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홍도야 우지 마라>는 일제강점기 때인 1936년 7월 23일 목요일, 서울 동양극장에서 첫 선을 보였다. 손기정 선수가 마라톤 금메달을 따게 될 베를린 올림픽이 개막된 날은 8월 1일(현지 시각)이다. 이 연극은 개막 전날인 31일까지 공연됐다.

<홍도야 우지 마라>가 80년 넘도록 잊히지 않는 것은 흥미로운 줄거리 때문이겠지만, 그에 못지않은 이유가 또 있다. 상영 첫날 분위기가 적지 않게 작용했다. 그날의 분위기가 이 연극을 대중의 기억 속에 오래오래 새겨주는 역할을 했다.

서울 광화문광장의 이순신 동상에서 서쪽으로 가다 보면 서울역사박물관이 나오고 잠시 뒤 강북삼성병원이 나온다. 백범 김구가 암살을 당해 피를 흘린 곳이 거기에 있다. 병원 입구의 경교장이 바로 그곳이다. 경교장과 강북삼성병원 건너편에 문화일보사가 보인다. 그곳이 연극 전용인 동양극장 자리였다.

<홍도야 우지 마라> 흥행의 1등 공신

 경교장 쪽에서 바라본 문화일보 사옥. 화살표 끝부분에 ‘문화일보’가 쓰여 있다.

경교장 쪽에서 바라본 문화일보 사옥. 화살표 끝부분에 ‘문화일보’가 쓰여 있다. ⓒ 김종성


그해 7월 23일 동양극장 앞에는, 연극 내용도 정확히 모른 채 극장에 꾸역꾸역 모여드는 사람들이 있었다. 연극 주인공이 동종 업종 종사자라는 이유로 모여든 이들이었다. 극중의 홍도와 같은 직업을 가진 기생들이었던 것이다.

기생들은 자신들의 애환을 다룬 작품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극장에 모여들었다. 이들로 인해 공연 첫 날부터 극장은 만원이 됐고, 이 열기가 <홍도야 우지 마라>를 불멸의 히트작으로 만드는 동력이 됐다. 초연 당시 이 연극의 제목은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였다. 작품의 줄거리는 이렇다.

"오빠의 학비를 벌고자 기생이 된 홍도는 오빠 친구 광호와 결혼한다. 이 결혼은 광호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진행된다. 그 부모가 반대한 이유는 간단했다. 홍도의 직업 때문이었다.

홍도는 결혼 생활을 버티기 힘들어진다. 시어머니와 시누이가 못 살게 굴기 때문이다. 가족들이 그러니, 남편 광호의 태도도 달라진다. 결국 홍도는 남편과 시집한테 버림받는다.

남편한테는 새 여자가 생긴다. 홍도는 절망의 나락에 떨어져 제정신을 차릴 수 없게 된다. '헌 여자'가 된 홍도는 결국 새 여자한테 칼을 휘두른다. 우발적인 행동이었다. 그리고 홍도를 잡으러 순사가 등장한다. 순사는 오빠였다. 기생 동생 덕분에 공부를 한 오빠가 순사가 되어 홍도를 끌고 간 것이다." 

홍도가 기생이 된 사연, 기생 홍도의 인생이 뒤틀린 사연 등은 기생 관객들 사이에서 열렬한 공감대를 형성했다. 그 관객들도 홍도 못지않은 사연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무대 위의 홍도 때문이 아니라 실은 자기 자신 때문에 공감을 품고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한여름을 달군 그 뜨거운 반응과 함께 이 작품은 불멸의 연극으로 생명력을 발휘해 갔다.

 기생들의 복식. 강원도 강릉시 오죽헌의 민속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기생들의 복식. 강원도 강릉시 오죽헌의 민속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기생, 예능인에서 매춘여성으로

그런데 그들 일제강점기 기생들이 느낀 애환은, 기생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보면 상당히 새로운 것이었다. 그런 애환은 이전 시대만 해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주인공 홍도의 애환은 일제강점기 기생들이 최초로 겪은 신종 애환이었던 것이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기생의 애환은 그리 깊지 않았다. 어느 정도 천대를 받은 건 사실이지만, 일제강점기 수준의 천대는 받지 않았다. 기생들이 강렬한 멸시를 받은 것은 일본제국주의 침략과 더불어 출현한 새로운 현상이었다.

조선시대까지 대부분의 기생은 공노비(관노)였다. 관청에 속한 노비였던 것이다. 양인(자유인) 신분으로 민간 술집에 고용된 기생도 있었지만 그런 기생은 소수였다. 대다수 기생은 관청에 속한 관기였다. 황진이도 개성유수부(개성특별시) 소속의 관기였다.

관기는 관노였기에, 일반 여성 관노와 신분이 같았다. 그래서 관기와 일반 여성 관노 사이에 보직의 전환도 가능했다. 관기가 일반 관노가 되고 일반 관노가 관기가 되는 게 가능했던 것이다. <춘향전>에도 이런 상황이 반영돼 있다.

신임 남원 사또인 변학도는 부임하자마자 남원부 기생들을 소집했다. 그 유명한 성춘향을 만나볼 욕심이었던 것이다. 기생들이 모이자, 수석 국장인 호장이 명부에 점을 찍어가며 출석을 체크했다.

추월이·명월이·운심이·계향이 등등이 호명됐다. 시간이 길어지자 변학도는 지루함을 느꼈다. 춘향이는 언제 나오는 거야? 더 이상 참지 못한 변학도는 호명을 중단시켰다. "너희 중에 춘향이가 누구냐?" 수석 기생이 답했다. "춘향이는 지난번 사또 자제와 혼인을 약속하고 기생 명부에서 이름을 빼고 수절하고 있습니다."

수석 기생의 답변에 따르면, 이 당시 성춘향은 관기가 아니었다. 기생 명부에서 이름이 빠졌다고 했다. 하지만 여전히 남원부 관노였다. 그랬기 때문에 변학도가 소환해서 수청을 명할 수 있었던 것이다. 변학도의 수청 명령은 다시 관기로 보직을 전환한다는 의미를 띠는 것이었다.

이렇게 관기와 일반 관노 사이에 보직 전환이 가능했기 때문에, 관기에 대한 일반의 시선은 여성 관노에 대한 그것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지방에서는 7교대, 한양에서는 2교대로 관청에 나가 기관장이나 관청 방문객한테 수청(시중)을 들거나 관청 행사 때 춤과 노래를 하는 여성 정도로 인식될 뿐이었다. 관청에 속한 예능인 정도로 인식됐던 것이다.

조선시대 여성 인구에서 노비가 차지한 비율은 30%에서 50% 정도였다. 그 정도로 많았기 때문에, 여성 노비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여성이었다. 그중 일부였던 관기는 당번 때는 관청에서 원칙상 무보수로 근무하고, 비번 때는 가사 노동을 하거나 농사를 짓거나 장사를 했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일반 생활인들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그들의 임무에 매춘 같은 것은 없었다. 수청을 들다가 잠자리를 가질 수는 있었다. 하지만 매춘은 아니었다. 이들은 원칙상 무보수로 관청 일을 했다. 생계 활동이나 가사 노동은 비번 때 했다. 기생 활동과 무관하게 생활비를 벌었기 때문에, <홍도야 우지 마라>에서처럼 기생을 천대하는 분위기는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어느 정도는 천대를 했지만, 일제강점기 때 같은 천대는 없었다.  

기생들에 대한 대우가 그렇게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사대부 관료들이 기생들과 시 낭송 모임도 갖고 야유회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황진이가 서경덕 같은 대학자와 학문을 논하고 음악을 연주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예능인으로 인식됐기 때문이다. 

 신윤복의 <쌍검대무>에 묘사된 기생들. 서울 광화문역 구내에서 찍은 사진.

신윤복의 <쌍검대무>에 묘사된 기생들. 서울 광화문역 구내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일본이 여성들과 관련해 이땅에 남긴 해독 두가지

그런데 일본이 경제적 침략을 하면서 사정이 확 달라졌다. 갑자기 기생들이 매춘부 이미지를 갖게 된 것이다. 1876년 강화도조약(조선·일본 수호조규)으로 조선 시장이 개방되자, 일본식 유곽이 부산 등지에 설치되기 시작됐다. 이런 유곽에서는 처음엔 일본 여성을 고용하다가 나중엔 조선 여성까지 고용했다. 이로 인해 남자 술시중을 들고 춤과 노래를 하는 조선 여성들한테 매춘부 이미지가 덧씌워지기 시작했다.

외교권이 일본에 넘어가고 군대까지 해산되자, 상황은 더 나빠졌다. 국권 상실 2년 전인 1908년에는 조선통감부 지휘 하에 기생단속령과 창기단속령 같은 법령이 제정됐다. 통감부는 기생과 창기를 매춘 여부로 구분했다. 매춘을 하면 창기, 그렇지 않으면 기생으로 분류했다. 하지만, 이런 구분은 그리 명확치 않았다.

그런 법령과 하위 법령을 통해 통감부는 매춘 화대를 지정하고, 기생과 창기의 건강 검진을 의무화했다. 기생을 예능인에서 매춘부로 전락시킨 것이다. 국가권력에 의해 매춘부로 공인됨으로써 기생들은 공창의 위상을 갖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통감부는 조선인 매춘부와 일본인 매춘부에 대해 민족차별을 했다. 일본 여성은 18세 이상이 돼야 매춘을 할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조선 여성은 15세 이상이면 할 수 있도록 했다. 나이 어린 일본 여성은 보호하면서 나이 어린 조선 여성은  방치했던 것이다.

이렇게 일본의 침략과 함께 기생이 예능인에서 매춘부로 전락함에 따라, 이 직업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현저히 싸늘해졌다. 그래서 연극 속의 홍도처럼, 가난 때문에 매춘으로 내몰리고 가족을 위해 스스로를 헌신하면서도 세상의 천대를 받는 여성들이 대거 배출됐던 것이다. 저명한 교양지인 <개벽> 1946년 3월호의 '해방되는 창기 5천 명'이란 기사에 이런 대목이 있었다.

"일제가 여성들과 관련해서 이 땅에 남긴 해독이 두 가지 있으니, 하나는 공창제도이고 또 하나는 그들이 남긴 봉건적인 노예 여성관을 그대로 연장시킨 것이다."

이렇게 일제강점기 동안에 기생들의 원한이 쌓이고 쌓였기 때문에 1936년 7월 23일 기생들이 동양극장 앞으로 몰려들고, 이로 인해 <홍도야 우지 마라>가 첫날부터 대히트를 치게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이 땅의 기생들을 매춘으로 몰아넣은 일본이 이 연극의 히트를 도운 셈이 됐다.

홍도야 우지 마라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기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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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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