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케르크 해안에서 공포에 질린 채 철수를 기다리는 수 만의 영국 병사들

덩케르크 해안에서 공포에 질린 채 철수를 기다리는 수 만의 영국 병사들 ⓒ 워너브라더스 코리아


나는 총성을 들은 적이 있다. 그것도 아주 많은 총성을. 만약 당신이 실제 총성을 들어본 적이 없다면 당신은 총성을 많은 영화나 게임들이 표현하는 것처럼 박력 있고 경쾌한 소리라고 생각하기 쉬울 것이다. 하지만 실제 총성은 훨씬 더 날카로운 금속성과 타격음이 난다. 때문에 총성을 듣게 되면 사실 영화나 게임에서처럼 쾌감은 거의 없고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게 되는 걸 느끼게 된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신작 <덩케르크>(2017)에는 교전 장면이 없다. 그런데 <덩케르크>는 내가 지금까지 만났던 영화들 중 실제 총성(과 그로인해 신경이 곤두서는 경험)을 가장 잘 구현하고 있다. 이 말은 <덩케르크>가 어떤 의미에서 자신만의 방법으로 폭력을 성공적으로 구현한 영화라는 말과 같은 말이다.

<덩케르크>의 첫 장면은 그렇게 신경이 곤두선 채로 시작된다. 덩케르크의 주택가를 걷고 있는 영국 보병들의 등 뒤로 갑자기 총탄이 날아든다. 누가 총을 쏘고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이 영국 청년들은 자신들을 공격하고 있는 존재를 확인할 생각조차 할 수 없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총에 맞지 않기 위해 달리는 것뿐이다. 하지만 등을 보이고 있는 사람만큼 쉬운 표적도 없다. 결국 하나 둘 총에 맞아 쓰러지고 동료들이 먼저 총에 맞은 덕에 마지막까지 남은 토미(핀 화이트헤드 분)는 가까스로 철수 집결지인 덩케르크 해안에 도착한다. 하지만 덩케르크 해안에는 이미 공포에 질린 수만 명의 영국 병사들이 조국으로 철수를 위해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에게 전쟁이란 무엇일까. 아마도 그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벗어나야만 하는 상황일 것이다.

전쟁이라는 재난

 <다크나이크>(2008), 수퍼히어로 영화이자 동시에 포스트 9.11의 재난 영화

<다크나이크>(2008), 수퍼히어로 영화이자 동시에 포스트 9.11의 재난 영화 ⓒ 워너브라더스 코리아


여러 비평가들과 리뷰어들이 <덩케르크>를 일종의 재난 영화라고 평했다. 나도 이런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사실 크리스토퍼 놀란이 전쟁을 재난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그리 놀라워하거나 새롭게 생각해야 할 필요는 없다. 놀란의 출세작인 <다크나이트> 시리즈는 많은 골수팬들이 열광하는 수퍼히어로 영화이기는 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뉴욕과 꼭 닮은)고담시와 시민들에게 벌어지는 테러 그리고 사력을 다해 가까스로 실패를 피할 뿐인 암울한 영웅을 다루는 포스트 9.11의 재난 영화들이었다.

그런데 이번 <덩케르크>는 얼마나 더 재난 영화에 가까운지, 영화에는 심지어 제3제국군 병사가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덩케르크 해안에서 철수를 기다리는 병사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제3제국군 전투기와 폭격기마저도 대부분 익스트림 롱쇼트로 매우 짧게 스쳐지나가 버려서 실제로는 피아 분간도 잘 되지 않는다. 해안과 잔교 위의 영국 병사들을 노리고 이루어지는 폭격은 무차별적이지만 동시에 너무 듬성듬성 이루어져서 정말로 우연적인 자연재해에 가깝게 그려진다.

 군함의 침몰로 철수에 실패하고 버려진 어선에 숨기 위해 이동하는 영국 병사들

군함의 침몰로 철수에 실패하고 버려진 어선에 숨기 위해 이동하는 영국 병사들 ⓒ 워너브라더스 코리아


크리스토퍼 놀란은 <덩케르크>에서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폭력을 다루면서 사실상 폭력을 행사하는 주체에 대한 묘사를 그냥 생략해 버리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즉 지금까지의 전쟁영화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처절하게 총을 잡고 맞서서 교전을 수행하고 있었다면 <덩케르크>는 반대로 필사적으로 전쟁으로부터 도망치려는 이상한 전쟁영화다. 아마도 놀란은 종전 70년이 넘은, 그래서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인류역사상 최악의 전쟁 중 한 순간을 영화로 만들면서 또 다시 도식적으로 피·아를 구분해 영화적으로 표현하는 일은 이제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거나 또는 시대에 맞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전쟁에는 실제로 여러 얼굴이 존재하며 그 중 재난의 얼굴을 하고 있는 전쟁을 영화에 담고 싶을 때 놀란이 선택한 이런 생략의 방법들은 전쟁영화의 새로운 창조적인 문법으로 평가 받아야 마땅하며 또한 정치적으로 보다 효율적이다.

다르게 흐르는 시간들, 그리고 만남과 구원

 시간에 관한 사유와 습작 <인터스텔라>

시간에 관한 사유와 습작 <인터스텔라> ⓒ 워너브라더스 코리아


나는 관객들로 하여금 온갖 물리학과 우주과학에 관한 이론들을 입에 오르내리게 만들 정도로 호들갑스러웠던 놀란의 전작 <인터스텔라>(2014)를 봤을 때 다소 실망했을 뿐만 아니라 굉장히 이상한 영화라고 생각했다. 주인공 쿠퍼는 인류를 구할 임무를 가지고 우주로 떠나지만 임무는 거의 시작과 함께 시간이라는 재난을 맞이하고 쿠퍼의 임무는 시작부터 패색이 짙어진다. 종국에는 쿠퍼가 스스로 블랙홀로 뛰어 들어가 블랙홀 속에서 과거의 자신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딸 머피에게 인류가 생존할 수 있는 데이터를 모스부호로 전달해 종말에서 인류를 구한다는 이야기이다.

이 이상한 영화는 감동적인 희생과 신비한 우주를 담고 있다고 뽐내고 있었지만 사실상 이야기 구조는 심각하게 균형이 어긋나 있었고 결말은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에 가까웠다. 때문에 나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놀란이 각본 과정에서부터 이 영화를 굉장히 급하게 마무리하고 싶어 한다는 의혹을 품었다.

그런데 이번에 도착한 <덩케르크>라는 결과물은 놀란이 <인터스텔라>를 통해서 시간에 대한 사유를 획득했다는 걸 증명하고 있다. 놀란이 자막으로 태연하게 설명하다시피 <덩케르크>는 잔교(the mole)에서 토미와 영국 병사들이 탈출을 시도하고 실패하면서 버티어내는 일주일이면서 동시에 도슨이 영국 병사들을 구하기 위해 바다(the sea)에서 보내는 하룻동안의 이야기이지만 영국 공군 파리어, 콜린스가 덩케르크 해안의 병사들을 보호하기 위해 공중전(the air)을 벌이는 단 한 시간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즉 <덩케르크>에서는 정해진 런닝타임 동안 교차되어 보여지는 등장인물들의 시간들이 사실상 서로 다른 속도로 흐르고 있는 것이며 각각의 운동을 진행해서 가까스로 동일한 시간에 덩케르크 해안에 도착해 서로 만나게 되는 이야기다. 따라서 놀란은 사실상 <덩케르크> 자체의 시간적 구성을 <인터스텔라>에서 쿠퍼가 과거의 자신, 그리고 미래의 딸과 만나 인류를 구원하게끔 했던 블랙홀 내부의 테서렉트(Tesseract)로 만들었다. 그리고 <덩케르크>에서도 역시 필요한 모든 사람들이 동일한 시간에 도착해서 서로 만나게 됐을 때 비로소 구원 역시 도착한다.

덩케르크 크리스토퍼 놀란 인터스텔라 다크나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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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의 공허한 공포를 떠올린 나는 다시금 마음을 다잡고 어디건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 보기로 결심했다" -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 「그 남자」

음악이 주는 기쁨과 쓸쓸함. 그 모든 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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