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회 부천국제판타스틱 영화제에서 첫 상영한 임흥순 감독의 신작 <려행>(2017)

제21회 부천국제판타스틱 영화제에서 첫 상영한 임흥순 감독의 신작 <려행>(2017) ⓒ 반달


얼마 전 가족들과 음식점에서 식사를 하다가 우연히 북한 이탈 주민들이 메인 게스트로 등장하는 토크쇼, 채널A <이제 만나러 갑니다>(아래 <이만갑>)을 보게 되었다. 평소 JTBC를 제외한 종편 채널을 보지 않는지라 <이만갑>도 이야기만 들었지 실제로 본 것은 그 날이 처음이었는데, 듣던대로 대단한(?) 프로그램이었다.

미모의 북한 이탈 여성들이 전면으로 등장 하는 예능 프로그램은  채널A <풍문으로 들었쇼>처럼 연예인들의 신변잡기를 늘어놓는 토크쇼와 더불어 TV조선, 채널A와 같은 종편 채널이 애용하는 단골 소재다. 북한 이탈 여성이 등장하는 종편 예능 프로그램만 해도 <이만갑>, TV조선 <모란봉클럽>, <애정통일 남남북녀> 등 생각나는 것만 해도 서너개다. 종편 예능이 새터민 여성들을 소비하는 방식은 엇비슷하다. 방송에 등장하는 북한 이탈 여성들의 수려한 외모에 감탄하는 카메라는 김정은을 위시한 북한 최고위층의 사치와 탈선에 격분하는 북한 미녀들의 분노에 포커싱을 맞춘다. 이와 같은 종편 예능들 덕분에 중장년층을 중심으로 (미모의) 북한 이탈 여성에 대한 관심이 늘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대중들이 바라보는 새터민 여성들의 이미지 또한 종편 예능들이 설정한 방향대로 고착화 돼간다.

이렇게 새터민 여성 관련 예능들이 범람하는 현실에서, 북한 이탈 여성들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려행>(2017)이 제21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이하 BIFAN)에서 첫 상영되어 화제다.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은 지난 2015년 <위로공단>(2014)으로 한국 작가 최초로 베니스 비엔날레 은사자상을 수상한 임흥순. 공공미술 분야에서 활동하다가 <비념>(2012) 이후 본격적으로 장편 다큐멘터리 작업에 뛰어든 임흥순 감독은 미술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영상 작가답게 영화와 퍼포먼스의 경계를 뛰어넘는 다채로운 영상을 선사한다.

첫번째 장편 다큐멘터리 <비념>에서는 제주 4.3사건 생존자와 피해 가족, <위로공단>에서는 여성 노동자들의 역사에 관심을 기울이던 임흥순 감독은 <이만갑>, <모란봉클럽>을 통해 비교적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잘 모르는 북한 이탈 여성들의 이야기를 보여주고자 한다. <려행>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북한을 탈출한 사연은 우리가 익히 짐작하고 있는 그대로다. 대한민국 땅에 힘들게 발을 디딘 이들이 정착의 어려움을 겪는 모습도 다른 매체를 통해 알려진 바와 비슷하다.

 제21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첫 상영한 임흥순 감독의 신작 <려행>(2017) 한 장면

제21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첫 상영한 임흥순 감독의 신작 <려행>(2017) 한 장면 ⓒ 반달


기존 매체가 다루는 북한 여성과 다른 <려행>

그렇다면 <려행>이 북한 이탈 여성을 다루는데 있어서 기존의 다큐멘터리, 영화, 방송과 차별화되는 지점은 어디에 있을까. <려행>에는 임흥순 감독의 전작 <위로공단>에서 처럼 인터뷰이들의 과거를 재현하고자하는 픽션적 성격의 퍼포먼스가 등장한다. 전문 배우들이 진행했던 <위로공단>의 퍼포먼스와 달리 <려행>에서는 인터뷰이로 참여한 북한 이탈 여성들이 퍼포먼스까지 수행한다. 카메라 앞에서 북한에서 있었던 일화, 탈출 경로, 정착 과정 등을 덤덤히 털어놓는 북한 이탈 여성들은 자신들의 과거 혹은 탈출을 떠오르게 하는 퍼포먼스까지 직접 행함으로써 구술 로만 전달될 수밖에 없는 자신들의 이야기에 풍부한 사실감을 더한다.

<려행>은 북한 이탈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종편 예능 프로그램처럼 탈북자들을 통해 북한 체제를 섣불리 비판하려 들지 않는다. 새터민 여성들을 미모의 북한 여성으로 대상화시키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북한에 살다가 우여곡절 끝에 대한민국 영토에 정착한 대한민국이고,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들과는 좀 다른 특별한 기억이 있을 뿐이다. <려행>이 특별한 기억을 가진 북한 이탈 여성들을 통해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들려주고 싶은 것은 온전히 그녀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집중이다.

처음에는 다소 괴이하게 느껴지는 퍼포먼스도, 시간이 흐를 수록 북한 이탈 여성들의 이야기를 생동감있게 전달하는 효과적인 장치의 역할을 톡톡히 수행한다. 다큐멘터리 영화 감독 보다 실험 영상 작가라는 타이틀이 더 어울릴 법한 임흥순이 다큐멘터리 영역 안에서 이야돼 지는 것 또한, 인터뷰이에게 내재화된 기억과 감정을 끄집어내는 극적인 스토리텔링 기법에 있다.

<려행>에서 종종 등장하는 퍼포먼스들은 오직 퍼포먼스만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북한 이탈 여성들이 영화를 위해 직접 수행하는 퍼포먼스는 그녀들의 삶의 일부이자 그녀들의 주체성을 스스로 규정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다. 종편 채널이 그렇게 사랑한다는 북한 이탈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려행>은 새터민 여성들을 미모의 북한 여성으로만 대상화 하는 대신, 다양한 생각과 의지를 가진 주체적인 인간으로 긍정하고자 한다. 오직 임흥순 감독만 할 수 있는 북한 이탈 여성들의 긴 여행을 다루는 독특한 다큐멘터리 <려행>은 다가오는 18일 오후 2시 부천CGV에서 만날 수 있다.

 제21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첫 상영한 임흥순 감독의 신작 <려행>(2017) 한 장면

제21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첫 상영한 임흥순 감독의 신작 <려행>(2017) 한 장면 ⓒ 반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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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지금 여기에서 여성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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