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의! 이 글에는 영화 <그 후>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그 후> 메인 포스터

<그 후> 메인 포스터 ⓒ 콘텐츠판다


얼마 전 정성일이 쓴 "나는 홍상수를 지지합니다"(GQ, 2017년 5월호)라는 글을 읽었다. '이 글은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 관한 비평이 아니다'라는 부제를 달고 있었지만 정성일은 자신의 비평적 발견들을 다소 파편적으로, 하지만 필사적으로 나열한 뒤 거의 자포자기 하듯 현재로서는 <밤의 해변에서 혼자>(2016)를 비평할 수 없다고 고백한다. 대신 그는 홍상수를 (변함없이 그리고) 다시 한 번 지지한다.

간혹 정성일은 필요하다고 생각하기만 한다면 영화라는 예술, 또는 감독이라는 예술가에게 어떤 계산도 배제하고 그저 멈춰 서서 지지를 보낸다. 이럴 때 정성일은 심지어 자신과 영화를 제외한 세상 모두를 적으로 돌린 데도 그 지지를 철회할 생각이 없다. 그는 그런 사람이다. 그리고 나는 <그 후>(2017)를 보고나서 홍상수에 대한 지지가 다시 한 번 작성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이유는 <그 후>가 한국영화에서 가장 섬세한 오프닝과 가장 아름다운 장면을 가진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 후>를 보고 홍상수 지지를 다시 생각하다

언제나 그랬듯 <그 후>의 사건이란 것도 사실 단순하기 그지없다. 문학평론가이자 출판사 사장인 봉완(권해효)과 그의 출판사 직원 창숙(김새벽)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다. 봉완은 아내와 딸이 있는 유부남이기에 이 둘은 불륜관계이다. 하지만 봉완과 창숙의 관계가 끝남과 동시에 창숙은 출판사를 그만 두고 창숙의 자리에 아름(김민희)이 새로 출근한다. 우연한 계기로 봉완의 불륜을 의심하던 그의 아내 해주(조윤희)는 오히려 그날 첫 출근한 아름을 불륜 상대로 오해하고 폭력을 가한다. 폭력을 당한 아름은 출판사를 그만두겠다고 하고 봉완은 같이 일하자며 아름을 설득한다. 그런데 관계가 끝났다고 생각했던 창숙이 봉완과 아름 앞에 다시 나타나고 창숙은 다시 봉완과 함께하고 싶다고 한다.

 해주는 묻고 봉완은 침묵과 응시로 대답한다.

해주는 묻고 봉완은 침묵과 응시로 대답한다. ⓒ 콘텐츠판다


<그 후>는 봉완의 출판사에서 일하기로 한 아름이 첫 출근한 날의 당황스러운 사건들과 얼마의 시간(약 1년의 시간이 지난 것으로 보인다)이 지난 뒤 봉완과 아름의 짧은 재회가 이야기의 전부이다. 하지만 <그 후>의 문제들은 당연히 단순한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 사건을 구성하는 시선과 (침묵을 포함하는) 말, 그리고 기억들이다.

봉완은 매일 새벽같이 출근한다. 봉완은 출근 전 식탁에 앉아 무심하게 밥을 씹고 아내 해주는 마주 보고 앉아있다. 해주는 봉완이 뭔가 전과 다름을 직감한다. 해주는 처음엔 장난처럼 묻는다. "좋아하는 여자 생겼어? 왜 말을 안 해?" 봉완은 말없이 헛웃음과 응시를 반복한다. 오프닝 시퀀스인 이 대화는 오직 해주의 질문들로만 이루어지는데, 단 하나의 쇼트로 해주가 반복해서 질문을 하면서 변하는 해주의 표정과 목소리 톤, 그리고 봉완의 침묵은 어떤 폭발 직전의 긴장감들을 그저 머금는다.

오프닝 시퀀스의 이 대화는 사실 굉장히 묘하게 만들어졌다. 해주의 질문은 그 자체로 대답이 될 수 있도록 쓰였다.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봉완이 심지어 들리지 않는 소리로 대답을 하고 있다는 느낌까지 들게 한다. "좋아하는 여자 생겼어?", '좋아하는 여자 생겼어.', "나 창피하게 하지 말고 얘기해봐.", '나 창피하게 하지 말고 그만해줘.'

봉완은 그렇게 대화를 피하고 집을 나선다. 봉완이 아파트 입구를 나설 때 누군가 "아빠"라고 부른다. 봉완은 뒤를 돌아 집을 올려다본다. 하지만 그건 해주의 목소리(로 낭독되는 문자메시지)다. 해주는 요즘 갱년기라 그런지 예민해 진 것 같다며 봉완에게 오히려 사과한다. 하지만 집을 떠나는 봉완을 뒤돌아보게 만든 말은 해주의 사과가 아니라 아빠라는 호명이다. 아빠라는 호칭의 앞에는 사실 봉완과 해주의 딸의 이름이 생략되어 있다. 홍상수가 딸의 이름을 생략하고 있는 것은 단지 불필요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홍상수 자신이 생각하는 어떤 윤리적인 선이었을 수 있다. 좌우지간 봉완은 그런 식으로 아빠라는 호명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인물이다. 그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창숙과 함께 했던 동선과 장소를 혼자 되새기며 그저 출근하는 것뿐이다.

 봉완은 세계는 실재라고 말하고 아름은 세계는 믿음이라고 논쟁한다. 아름은 봉완이 마주하는 하나의 진실이다.

봉완은 세계는 실재라고 말하고 아름은 세계는 믿음이라고 논쟁한다. 아름은 봉완이 마주하는 하나의 진실이다. ⓒ 콘텐츠판다


어쩌면 한국 영화중 가장 아름다운 장면

떠난 창숙을 대신해 출판사에 처음 출근한 아름은 봉완이 갑자기 대면하게 되는 하나의 삶의 진실이다. 이런 의미에서 둘의 점심식사에서 오가는 대화는 어쩌면 <그 후>에서 가장 인상적 장면이다. 봉완은 세계를 실재라고 이야기하고 아름은 믿음이라고 이야기 한다. 그래서 뭘 믿느냐는 말에 아름은 담담하게 이야기 한다. "저는 제 자신이 주인이 아니라는 걸 믿어요. 주인공이 아니라는 걸 믿어요. 절대로 아니라는 걸. 그리고 두 번째로는 언제도 죽어도 된다는 걸 믿어요. 정말로 괜찮다는 걸 믿어요. 셋째로는 모든 게 다 괜찮다는 걸 믿어요. 모든 게 다 사실은 아름다운 것일 거라는 걸 믿어요. 영원히. 이 세상을 믿어요." 봉완은 결국 할 말을 잃는다.

<그 후>에서 유독 과장되고 답답하지만 알 수 없는 긴장이 흐르는 이 논쟁은 술상을 가운데 두고 줌인-줌아웃을 느리지만 빈번하게 반복하면서 말하는 봉완과 아름을 번갈아 클로즈업해가며 찍었다. 따라서 홍상수의 고정적인 투 쇼트 물론이고 관객들에게 익숙한 오버 숄더 쇼트보다 오히려 더욱 단절적인 느낌을 준다. 실제로 봉완과 아름은 그저 독백을 교환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봉완은 아름과 아름의 말을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진심으로 좋아하지만 사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과거로 돌아가기, 과거와의 조우 또는 진실과의 대면

과거로 돌아가기, 과거와의 조우 또는 진실과의 대면 ⓒ 콘텐츠판다


아름이 봉완의 아내 해주에게 봉변을 당하고 난 후 아름과 봉완은 다시 마주 앉는다. 아름은 출근 첫날에 그만두겠다고 이야기하고 봉완은 아름에게 공과 사를 구분해야 한다며 함께 일하자고 설득한다. 결국 아름은 봉완의 설득으로 계속 출근하겠다고 결심하지만 바로 이 때 창숙이 봉완을 찾아와 다시 함께 있고 싶다고 한다. 창숙의 갑작스런 등장은 보는 이를 다소 당황스럽게 한다.

홍상수는 <그 후>를 흑백으로 촬영했고 과거와 현재를 불규칙적으로 교차하고 있기 때문에 <그 후>에서 보는 이들이 플래시백 자체를 인지하는 것은 결국 플래시백이 종료된 다음이다. 따라서 창숙의 갑작스런 등장은 환상작인 느낌을 가지게 되며 창숙과 아름의 만남은 아름이 봉완의 과거를 조우하고 있다는 경험을 준다. 결국 봉완은 창숙의 등장과 동시에 다시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며 창숙의 한 마디에 다시 모든 게 무너진다. 자신의 불륜은 이미 다 끝난 일이라고 해주에게 장담했던 말도 거짓말로 되돌려지고 공과 사를 구분하고 같이 일하자고 아름에게 했던 말도 번복한다. <그 후>에서 삼자대면은 봉완에게 항상 버거운 진실과의 대면이며 여기서 자포자기적 감정은 폭발한다. 봉완은 결국 아름과 창숙 앞에서 울음을 터뜨린다. 그렇게 홍상수는 실재들로 구성된 세계란 나약하기 그지없다고 말한다.

 아름이 눈을 응시하는 장면은 <그 후>의 두 번째 포스터로도 사용되었다

아름이 눈을 응시하는 장면은 <그 후>의 두 번째 포스터로도 사용되었다 ⓒ 콘텐츠판다


이제 아름은 봉완과 창숙을 뒤로하고 출판사에서 책을 한 꾸러미 챙겨 택시에 몸을 싣는다. 봉완과 창숙에게는 과거로 돌아가는 하루, 해주에게는 남편의 불륜을 알게 된 하루, 아름에게는 폭력과 모욕을 당한 이상한 하루가 끝나간다. 아름은 출판사에서 가져나온 책이 소중하다는 듯 택시 실내등을 켜고 읽어내려 간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갑자기 함박눈이 내린다. 아름은 창문을 반 쯤 열고 창 밖에 흩날리는 눈을 응시한다. 삶의 주인이 아니라고 믿는, 언제 죽어도 괜찮다고 믿는, 그리고 세상 모든 것이 영원히 아름답다고 믿는 아름은 오늘도 그리고 그 후도 단지 저마다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이 장면이 지금 한국영화의 장면들 중 가장 아름다운 장면 중 하나로 남게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 후 홍상수 권해효 김민희 김새벽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현실의 공허한 공포를 떠올린 나는 다시금 마음을 다잡고 어디건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 보기로 결심했다" -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 「그 남자」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