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덩케르크>

영화 <덩케르크> 포스터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2차 세계대전의 정점을 찍던 1940년 5월, 독일군은 프랑스까지 침투하고 연합군은 덩케르크 해변에 고립된다. 해변(육지)에서는 영국과 프랑스군들이 자신들의 마지막 생명줄인 구조선을 기다리는 중이다. 밀려드는 독일군을 뒤로 한 채 이들은 일주일 동안 기다림과 죽음의 사투를 벌인다. 한편 바다에서는 이들을 구출할 민간인 소유의 소형 선박들이 오고 있다. 하루 동안 이들은 사지에 나가 있는 "아들들"을 위해 사해(sea of death)를 가른다. 항공에서는 한 시간 여의 연료 밖에 남지 않은 파일럿 패리어가 사력을 다해 독일 공군기를 격추시키는 중이다. 혼재한 시간의 영역을 넘나들며 이들은 서로를 구하고 희생한다.

<메멘토> <인셉션> <인터스텔라> 등의 작품들에서 크리스토퍼 놀란은 시공(時空)을 압축하는 스펙터클을 창조해왔다. 이번 작품 <덩케르크>는 그의 이러한 장기(flair)가 완벽의 경지(mastery)에 이르렀음을 증명한다. 영화는 특히 두 가지 면에서 영화사적인 지표가 될 작품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첫째, 영화가 '생존'과 '시간'이라는 거대 주제를 다루는 방법. 둘째, 아이맥스가 주는 '보는 경험'의 확장.

생존과 시간

질 들뢰즈(Gilles Deleuze)는 그의 저서 <시네마2:시간과 이미지(Cinema2:The Time-Image)> 에서 시간은 잡을 수 없는 것이며 (즉각 적인 것), 인식만이 가능하다(only perceivable)라고 정의했다. 그는 영화 안에서 이 시간의 한계가 도전될 수 있다고 했고, 이러한 맥락에서 놀란의 <덩케르크>는 들뢰즈식 '시간'의 정의를 비교적 명쾌하고도 심오하게 재현한다.

육지에서의 일주일, 해상에서의 하루, 공중에서의 한 시간은 현실에서는 수직적(vertical) 공간이고 고로 분리된 시간이다. <덩케르크>는 이 수직적 공간을 수평적(horizontal) 공간으로, 분리된 시간을 영화적 시간(cinematic time)으로 변환한다. 해변에 고립 당한 군인들의 사투는 해상에서 이들을 구출하러 오는 민간 선박의 주인 부자(父子), 항공에서 격투를 벌이고 있는 패리어와 쉴 새 없이 교차 편집되며 사실상의 '시간차'를 무의미 하게 한다.

그렇다면 과거/현재/미래가 혼재하는 이 시공간에서 각각의 인물들, 혹은 이들 모두는 무엇을 추구하는가. 바로 생존이다. 생존하기 위해 혹은 생존하게 하기 위해, 이들은 바다에서 육지로, 하늘에서 바다로 그리고 현재에서 과거로, 미래에서 현재로 전복하는 것이다. 생존을 다루는 숱한 전쟁 영화들과 크게 다른 점 중 하나는 <덩케르크>에는 피와 내장이 쏟아지지 않는다는 것(이런 면에서 전쟁 영화의 표상이 되어 버린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노르망디 시퀀스와 매우 상반된다)인데, 육체가 팔팔한 젊은이들의 내장을 보지 않고도 영화 내내 긴장감에 목이 타들어 가는 것은 역시 시간적 설정과 편집의 힘이다. 이러한 요소만으로도 전쟁 영화의 장르를 다시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 <덩케르크>

영화 <덩케르크>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예를 들어, 육지의 군인들이 기습 공격을 받아 생사의 추(錘)가 흔들리기 시작할 때쯤 영화는 바다로 시선을 돌린다. 바다에서는 폭격 당한 배에서 연료 기름을 뒤집어쓰고 쏟아져 나오는 병사들이 민간 선박을 향해 손을 뻗는다. 빨리 구출되지 않으면 배의 폭발로 모두가 타 죽을 것이다. 망망대해에서 허우적대는 수많은 손들 중 몇 명이나 민간 선박에 오를 수 있을 것인가. 이 수 많은 손을 향해 다가오는 작고 미약한 선박을 영화는 부감 쇼트로 관조적으로 응시한다.

이러한 긴박한 장면들을 장식하고 있는 것은 '시계'소리다. 육해공에서 생명을 존속하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간일 것이다. 영화 전반에 걸쳐 저변에 깔려 있는 째깍째깍 '시간의 소리'는 영화 말미에 이들이 구출되어 영국으로 귀향할 때 비로소 멈춘다. 따라서 <덩케르크>는 '생존'이라는 주제를 '시간'을 매개삼아 보여 주는 영화다. 패리어가 전투기에 남은 연료를 시간과 함께 기록하는 것, 영화의 시계 사운드 등의 설정은 어떻게 시간이 생명의 지표로 기능하는지 보여주는 예 들이다. <덩케르크>는 시공간의 전복을 통해 이를 관통하는 하나의 가치, '생존'을 말하는 영화다.

아이맥스의 기적

영화사에서 회자되는 영상이 하나 있다. 바로 1896년 대중에 선보인, 뤼미에르 형제의 작품 <기차의 도착>(Arrival Of a Train at La Ciotat Station)라는 제목의 짧은 영상이다. 이 영상이 세대를 걸쳐 회자되는 이유는 영화의 완성도 때문이 아닌, 당시 영화를 본 관객들의 반응때문이다. 움직이는 사진을 처음으로 접했던 관객들은 이 영상에서 기차가 관객석을 향해 돌진하는 것을 보고 경악을 하며 피했다고 한다. 실로 영화사의 기록적인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처음으로 인간이 '가상현실'을 경험 한 것이다. <덩케르크>의 첫 신을 목격한 나의 반응이 그랬다. 하늘에서 뿌려지는 '삐라'를 맞으며 걸어가고 있는 병사들이 등장하는 이 첫 장면에서 나를 포함한 많은 관객들이 탄성을 질렀다. 쏟아지던 삐라가 머리위로 떨어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팔을 뻗어 손에 쥘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것은 처음으로 느껴 본, 아이맥스가 주는 '위협적인' 리얼리즘 이었다.

 영화 <덩케르크>

영화 <덩케르크>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덩케르크>는 영화의 70%가 아이맥스 카메라로 촬영되었다. 핸드 헬드 쇼트들과 몇몇 장면을 제외하고는 모두 아이맥스 카메라로 사용되었다고 전해진다. <다크 나이트>나 <인셉션> 같은 전작들에서도 아이맥스를 이용했던 놀란이지만 이번 작품처럼 압도적으로 아이맥스 테크놀로지를 이용한 적은 없었다. 크기가 매우 커서 역동성을 요하는 워 에픽(war epic)을 촬영하기에 실로 애환이 많았을 것임에도 이 영화는 놀란이 언급했던 소기의 목적("고글을 쓰지 않고도 쓴 것 같은 효과를 내고 싶었다")을 넘어 영화사(映畫史)의 지평을 바꿀 만한 업적을 달성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영화 제작'의 다이내믹을 가장 많이 바꾸었다고 한다면, 아이맥스 테크놀로지는 보는 경험(viewing experience)의 본질 전체를 변형시켰다.

아이맥스가 주는 시각적 전율은 오감을 초월한다. 물론 아이맥스 스크린이라서 더욱 가능한 경험 일 것이다. 이번 <덩케르크>에서 아이맥스 테크놀로지가 더 절실히 경험되었던 이유는 이 위협적 리얼리즘이 스펙터클의 재현을 넘어 '죽음'과 '생명'이라는 가치를 마치 실체가 있는 것처럼 경험하게 했기 때문이다. 엔터테인먼트를 위해서든 기술의 발전을 경험하기 위해서든 <덩케르크>는 놓치면 안 될 영화이며 영화사적인 기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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