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슬란드 밴드, 시규어 로스

아이슬란드 밴드, 시규어 로스 ⓒ sigur-ros.co.uk


고등학교 3학년으로서 보내는 늦가을, 조금 정확히 말하면 10월 말쯤이니 아직 겨울이라고 하기는 이르지만, 늦은 저녁 학원이 끝나면 꽤 쌀쌀한 기운이 주변을 채우기 시작했을 무렵.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 다니던 학원은 이제 나를 서서히 풀어주기 시작했다. 풀어준다는 게 조금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사실 그리 특별할 것도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수능이 가까워지면 질수록 오히려 준비할 것들은 적어진다. 그래서인지 뒤로 가면 갈수록 내가 학원에서 나오는 시간도 점점 빨라졌다. 그렇다고 엄청 빠른 건 아니고, 한 2, 30분 정도.

그런데 하루는 학원을 나오는 순간, 이상하게 집까지 걸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같이 타고 다니는 버스가 지겨워져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단순히 집에 가서 책상에 앉아있어야 하는 게 싫어서였을 수도 있다. 학원에서 집까지 걸어가려면 30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기 때문에 어차피 학원이 평소처럼 늦게 끝났으면 집에 가는 시간은 똑같았을 거라고 스스로 핑계를 대면서, 그렇게 발걸음을 뗐다.

노래가 노래로 다가오다

그 당시에도 난 이어폰을 달고 사는 녀석이었던지라 어김없이 이어폰을 귀에 꽂아 넣었다. 곧이어 나름 큰맘 먹고 비싼 돈 주고 산 내 소중한 이어폰에서는 시규어 로스의 'Untitled 3'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날 노래로 울컥하게 만들었던 밴드, 처음으로 노래를 들으며 동시에 뭔가를 하는 것이 방해라고 느껴지게 했던 밴드, 그리고 처음으로 노래에서도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준 밴드, 그것이 바로 시규어 로스이다. 처음 시규어 로스를 접하게 되었던 음악인 'Hoppipolla'의 그 맑고 선명한 피아노 소리와, 점차 고조되며 감정을 울렁이는 섬세한 멜로디는 노래가 끝난 후에도 한참을 여운에 잠겨있게 만들 정도로 깊고, 아름다웠다.

일렉트릭 기타와, 베이스, 드럼, 때때로는 피아노까지. 전형적인 밴드 악기들로 이루어진 보편적인 록음악만을 들어왔던 내게 시규어 로스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분명 듣고 있는 건 밴드 음악인데도 마치 오케스트라의 연주회에 와있는 듯한, 그런 신기하고도 몽환적인 체험 덕에 내가 그들 음악에 빠져드는 것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느새, 누군가 내게 가장 좋아하는 밴드가 무어냐고 물어보면 난 자신 있게 이들의 이름을 말하게 되었고, 이는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고 있다.

그렇게 한창 시규어 로스의 매력에 푹 빠져있을 때 어떤 앨범 하나가 내 시선을 끌었다. 흰색과 검은색이 얼룩덜룩 뒤섞여있는 왠지 모르게 신비로운 인상을 주는 앨범 커버가 대문을 장식하고 있는 앨범. 바로 시규어 로스의 3집 < ( ) >이었다. 앨범과 노래의 제목들이 모두 'Untitled', 무제라니 이건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이런 건 지금까지 듣도 보도 못한 것이었다.

곡의 이름이자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는 무제는 어쩌면 하나의 큰 도전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오로지 노래 그 자체로만 다가가겠다는 관객을 향한, 그리고 자기 자신들을 향한 음악적 도전. 그 난데없고 특이한 도전에 매료된 나는 망설일 것도 없이 앨범의 첫 트랙을 재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라 믿는다.

 시규어 로스의 3집 앨범, 앨범과 수록곡들 모두 제목이 없다.

시규어 로스의 3집 앨범, 앨범과 수록곡들 모두 제목이 없다. ⓒ sigur-ros.co.uk


무제의 힘

그런 < ( ) >의 노래들 중, 마찬가지로 제목이 없는, 그저 'Untitled 3'라고 써 있을 뿐인 3번째 트랙은 처음 'Hoppipolla'를 들었던 때 못지않은 신선한 충격을 준 곡이다. 애초에 아이슬란드 밴드인 데다가 평소에도 뜻을 가지고 있지 않은 운율에 맞춘 말(희망어)들로 가사를 쓰고 있으니 노래의 말뜻을 이해하려 드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지만, 이 경우에는 다르다. 'Untitled 3'는 아예 가사가 없다. 6분을 넘어가는 짧지 않은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이렇다 할 가사가 한 마디도 나오지 않는다. 어쩌면 '소리'로만 감정을 전달하겠다는 앨범의 의미에 가장 걸맞은 곡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초반부의 피아노는 잔잔하게 흘러간다. 반복적인 멜로디라인을 따라 진행되면서 불규칙적인 변칙이 때때로 감정을 환기시킨다. 항상 들을 때마다 선율의 흐름을 따라가 보려고 애쓰지만, 어찌된 일인지 매번 실패한다. 피아노 뒤편에서 서서히 등장하는 현악의 차가운 사운드는 이질적으로 다가오면서도 왜인지 자연스럽게 노래에 녹아든다. 큰 변화 없이 차분하게 반복되던 멜로디를 듣고 있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감정이 서서히 고조된다. 그렇게 고조된 감정은 후반부에서 음계를 올려 연주되는 피아노의 선율에서 절정에 이른다. 그리고 서서히, 그리고 천천히 다시 사그라지게 된다.

'Untitled 3'에는 시규어 로스의 다른 노래들에서 볼 수 있는 감정의 폭발적인 증폭은 느끼기 어렵다. 반복되는 멜로디가 중심이 되어 전체적으로 곡 구조도 평범하다. 하지만 그 깊이는 결코 얕지 않다. 'Untitled 3'의 감정 선은 마치 파도와도 같이 밀려왔다가, 쓸려 내려가고를 반복하면서 점점 커진다. 남들이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서서히. 그러다가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면 그 파도는 커질 대로 커져서 우리를 단숨에 삼킨다. 일단 한번 감정의 파도에 잠겼다가 떠오른 다음에는, 온 몸을 적신 파도의 잔향들 때문에 그 여운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게 노래의 여운은 강렬하게 남는다.

이 곡의 느낌은 매우 차갑다. 나뿐만 아니라 이 곡을 들은 사람들이라면 모두 공감할 것이다. 차가운 동시에 약간은 쓸쓸하기도 하다. 그 차갑고 쓸쓸한 분위기에, 앨범 커버에 떡하니 자리하고 있는 괄호 속의 공백처럼 공허함마저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노래가 끝나면 위로받았다는 느낌이 남아있게 된다. 그건 아마도 나 자신이 그동안 표현하지 않고 꾹꾹 눌러 왔던 쓸쓸함과 공허함을 노래가 대신 분출시켜 버린 탓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날 걸었던 쌀쌀한 밤공기 가득한 거리에 그토록 이 노래가 어울렸던 걸지도 모르겠다. 고등학교 3학년, 가을의 끝자락이자 겨울의 시작점에서 이제껏 지내온 시간들 중에 가장 불안하고, 불투명하며, 불확실한 시기를 맞서며 집까지 걸어가는 그 조그마한 녀석이 느꼈을 복잡스런 감정에 이 제목도 없는 앨범의 제목도 없는 3번째 순서의 노래는 적지 않은 위로로 다가왔다.

어느 때부터인지 날이 추워지기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이 노래를 찾게 된다. 다시 한 번 이 깨끗하고 차가운 사운드에 몸을 맡겨 묵은 감정을 씻어내고 싶어서인지, 아니면 그저 단순히 분위기 때문인지 정확히 말할 순 없지만 이 노래가 내게 있어 소중한 배경음악의 한 트랙이 되었다는 것만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시규어 로스 - 'Untilte 3' 듣기




시규어 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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