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9월 4일 토요일. 폭염이 한풀 꺾인 이날의 서울은 아주 화창했다. 회사의 초년병이었던 나는 빨리 오전 근무를 마치고 놀러 갈 궁리를 하던 참이었다. 하지만 그 즐거운 상상은 딱 거기까지였다. 곧 사무실에는 어둠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하달된 사장님의 긴급 전달사항 때문이었다.

'사장님의 특별배려로 오늘 오후 관리부서 사원급 직원들을 대상으로 단체 영화관람이 있으니, 열외 없이 참석 바랍니다!'

사장님의 '배려' 의도와는 무관하게, 순간 분위기는 급반전됐다. 사무실 여기저기에서는 탄식이 터져 나오고 술렁이기 시작했다. 게다가 영화를 보고 나오면 사장님의 집단적인 여흥 욕구에 맞춰 재롱까지 부려야 할 생각을 하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우리가 건설회사치고는 규모도 크고 분위기가 참 가족적이지 않나? 그래서 말인데, 신문을 보니까 오늘부터 추억의 한국영화를 상영한다고 하는군. 더군다나 그 영화가 내가 예전에 가장 감명 깊게 본 작품이라, 우리 직원들과 함께 그 향수에 다시 젖어보고 싶어."

 영화 <초우>

영화 <초우>의 포스터 ⓒ 정진우


사장님 때문에 강제로 본 영화 <초우>

그날 오후 서울 시내 아카데미극장에서 영화 <초우>와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됐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당시 알아주는 영화관이었던 이곳에서는 이날부터 추억의 한국영화 특별기획전이 시작됐다. 그리고, 기획전의 첫날 첫 상영작은 바로 <초우>였다.

초우? 국어사전에도 없는 이 생소한 단어에 모두가 '초우가 무슨 뜻이야?'라며 입을 모았다. '장사를 지낸 후 첫 번째로 지내는 제사'를 뜻하는 '초우(初虞)'도 아니고, 그렇다고 '초우(焦憂, 몹시 걱정함)'도 아닌 '초우(草雨)'라니….

제목이야 어찌됐든 드디어 극장에 도착했고, 대형 포스터가 여기저기서 관객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진우 감독의 작품 가운데 최고의 수작으로,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라고 불리던 1960년대의 작품 중에서 가장 손꼽히는 걸작이란다. 설명은 고맙지만, 20대 중반의 젊고 예리한 내 시각으로 짐작했을 때는 상당히 유치찬란한 분위기다. 대략 1966년 작 '막장 멜로드라마' 분위기라고나 할까?

그렇게 크레딧이 올라가며 영화는 시작됐다. 예상했던 대로 시작부터 허황한 청춘의 위장심리를 풍자한 풋내기 연애드라마였다.

자동차 세차공인 철수(신성일 분). 그는 우연한 기회에 프랑스대사의 딸이라는 영희(문희 분)를 알게 된다. 틈만 나면 신분 상승을 꿈꾸며 유달리 출세욕이 심했던 철수는 고급 세단의 주인 행세를 하고 기업가의 아들이라며 신분을 속이고 영희에게 접근한다. 그러나 그녀 역시 그 댁의 식모에 불과했다.

 영화 <초우>

로맨틱한 비가 오는 날의 데이트가 거듭되며 결국 둘은 사랑에 빠진다. ⓒ 정진우


비가 와야만 멋진 프랑스제 고급 레인코트를 몰래 입고 나갈 수 있기에, 신분을 감출 수 있는 비가 오는 날에만 만나기로 약속한다. 로맨틱한 비가 오는 날의 데이트가 거듭되며 결국 둘은 사랑에 빠진다. 둘은 서로 동거하기로 약속하며 꿈에 부푼다.

단란한 가정을 꿈꾸며 영희에게 선물할 홈 세트를 사기 위해 돈이 필요했던 철수는 결국 거리에서 돈을 훔친다. 행인들에 둘러싸여 뭇매를 맞으며 가까스로 도망쳐 나온 철수는 만신창이의 모습으로 영희 앞에 나타난다.

결국, 자신은 가난한 자동차 수리공이라고 고백한다. 이 말에 영희도 자신 역시 대사의 딸이 아니라 말한다. 모든 것이 수포가 되자 철수는 자신의 위선마저 벗어던진 채 욕망이 좌절된 충격에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그녀를 심하게 때리고 강간한 후 표연히 사라진다.

아, '시작은 미미하지만, 끝은 창대하리라'는 말이 이 영화에서 나왔단 말인가? 스토리가 진행되니 '이건 아닌데?'하며 스스로를 채찍질해보지만, 점점 영화에 빠져드는 나를 발견하고 말았다. 그랬다. 풋내기 연애에 불과한 유치하고 뻔한 소재로 시작한 이 단순한 영화를 이토록 깔끔한 대사 처리와 영상으로 마무리할 수 있단 말인가.

 영화 <초우>

30년이나 지났건만 세상의 그 어떤 영화도 흉내를 낼 수 없는 영상의 흐름은 파격적이고 실로 모던하다. ⓒ 정진우


'이건 아닌데'하면서 빠져들다

'이 못난 중생들을 위해 극장까지 끌고 와 주신 사장님 정말 죄송했습니다. 서울시민 2백만 명 중 10만 명이나 봤다는 광고문구는 괜한 말이 아니었습니다, 진심 감사합니다!'

30년이나 지났건만 세상의 그 어떤 영화도 흉내를 낼 수 없는 영상의 흐름은 파격적이고 실로 모던하다. 한국영화 최초라는 카섹스 장면이 등장하여 한두 번 충격을 주긴 했지만, 세세하게 신경 쓴 배경과 소품들은 이마저도 빛나게 했다. 영화 속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영희의 레인코트는 실제로 프랑스에서 공부하고 혜성처럼 나타난 신예 디자이너 앙드레김이 만든 작품이기도 했다.

또, 60년대 서민영화관을 자처했던 TV 수상기 판매점과 전당포, 그리고 남산과 뚝섬에 이어 청평의 옛 모습 등은 우리 사회의 변화와 함께 변한 인간성의 변질을 실감 나게 대변했다. 간혹 나오는 대사 하나하나가 미칠 듯이 오글거리지만, 개봉 당시 만들어진 방화 중 가장 대사가 짧았던 작품이었다.

 영화 <초우>

모든 것이 수포가 되자 철수는 자신의 위선마저 벗어던진 채 욕망이 좌절된 충격에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그녀를 심하게 때리고 강간한 후 표연히 사라진다. ⓒ 정진우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이 영화의 압권은 주제도 등장인물도 배경도 소품도 아니었다.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며 애잔한 첫사랑의 비련을 애절하게 표현한 패티김의 <초우>는 감동 그 자체였다. '가슴속에 스며드는 고독이 몸부림칠 때...'로 시작되는 다소 모호한 의미의 가사는 의도와는 다르게 읽힐 가능성은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게 또 이 노래의 매력이다. 아마도 그래서 한국영화 주제가 중에서 가장 수명이 긴 노래가 아닐까.

그리고, 잊지 못할 주제가 '초우'

비 오는 날, 결국 꿈은 깨졌다. 실망한 그는 분한 만큼 그녀를 사정없이 후려갈기고 미련 없이 돌아선다. 강간을 당하고 버림받는 그녀와 함께 흘러나오는 그 음울한 변주곡. 그래서 작사가는 국어사전에도 없는 <초우(草雨)>로 제목을 붙여 '풀잎 위에 내리는 비'로 표현했을지도 모르겠다. 박춘석 선생이 써 내려간 가사 하나하나에는 당시 사회의 허무하면서도 비극적 분위기를 그대로 담고 있다.

한국 대중가요 역사상 '최고의 디바'로 일컬어지는 가수 패티김이 1962년 발표한, 그의 첫 히트곡 <초우>. 원곡보다 덜하지만, 나윤선이 부른 R&B 버전의 리메이크곡의 허밍은 오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알리와 빅마마가 부른 버전도 우열을 다투기 힘들다. 지금도 즐겨 들으며 가슴을 적시는 패티김의 원곡은 갈수록 메말라가고 변질되는 세상에 대한 저항의 몸부림인지도 모르겠다.

비 오는 날, 아직도 건재한 영원한 디바 패티김의 <초우>가 그립다.

가슴속에 스며드는
고독이 몸부림칠 때
갈길 없는 나그네의
꿈은 사라져
비에 젖어 우네
너무나 사랑했기에
너무나 사랑했기에
마음의 상처
잊을 길 없어
빗소리도 흐느끼네
너무나 사랑했기에
너무나 사랑했기에
마음의 상처
잊을 길 없어
빗소리도 흐느끼네


덧붙이는 글 <내인생의 BGM> 응모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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