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서 가나니, 산 자여 따르라

'님을 위한 행진곡'의 끝 소절이다. 일찍 세상을 뜬 동지들을 그리며, 산 자들은 이 노래를 목놓아 불렀다. 살아서는 동지애가, 죽어서는 부채감이 남은 자들로 하여금 운동을 이어가게 했다. 운동은 이념과 이데올로기 이전에 사람과 관계의 문제였다.

지난달 28일 개봉한 영화 <박열>이 흥행할 수 있었던 것도, 박열과 후미코의 사연이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기 때문이다. 둘은 연인이자 친구였고, 동지였다.

후미코와 박열

 영화 <박열>의 한 장면.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영화 <박열>의 한 장면.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 메가박스(주)플러스엠


박열과 후미코는 박열이 쓴 '개새끼'라는 시를 통해 만나게 됐다. 아나키스트로서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었던 둘은 비밀결사 불령사를 조직해 보다 활발한 반제활동을 이어갔다.

그러던 중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자 불령사 회원들은 일시 검거됐다. 다행히 대부분 석방 조치됐으나, 박열과 후미코만은 천황 암살 계획 혐의로 구속된다. 이후 법정투쟁 끝에 둘은 나란히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수감됐다.

하지만 수감 직후 둘의 운명은 달랐다. 후미코가 옥중에서 석연찮은 이유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반면 박열은 22년을 복역한 끝에 풀려났다. 출소 후 박열은 해방정국에서 김구와 함께 윤봉길, 이봉창 의사 유해 송환 등을 맡는 등 납북되기 전까지 꾸준히 운동을 이어갔다.

"첫째, 동지로서 동거한다. 둘째, 운동 기간에는 후미코를 절대 여자로 대하지 않는다. 셋째, 한 사람이 타락해 권력자와 손을 잡는다면 동거를 끝낸다." (박열과 후미코의 <동거서약서>)

이렇듯 평생을 언약한 동지였으나 끝을 함께하지 못했던 박열과 후미코의 비극을 보며, 나는 문득 노무현과 문재인이 떠올랐다.

노무현과 문재인

 인권변호사 시절의 문재인 대통령과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인권변호사 시절의 문재인 대통령과 고 노무현 전 대통령. ⓒ 사람사는세상


노무현과 문재인은 군부독재에 맞선 투사였다. 변호사였던 둘은 함께 노동법률사무소를 차려 가난하고 소외된 노동자들을 위해 무료변론을 맡았다. 이후 노무현 변호사는 정계에 진출했고, 문재인 변호사는 부산에 남아 인권변호사로서의 활동을 꾸준히 이어갔다.

정치인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문재인은 청와대 민정수석, 비서실장을 맡아 노무현대통령을 곁에서 도왔다. 여섯 살 차이가 났으나, 청와대 시절에도 둘은 상하관계가 아닌, 동지이자 친구였다.

"사람은 친구를 보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아니고,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입니다" (노무현, 2002년 대선 부산선거대책본부 출범식)

2002년이면 문재인은 대중에게는 알려지기 전이었다. 반면 노무현은 유력한 대선후보. 그럼에도 노무현은 문재인을 앞세워 소개했다. 그만큼 둘은 서로를 신뢰하고 존중했던 것이다.

하지만, 노무현과 문재인의 이야기도 비극을 맞게 된다. 이명박 정부 출범 후 전직 대통령에 대한 검찰의 비인격적인 수사 끝에, 노무현 전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된 것이다. 문재인은 상주로서 친구 노무현의 마지막을 지켰고, 이후 '친구'의 유지를 받아 정치를 시작해 결국 대통령에 당선됐다.

후미코와 박열, 노무현과 문재인. 그들은 각각 제국주의와 군부독재에 맞선 투사들이었으며, 친구이자 동지였다. 그리고 둘 중 한 사람은 먼저 세상을 떠났다.

살아남은 자의 부채의식

 고 노무현 대통령의 제사를 지내는 문재인 대통령.

고 노무현 대통령의 제사를 지내는 문재인 대통령. ⓒ 연합뉴스


평생의 친구를 떠나보낸 박열과 문재인의 심정은 찢어질 듯 아팠을 것이다. 그러나 살아남은 자는 그저 슬퍼할 수 없었다. 후미코의 사망 소식을 들은 박열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절규하며 다짐한다.

"그래, 끝까지 살아남으마. 살아서 매 순간을 기억하고 또 기억해서, 언젠가 이 참상을 모조리 알릴 것이다." - 영화 <박열> 대사

실제로 박열은 22년 최장기 복역했고, 옥중투쟁을 이어갔다. 형무소 소장 후지시타가 박열의 행동에 감동받아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참회의 뜻으로 자신의 이름을 조선 이름으로 개명할 정도였다.

박열은 출소 후에도 운동을 지속했다. '민주주의적 건국의식' '사해동포적 세계협동' '근로대중의 동지' 등의 강령을 새겨 넣은 신조선건설동맹을 결성해 아나키스트로서의 활동을 이어갔으며, 김구를 따라 윤봉길, 이봉창 의사 유해 송환에도 힘썼다.

문재인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문재인 대통령은 <운명>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그를 만나지 않았으면 적당히 안락하게, 그리고 적당히 도우면서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의 치열함이 나를 늘 각성시켰다." - 문재인의 <운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계기로 정치 일선에 나서게 된 문재인은 당 대표를 맡아 당을 이끌었고, 두 번의 도전 끝에 결국 대통령에 당선했다. 취임 이후에는 '님을 위한 행진곡' 518 기념곡 지정 지시, 국정교과서 폐지 등 국민들의 열망을 정치에 반영함으로써, 두 달이 지난 지금도 국민들로부터 85% 이상의 높은 지지를 받고 있다.

살아남은 자에게 있어 슬픔은 친구를 위한 몫이고, 투쟁은 동지를 위한 의무인 것일까? 살아서는 우정과 동지애가, 죽어서는 부채감이, 살아남은 자들에게는 역경을 이겨내는 힘이 되고 결연한 의지가 됐다.

이는 박열이 22년 치욕을 이겨내며 앞날을 기다릴 수 있었던 이유였고, 문재인이 정치역경 끝에 대통령에 당선돼 개혁을 시작할 수 있었던 이유다. 많은 이들이 대선 전에도 '인간 문재인'을 믿고 기대했던 이유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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