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밋밋한 일상의 흔적만 모아 올리는 곳이 있다. 페이스북 페이지 '무자극 컨텐츠 연구소'다.
 밋밋한 일상의 흔적만 모아 올리는 곳이 있다. 페이스북 페이지 '무자극 컨텐츠 연구소'다.
ⓒ 김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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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먹은 뒤의 만두판, 내일 신을 양말, 빨래 건조대에 가지런히 널려있는 수건, 살짝 열어놓은 현관문. 요즘 SNS 문법에 따른다면, 정사각형 프레임 안에서 잘려나가야 마땅한 풍경이다. 그런데 이런 밋밋한 일상의 흔적만 모아 올리는 곳이 있다. 페이스북 페이지 '무자극 컨텐츠 연구소'다.

지난 6월 말 만들었으니, 페이지가 생긴 지 이제 겨우 한 달 남짓. 그런데도 벌써 반응이 뜨겁다. 25일 기준, 페이지 좋아요 수는 1만 6564개에 이른다. 20대 팔로워가 압도적이다.

"디시인사이드에 식물갤러리가 있다면 페이스북엔 무자극 컨텐츠 연구소가 있다"
"정말 이러다가 노벨평화상도 받을 페이지야... 심신의 안정을 주는 걸"
"탈모가 나았다"

적나라하고 현실적인 사진에, 별거 아닌 설명. 힐링을 노린다기엔 너무 날 것의 이미지다. 보기만 해도 싱거운데 왜 이토록 사람들의 마음을 끈 걸까. 지난 24일, 페이지 관리자(아래 '무자극 관리자')와 서면 인터뷰를 진행했다.

자신을 20대 후반 남성이라고 간결하게 설명한 그는 페이지와 꼭 닮았다. '노잼'이라고 놀리기엔 그 어떤 질문에도 흔들리지 않는 모습이 너무 일관적이어서 경이롭다고 할까. 실제 그는 '이건 너무 자극적'이라는 독자의 도발에도 아랑곳 않고 침착하게 답글을 단다. "마인드 컨트롤 하십시오."

"사실 처음 페이지를 만들었을 때 계정명은 @ihatemsg(아이 헤이트 엠에스지)였어요. 조금 과격했죠? 그런데 생각해보니 저는 msg를 싫어하는 사람도 아니고, 이 페이지를 만들기로 결심한 이유도 msg, 즉 자극적인 컨텐츠를 다 없애버리겠다는 것도 아니더라고요."

쇼파에 누워 지구 반대편 소식을 접하고, 옆집 누구네가 어디로 휴가 가는지까지 알 수 있는 공간. SNS는 분명 매력적인 도구지만 그만큼 피로감을 준다. 과장된 이미지, 영상이 난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SNS를 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앱 삭제를 고민한다. 물론 고민에 그치는 경우가 더 많다. 퇴근하고 집에 누워 무심코 눌러본 영상 클립 하나가, 그날 하루를 통틀어 가장 큰 웃음을 선사하기도 한다. SNS를 통해 얻는 나름의 긍정적 에너지가 있다. 무자극 관리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단순히 앱을 삭제하는 대신, '자극적인 것이 문제라면 그 반대인 무자극으로 균형을 맞춰봐야겠다'는 다소 엉뚱한 결론에 도달한다. "절을 떠나는 대신 작은 변화를 통해 더 나은 절을 만들어보기로 한 것"이 무자극 컨텐츠 연구소의 시작이다. 계정명은 '@msgbalance'(엠에스지 밸런스)로 정했다. 불닭의 매운맛을 중화시켜주고 맛의 재미를 더하는 치즈처럼, 자극을 융화하고 안정을 주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고. 그래서 페이지 카테고리도 '정신 건강 서비스'다.

누군가의 표현처럼, 정말 "단것을 많이 먹으면 다시 짠맛이 그리워"지는 걸까. 보정 하나 하지 않은 평범한 사진에 열광하는 이들이 많다. 광고 없는 광고판, 먹을까 고민하다 그냥 지나친 다코야끼집, 옷을 자주 걸어두는 문고리... '왜 이런 것까지 올리나' 싶은데 의외의 재미가 있다. '왜 이런 게 웃기지' 싶은데 자꾸 보게 된다. '심리적 안정감을 주는 지하철 구석 자리' 사진에는 좋아요가 3145개나 눌렸다. 다른 게시물에도 수백 개의 댓글이 달린다.

밋밋한 일상의 흔적만 모아 올리는 곳이 있다. 페이스북 페이지 '무자극 컨텐츠 연구소'다.
 밋밋한 일상의 흔적만 모아 올리는 곳이 있다. 페이스북 페이지 '무자극 컨텐츠 연구소'다.
ⓒ 페이스북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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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생각한 것보다 훨씬 큰 반응이었죠. '일주일 정도 집중해서 운영해보고 반응이 없으면 접어야지'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3일차부터 조금씩 많은 분들이 찾아주시더니 순식간에 규모가 커지게 되었어요. 그러다 보니 오히려 자신감이 생기더라고요. '페이스북 내에서 꼭 필요한 페이지가 될 수 있겠다'는 작은 확신이요."

물론 페이지 규모가 생각 외로 커지다 보니 나름의 고민이 생겼다. 처음엔 별 생각 없이 사진을 찍어 올렸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고민이 길어지고 기준이 까다로워진단다. 그도 그럴 것이, 독자들은 각 사진을 '매의 눈'으로 분석한다.

"낮에 찍은 사진 같군요. 날씨가 더워 보여 불쾌지수를 올라가게 해 자극적입니다", "집이 있으시다니 없는 분들은 어떡합니까, 자극적입니다"라는 반응처럼, 대개는 장난인 경우가 더 많다. 하지만 조금 욕심부려 웃기려고 의도한 사진에 '이 페이지에 어울리지 않는 게시물인 것 같다'고 날카롭게 지적한 댓글이 달렸다. 그 사진은 결국 삭제했다. 다행히, 아직까지 삭제한 게시물은 딱 한 건이다.

"이 페이지를 좋아해 주신 이유에 부합할 수 있도록 노력 중이에요. 규모가 커지면서 쉽지 않은 부분도 있는데, 힘이 닿는 한 초심(?)을 이어나갈 생각입니다."

현재 페이지 운영자는 무자극 관리자 단 한 명. 그는 꽤나 부지런하다. 사진만 올리는 게 아니라, 독자들의 댓글에 답변을 하고 그들이 보내온 '무자극 사진'을 정리한다. 인스타그램 계정을 운영하는 것도 그의 몫이다. '연구소'라는 이름답게 인기 많았던 게시물의 특징을 분석한 '무 리포트'까지 발행한다. 페이지를 찾는 이들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무자극 컨텐츠를 기대하는지 개인적으로 궁금해 분석하기 시작했단다.

리포트라고 해서 드라마틱한 내용이 있는 건 아니다. 예를 들어 '독자들은 자연에 대한 열망만큼 일상적인 것에 대한 갈증이 있는 것 같다'고 분석하는 정도다. 사진만큼이나 싱거운 내용이다. 소금을 치는 건 역시 독자들이다.

"맞다 연구소였죠"
"이 사람 분석하고 있네 했네 했어 깔깔"
"리포트가 너무 무자극이라서 안 읽게 됩니다."
"바쁜 일이 끝나셨으면 이제 조별과제 같이 하실까요..?"

독자들은 각 사진을 '매의 눈'으로 분석해 필사적으로 자극적인 부분을 찾아낸다. 나름의 놀이다.
 독자들은 각 사진을 '매의 눈'으로 분석해 필사적으로 자극적인 부분을 찾아낸다. 나름의 놀이다.
ⓒ 페이스북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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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표로 끝나는 문장만 가득한 페이스북에 쉼표와 마침표를 찍기 위해" 만든 페이지가 예상치 못하게 인기를 끌고 있지만, 무자극 관리자는 "성장을 위한 성장, 급성장을 위한 무리한 운영 등은 하지 않을 생각"이라고 밝혔다. 페이지 덩치를 키우는 것보다, 개설 의도를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는 것이 목표란다. 친구들을 '꼬시고' 있긴 하지만, 당분간은 지금처럼 혼자 페이지를 운영하게 될 거란다.

이 무던한 사람이 하나 꿈꾸는 건, 그간 올린 사진과 에세이를 엮어 <무자극 사진첩>을 발간하는 일이다. 

"가끔 두고 아무 페이지나 펼쳐 읽어도 기분 좋을 수 있는 책이 있다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된다면 크라우드 펀딩을 해보고 싶은데, 과연 구독자 분들이 얼마나 참여해 주실지도 궁금하네요."

무자극에 열광하던 이들이 이번엔 반응해줄까.


태그:#무자극, #무자극페이지연구소, #페이스북, #S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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