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자 포스터

▲ 옥자 포스터 ⓒ 넷플릭스


운동장에서 축구공을 차는 건 후진국 아이들을 차는 것이란 말이 있다. 기업들이 축구공을 만드는 데 인도와 파키스탄, 중국 아이들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기술력으론 축구공에 쓰이는 수십개의 가죽조각을 입체의 구 형태로 꿰매기가 어려워 사람이 직접 바느질 하는 공정이 필요한데 가격경쟁력을 유지하려다 보니 임금이 싼 후진국, 그 중에서도 아이들의 노동력을 착취하게 된 것이다. 한 번도 축구를 해본 적 없는 아이가 네다섯시간을 꿰매야 겨우 하나 만들 수 있는 축구공으로 선진국 아이들이 공놀이를 한다는 불편한 진실은 국제기구와 시민단체의 노력으로 많이 알려져왔음에도 여전히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은 이슈다.

패스트푸드 체인점에서 햄버거 하나를 주문할 때마다 지구 어딘가에선 5제곱미터의 녹지대가 사라진다는 사실을 명심하라는 이야기도 있다. 국제환경단체 그린피스는 2000년대 중반부터 맥도날드를 비롯한 초국적 햄버거 프랜차이즈를 상대로 열대우림 파괴의 책임을 묻는 운동을 진행해왔다. 이들에 따르면 아마존 열매우림은 지난 수년 간 공공연한 파괴행위에 직면해왔다. 초국적 농업기업들이 자국 환경을 보호하는 브라질의 국내법령을 피해 숲을 파괴한 뒤 그 땅에서 콩을 재배해온 것이다. 거대 햄버거 프랜차이즈의 방관 속에 이렇게 키운 콩이 가축사료로 쓰이고 그 콩을 먹고 자란 가축이 다시 햄버거 재료로 쓰이는 악순환이 이뤄지고 있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별 생각 없이 구매하는 상품이 윤리적 문제를 야기하는 경우는 이뿐이 아니다. 막강한 자본을 바탕으로 유통구조를 장악하고 후진국 농장과의 불공정 거래를 통해 커피콩을 구입하는 커피 업체를 생각해보라. 대규모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살충제와 살균제를 과다하게 사용해 생태계는 물론 노동자와 지역주민의 건강까지 해치는 바나나 업체의 사례는 유명하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 눈 앞에 보이는 상품들도 그 공정 하나하나를 뜯어보면 이러한 문제로부터 자유롭기 어렵다.

봉준호 감독의 신작 <옥자>가 겨냥하는 지점도 여기에 있다. 고도로 분업화된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선 거의 모든 공정이 잘게 잘려진 나머지 각 공정이 완제품이 나오는데 어떠한 공헌도 하지 않은 것처럼 여겨진다는 것, 그리하여 소비자가 생산된 상품을 소비하면서도 그 생산과정의 비윤리를 자각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만약 이를 자각한다해도 어쩌겠는가. 토마토 하나를 앞에 두고도 운송과정에서 쓰인 화석연료와 지구온난화의 상관관계를 떠올려 괴로워하는 영화 속 실버(데본 보스틱 분)의 태도가 답이 될 수 있겠는가 말이다. 만약 예술이 일상 가운데 존재하는 모순을 일깨워 자각하게 하는 것이라면 봉준호 감독에게 <옥자>가 천착하고 있는 주제는 놓칠 수 없는 예술적 표적이었으리라.

"괜찮아, 싸면 다 먹어"

옥자 수퍼돼지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초국적 기업 미란도의 직원으로 기업의 이익에 복무하는 과학자 조니 윌콕스 박사를 연기한 제이크 질렌할.

▲ 옥자 수퍼돼지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초국적 기업 미란도의 직원으로 기업의 이익에 복무하는 과학자 조니 윌콕스 박사를 연기한 제이크 질렌할. ⓒ 넷플릭스


수퍼피그는 초국적 기업 미란도가 세계적 식량난을 해결한다는 명분을 걸고 내놓은 유전자조작 돼지다. 하마를 연상시키는 외양에 육질도 좋고 질병에도 강하다는데 유전자 조작의 결과인지 지능이 지나치게 뛰어난 게 흠이라면 흠이다. 인류애적 공감능력이 넘치는 인물 루시 미란도(틸다 스윈튼 분)는 미란도 그룹 회장 취임과 함께 수퍼피그 상품을 홍보하는 프로젝트를 발표한다. 수퍼피그 새끼 스물여섯 마리를 세계 곳곳의 축산농가에 맡겨 10년 동안 키운 뒤 가장 잘 자란 돼지를 내세워 상품을 홍보한다는 계획이다.

인적 드문 산골마을에서 할아버지와 단 둘이 사는 소녀 미자는 옥자와 함께 자랐다. 옥자는 친환경 축산업에 노하우가 있는 그녀의 할아버지가 미란도로부터 위탁받아 키우는 수퍼피그로 미자는 그러한 사실을 모른 채 옥자와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날 미자의 집을 찾은 미란도의 직원들이 옥자를 가장 잘 자란 돼지로 뽑아 뉴욕으로 데려가자 미자는 옥자를 되찾아 오겠다며 홀로 먼 길을 나선다.

이후 영화는 <프리윌리>나 <아름다운 비행> <ET>와 같은 영화가 먼저 간 길을 그대로 따른다. 다른 생명체와 우정을 쌓은 아이가 산업자본과 악당의 손으로부터 그를 지켜낸다는 감동적인 모험극 말이다. 영화는 수퍼피그로 만든 소시지를 차질 없이 출시하려는 초국적 기업과 그 기업이 소유한 동물들을 도살의 위협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동물보호단체의 대립을 중심으로 흘러간다.

미자는 우연히 만난 동물보호단체와 함께 옥자를 되찾고자 하지만 상황은 녹록치 않다. 동물보호단체의 마지막 기대, 그러니까 생산과정의 부조리를 대중에게 폭로하려는 시도는 미란도의 구원투수로 등판한 루시의 쌍둥이 언니 낸시 미란도의 "괜찮아, 싸면 다 먹어"라는 한 마디 대사로 묵사발 난다. 윤리적 시민은 영화에서마저 실리적 소비자에게 무릎꿇는다.

돼지들의 아우슈비츠에서 옥자를 사는 미자

옥자 <설국열차>의 메이슨 역으로 한국 팬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은 틸다 스윈튼이 <옥자>에서 미란도의 총수 역으로 다시 한 번 봉준호 감독과 함께했다. 주인공 미자 역의 안서현은 한국 영화팬들에게도 낯선 얼굴로 영화의 신선함을 배가한다.

▲ 옥자 <설국열차>의 메이슨 역으로 한국 팬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은 틸다 스윈튼이 <옥자>에서 미란도의 총수 역으로 다시 한 번 봉준호 감독과 함께했다. 주인공 미자 역의 안서현은 한국 영화팬들에게도 낯선 얼굴로 영화의 신선함을 배가한다. ⓒ 넷플릭스


옥자를 구하는 건 대중의 윤리가 아닌 자본주의적 거래의 결과다. 옥자의 뒤를 쫓아 미란도의 도축공장을 찾은 미자는 그곳에서 거대한 디스토피아와 마주한다. 수천, 수만의 수퍼피그가 소시지가 되기 위해 길러지는 그곳에선 피타고라스도 넘보지 못할 기민한 판단으로 미자를 구출한 옥자도 죽음의 행렬에 동참할 밖에는 도리가 없다. 봉준호는 이 공간을 마치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처럼 묘사하는데 수퍼피그들이 줄지어 도살장으로 향하는 장면이 특히 그렇다. 그렇다면 수퍼피그를 격리해 사육하고 도살하는 미란도는 나치이고, 다수 소비자들은 이를 방관하는 사람들인가. 수퍼피그의 시각에서 보면 그럴 지도 모른다.

미자는 이 절망적인 공간에서 낸시와 조우한다. 그리고 그 앞에서 수퍼피그와 그들의 디스토피아를 창조했을 전지전능한 황금돼지를 꺼내든다. 황금돼지가 신성한 거래의 이름으로 옥자를 미자에게 돌려놓는 장면을 보라. 동물보호단체도, 정부도, 대중도 하지 못한 일을 황금돼지가 하고 있지 않은가. 이땅의 소비자들은 기억하고 경배할지어다. 자본주의 사회에선 황금돼지가 그 숭배자를 구원하느니!

오늘날 대중은 그들이 소비하는 상품의 모든 공정을 알지 못할 뿐더러 알고자 하지도 않는다. 철저하게 분업화된 자본주의 질서에서 각 공정은 자본가들에겐 효과적인 상품생산의 수단이며 노동자들에겐 삶을 지탱하는 터전으로써만 존재한다. 설사 그것이 주류 소비자의 순진한 감성과 배치될지라도 그렇다. 그렇지 않고서야 생산노동자를 백혈병과 시력상실에 이르게 하고도 모르쇠로 일관하는 기업 제품이 불티나게 팔리고, 카리브해 바다를 피로 물들인 끝에 얻어지는 샥스핀에 최고급이란 수식어가 붙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만약 눈 밝은 어느 한 시민이 끝내 윤리적 소비자로 남고자 해도 어느정도의 타협은 불가피하다. 토마토 한 알조차 거부하는 실버의 투쟁을 폄하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사자무리가 사슴을 잡아먹기 위해 집단으로 폭력을 쓴다 해서 도덕적으로 비난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오늘의 인간중심적 자본주의 질서를 인정한다면 어느정도의 환경파괴와 동물들에 대한 생명권 침해는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윤리적 소비자가 적대시해야 할 건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파괴해 궁극적으로 인류 자신에게 피해를 입히는 행위 정도가 아닐까.

하나의 상품에서 그 상품이 거쳐온 작은 공정까지를 꿰뚫어볼 수 있어야 비로소 윤리적 소비의 첫 단계가 이루어진다. 비타협적 도덕주의자의 관점이 아니라 지속가능한 세상을 꿈꾸는 공동체주의자의 관점에서 말이다. 감독은 이를 위해 우리가 외면하고 있는, 그래서 대중의 감성과 생산의 현실 사이에 상당한 괴리가 있는 축산업을 소재 삼아 진실을 일깨우는 실험을 감행한다. 동물보호단체의 무력함과 황금돼지만 바라보는 기업의 감성 사이에서 윤리와 실리 모두를 지키는 길을 모색하는 시도다.

당신은 이 돼지를 먹겠는가

옥자 <설국열차>에 이어 할리우드 배우들과 다시금 호흡을 맞춘 봉준호 감독. 영화에 국적을 붙이는 게 우스꽝스럽긴 하지만 굳이 따지면<옥자>는 미국 최대의 인터넷 스트리밍 서비스업체 넷플릭스로부터 5000만 달러의 제작비를 지원받아 제작된 사실상의 미국영화다.

▲ 옥자 <설국열차>에 이어 할리우드 배우들과 다시금 호흡을 맞춘 봉준호 감독. 영화에 국적을 붙이는 게 우스꽝스럽긴 하지만 굳이 따지면<옥자>는 미국 최대의 인터넷 스트리밍 서비스업체 넷플릭스로부터 5000만 달러의 제작비를 지원받아 제작된 사실상의 미국영화다. ⓒ 넷플릭스


모든 소비자가 옥자와 우정을 나눌 수 있는 게 아니기에 영화는 옥자의 뛰어난 지성을 보이는 에피소드에 상당한 시간을 할애한다. 옥자가 절벽에서 추락하는 미자를 구출하는 이야기가 그것으로, 영화는 옥자와 같은 지성체를 단지 상품으로 취급하는 사회가 옳으냐는 질문을 관객에게 던진다.

알렉스 프로야스의 <아이, 로봇>을 보자. 스푸너(윌 스미스 분)는 로봇 써니에게 "넌 기계일 뿐이야. 인생을 흉내내고 있는 거지. 로봇이 교향곡을 작곡할 수 있나? 캔버스에 작품을 남길 수 있나?"하고 묻는다. 그러자 써니는 이렇게 답했다. "그러는 당신은요, 할 수 있나요?"

이 짧은 대화는 중요한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 기계에게 육체와 이성을 모두 따라잡히고 위기에 몰린 인간이 자기가 갖지도 못한 능력을 내세워야 할 만큼 인간에게 존엄은 종의 능력과 떼놓을 수 없는 개념이란 것이다.

그렇다면 수퍼피그는 어떤가. 우정을 나눈 생명을 살리려 기꺼이 절벽 아래로 자신을 내던지는 모습은, 죽음의 수용소에서 새끼만은 살리겠다며 전기울타리를 들어올리던 부모돼지의 모습은 어떤가 말이다. 그 장면에서 이들이 보인 지능과 감성을 목격하고도 인간만이 존엄하며 수퍼피그는 소시지로 만들어도 좋다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수퍼피그들이 교항곡을 작곡하고 캔버스에 작품을 남긴다면, 그래도 그 종을 소시지의 재료로 삼겠는가.

다행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가 먹는 돼지는 옥자가 아니고 우린 돼지와 유대를 형성할 일도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우린 그 돼지를 키우는 사람이나 잡는 사람조차도 알지 못한 채 가게에서, 마트에서 고기를 사 먹지 않는가. 이는 인류가 돼지를 구원하는 일이 없을 것이란 사실을 뜻하는 듯도 하다. 옥자를 감싸고 도는 미자가 닭백숙을 좋아하는 것처럼, 애완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이 참치통조림을 사 먹는 것처럼.

그렇다면 우린 이쯤에서 안도해도 좋은 것일까. 영화를 보고 내가 먹는 돼지가 옥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하는 나는 대체 얼마나 비겁한 인간이란 말인가.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김성호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옥자 (주)NEW 봉준호 넷플릭스 김성호의 씨네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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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음악이 주는 기쁨과 쓸쓸함. 그 모든 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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