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오후 서울 국립중앙도서관 국제회의실에서 열린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이 함께 개최한 ‘예술가의 권익보장을 위한 법 제장방안 토론회’ 현장.

21일 오후 서울 국립중앙도서관 국제회의실에서 열린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이 함께 개최한 ‘예술가의 권익보장을 위한 법 제장방안 토론회’ 현장. ⓒ 이선필


"예술가는 모든 이를 행복하게 한다. 하지만 정작 예술가는 행복하지 않다. 예술가가 행복한 나라를 소망한다."

토론자로 나선 오세곤 극단 노을 예술감독의 말에 청중들 사이에서 박수가 나왔다. 문화체육관광부(아래 문체부)와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이 함께 개최한 '예술가의 권익보장을 위한 법 제정 방안 토론회'자리였다. 21일 서울 국립중앙도서관 국제회의실에서 열린 이날 행사에서 여러 법학자들과 청중들이 법 제정에 대한 다양한 의견과 사례를 교환했다.

발제자로 나선 황승흠 국민대 법학부 교수는 "다른 나라 헌법과 달리 우리나라 헌법이 굉장히 문화지향적"이라며 "(헌법 제22조 2항을 짚으며) 다른 어떤 가치보다 문화나 예술을 진흥하도록 규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해당 조항은 모든 국민의 학문과 예술의 자유를 규정한 1항에 이어 저작자, 발명가, 과학기술자와 예술가의 권리 보호를 규정하고 있다. 황 교수는 "헌법에서 특정 직업군을 언급하는 자체가 거의 없다"며 "특별히 이 직업군을 언급한 건 이들이 대한민국을 끌고 갈 원동력이라 생각한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토론회는 지난 박근혜 정권의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태로 촉발된 예술가들의 권리 위축 및 차별을 막기 위한 자리다. 지난 1차 토론회가 고용보험과 예술인 복지금고 논의 자리였다면 이번 행사는 구체적인 법 제정을 위한 현장 목소리를 수렴한다는 취지였다.

헌법의 요구

황승흠 교수는 그간 적용돼 온 예술인 복지법, 영비법(영화 및 비디오물의 진흥에 관한 법률) 등을 언급하며 "이런 권리들이 이젠 유효하지 않다. 더 확장되고 발굴돼야 한다"며 '예술가 권익보장법'과 구체적인 관리 감독을 위한 '예술가보호관 제도', 독립 및 자율성이 보장된 '예술가권익위원회' 등의 신설을 주장했다. "현행 헌법상 예술인 권리 보호가 취약해서 강화가 필요하다"던 황 교수는 "블랙리스트 사태에 대한 대안을 법에 어떻게 남길지 고민해야 한다"며 예술 자유의 침해죄, 예술사업자의 불공정행위 금지, 예술가조합 결성권, 예술가의 성적 자기결정권 등을 예술가 권익보장법에 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술 작품에 대통령 얼굴을 합성했다는 이유로 전시장이 망가지고 폭력사태를 겪은 건 전형적으로 예술의 자유를 침해당한 사례다. (중략) 또 블랙리스트 사태 역시 한 마디로 정부가 어떤 견해나 정치적 입장을 가지고 예술인들을 차별한 거다. 특히 리스트는 차별을 위한 행위인데 이게 더 나쁜 것이다. 정치적 기관, 정보기관 등에서 이런 걸 하면 처벌하는 조항도 필요하다." (황승흠 교수)

황 교수의 발제에 이어 토론자로 나선 이준일 고려대 법학전문대학교 교수는 "헌법은 민주주의나 법치주의만큼 문화국가를 강조하고 있다. (헌법에) 명시된 자율성, 다양성, 문화적 평등이 세 가지가 근거"라며 황 교수가 주장한 예술가 권익보장법을 지지했다. 이어 그는 "자율성 면에서 불개입을 원칙으로 해 예술인의 자율성을 보장하는 게 문화국가"라며 "안보나 질서 유지 등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개입하지 말라는 게 헌법의 요구"라고 강조했다.

"특정 단체나 개인이 검열을 금지하도록 처벌 조항이 들어갈 필요가 있다. 이미 만들어진 표현물의 상영, 전시, 공연의 방해가 이뤄지는 것 역시 검열이다. 예술은 노동의 성격이 있다. 도급인지 무엇인지 그 성격을 보다 잘 규명해야 겠지만 근로의 성격이 있다면 노동권을 향유하고 사용자가 방해할 수 없다는 조항도 들어가야 한다. 노예 계약 등 불공정 계약 역시 문제가 될 수 있다.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침해하는 내용의 계약은 무효로 한다는 조항도 필요하다." (이준일 교수)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부 교수는 "(황승흠 교수가 주장한) 예술가 보호관, 옴부즈만 제도 등에 동의하고, 법률 마련도 중요하지만 시행과정도 중요하다"며 "이런 (감시 관리 기구의) 독립성, 적절한 위상과 권한, 접근성 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강신하 법무법인 상록 변호사 역시 '로이 사건'과 '박환성 외주제작 독립 PD 사망사건', '영화 <아버지의 전쟁> 분쟁' 등을 언급하며 "법률도 중요하지만 계약상 갑을문제가 가장 심각하다"고 지적했다. 강 변호사는 "거래상 지위가 불균형하고, 수익의 예측불가능성, 불투명한 유통구조 등"을 언급하며 "문화예술인을 보호하고 불공정 행위를 감독하는 예술가 보호관 제도와 문화예술공정 위원회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동시에 황승흠 교수가 주장한 성적자기결정권 법문화엔 다소 회의적인 입장을 밝혔다가 청중들의 지적을 받기도 했다.

문화예술인들의 호소

실제 현장의 문화예술인들의 목소리는 더욱 강경했다. 오세곤 예술감독은 "(현행) 예술인 복지법 운영이 엄격해 증명 기준이 미달되는 여러 사람들이나 전공학생 등에겐 호의적이지 않다"며 "1프로의 가능성이 있다면 일단 포함시키고 나중에 판단하는 정신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직업이라는 건 생계유지를 위해 자신의 적성과 능력에 따라 일정 기간 동안 종사하는 걸 뜻한다. 생계유지가 안 되기에 (문화예술인을) 직업이 아니라고 하는 건 국가가 자기 책임을 저버리는 일이다. 생계유지가 안 된다는 것, 과연 이게 누구의 잘못인가. (중략) 근본적으로 예술의 중요성과 실패의 효용, 비효율의 효율이라는 예술의 특수성을 인정하는 사회 풍토가 마련되길 바란다. 예술가가 예술 활동만으로 충분히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말이다." (오세곤 예술감독)

장지연 문화문제대응모임 공동대표는 "인권 침해 구제 법안에 재정 지원 항목이 들어가는 건 적합하지 않다"며 황승흠 교수 발제에 일부 반대했다. "(현행) 예술인 복지법을 제정할 당시 신진 예술인들이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무산된 게 바로 공공 재정 지원 내용이 그 법에 들어가서였다"는 게 이유다. 재정 지원 문제는 별도의 법안으로 마련하는 게 좋겠다는 것이다.

"나도 예술 활동을 하면서도 생계는 여러 아르바이트로 이어가야 했다. 법을 제정할 때 예술인의 자격 증명에 갇혀버리면 더 많은 권익을 놓친다. 자기네 어시스턴트를 착취하면서 예술인 증명을 엄격하게 적용하라는 원로들 보면 화가 난다. 예술인이라는 단어가 언짢다면 신진예술가, 청년예술가 등 이렇게 세분화해서 정의 가능하다. 해외 사례를 보면 예비예술인 제도라는 게 있다. 3년간 유예를 두는 식이다. (중략) 블랙리스트의 재발을 법으로 막을 수 있다면 굉장히 좋을 것 같다. 특히 영화 쪽은 모태펀드의 운용 실태를 지금까지 밝히는 데 어려움이 있다. 펀드 심사 전반에까지 적용 가능한 법제가 필요하다."

한편 토론회를 참관하던 청중들 사이에서도 적극적인 의견 개진이 있었다. 여성문화예술연합 소속의 한 인사는 성적 자기결정권에 회의적이었던 강신하 변호사를 성토하며 "여성 영화 비중이 여전히 현저히 낮고, 강간이 소재로 쓰이지 않는 작품을 찾기 힘들 정도"라며 "(성적 자기결정권을) 산업구조적 문제로 봐 달라"고 호소했다. 한 공예가는 "오토마타(전지로 움직이는 자동인형)를 제작해 전시하려는데 전기용품이 들어간다고 생필품과 전자제품 등이 받는 수십 가지 검사를 받으라더라"며 "하나 만드는 데 몇 달 걸리는 작품을 다 분해해보겠다며 예술작품임을 증명하라고 하더라"고 안타까운 사연을 전하기도 했다.

블랙리스트 독립PD 문체부 헌법 예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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