 보았다는 느낌을 준 영화가 아닐 수 없다. 영화의 발전이 기술의 발전과 비례해 왔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으나, 돈 좀 썼다는 이유로 한 나라의 거의 모든 영화관을 꿰차고 있는 몇몇 영화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과유불급. 너무 많고 큰 것에서 질식해 가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단비 같은 작품, <레이디 맥베스>가 많은 이들에 의해 회자하기를 바란다. 오는 3일 개봉.

레이디 맥베스 영화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