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편 한 편의 영화로는 알 수 없는 영화감독만의 세계가 있습니다. 한 시대를 풍미한 국내외 영화감독들을 집중 조명합니다. 관심 있는 여러분의 참여도 환영합니다. [편집자말]
홍상수 신작 <그 후>(2017)의 주인공 봉완(권해효 분)은 '비겁한' 남자다. 아내(조윤희 분)와 출판사 직원 창숙(김새벽 분)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봉완은 가정을 포기할 수 없다는 신념하에 창숙과 이별을 결심하지만, 정작 창숙을 잊지 못해 괴로워한다. 그러던 중 봉완의 외도를 알게 된 아내가 새로 들어온 출판사 직원 아름(김민희 분)을 의심하는 불상사가 일어나게 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봉완은 변명만 줄줄이 늘어놓는다. 그리고 본의 아니게 아름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려고 한다. 참으로 한심한 남자가 아닐 수 없다.

 홍상수 영화 <그 후>(2017) 포스터

홍상수 영화 <그 후>(2017) 포스터 ⓒ 콘텐츠판다


홍상수 영화에 등장 하는 남자들은 대개 비슷하다. 대부분 대학 교수, 영화감독, 문학 평론가 등 지식인의 탈을 쓴 홍상수의 남자들은 사람들의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하게 만드는 온갖 지질한 양태를 보여 준다. 완전히 똑같다 할 수는 없겠지만, 복제된 유령처럼 홍상수 영화에 출몰하고 배회하는 지질한 남자들은 홍상수 영화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상징적 존재다.

흔히들 홍상수 영화를 지식인의 위선,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는 남녀의 지리멸렬한 사랑 이야기,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으로 규정하는 경향이 있다. 등장 캐릭터와 배우만 다를 뿐(사실 홍상수 영화는 출연 배우의 풀도 제한적이다) 매 영화마다 보이는 이야기도 늘 거기서 거기인 것 같다. 단적인 예로 불륜 관계를 맺었던 옛 연인을 잊지 못해 괴로운 나날을 보내는 봉완의 모습은 홍상수의 2번 째 영화 <강원도의 힘>(1998)의 상권(백종학 분),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2013)의 성준(이선균 분), <밤의 해변에서 혼자>(2016)의 상원(문성근 분) 외에도 홍상수 영화에 줄기차게 등장 하는 풍경이다. 아무리 홍상수가 '반복과 차이'를 스크린에서 제대로 구현하는 감독이라고 한들, 매번 바람난 남자와 그 남자 때문에 괴로워하는 여자의 이야기는 소재만 놓고 보면 지루함까지 느끼게 한다.

그런데 <그 후>의 봉완의 캐릭터는 지질하고 비겁한 홍상수 남자들의 원형에서 더 퇴보한 일면을 보여 준다. 지질하고 비겁하다 못해 야비한 모습까지 갖추었다. 아내에게 외도를 들킨 후 살기 위해 벌인 방편이라고 하나, 그 날 딱 하루 출판사에 근무했을 뿐인 아름에게 영화 내에서 벌어지는 모든 곤혹스러운 상황을 덤터기 씌우는 봉완과 창숙의 묘책은 홍상수의 그 어떤 영화의 장면보다 잔인하게 느껴진다.

 홍상수 영화 <그 후>(2017) 한 장면

홍상수 영화 <그 후>(2017) 한 장면 ⓒ 콘텐츠판다


변하지 않는 홍상수의 지질한 남자들, 그럼에도 변화가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 이후 단편 포함 지금까지 총 26편의 작품을 만들어온 홍상수 영화의 남자들은 언제나 그대로다. 그들은 도통 변하려고 하지 않는다. 아주 가끔 <자유의 언덕>(2014)에서 카세 료가 열연한 모리처럼 볼썽사납기보다는 귀여운 쪽에 가까운 예외적인 남성 캐릭터가 등장하기도 하지만, 그 역시 홍상수 영화의 모태가 되는 '찌질, 비겁'의 테두리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한다.

어떤 영화를 찍어도 지질하고 비겁한 남성들이 강조되는 홍상수 영화에서 그나마 여성들은 남성보다 훨씬 낫고, 긍정적인 캐릭터로 묘사된다. 개인적으로 홍상수의 수많은 필모그래피 중 흥미롭게 다가온 영화들은 남성이 아니라 여성 캐릭터가 중심이 되어 이야기가 흘러가는 작품이었다. 1, 2부로 나눠진 <강원도의 힘>의 1부 지숙(오윤홍 분) 파트, 4편의 옴니버스 형식으로 구성된 <옥희의 영화>(2010) 중 마지막 옥희의 파트, 이자벨 위페르가 출연한 <다른 나라에서>(2011),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밤의 해변에서 혼자>가 그랬다. 지질한 비겁함으로 가득 찬 홍상수 영화의 남자들과 달리, 결코 비겁하지 않은 홍상수 영화의 여자들은 그녀들만의 방식으로 용감하게 남자들이 벌인 불행한 현실을 감당하고자 한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하고 발버둥 친다고 한들, 부조리한 상황에서 도통 벗어날 수 없었던 홍상수 영화의 사람들은 홍상수 영화에 자주 등장 하는 소주만큼이나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돌이켜 보면 홍상수 영화는 언제나 비극이나 어정쩡한 현실 고문으로 끝난다. 정확히 <자유의 언덕>까지 그랬다. 공교롭게도 홍상수 영화 중 비교적 최신작에 속하는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자유의 언덕>은 일장춘몽으로 귀결되는 서글픈 아련함을 남긴다. 우울한 현실을 피하기 위해 꿈을 택했지만, 정작 그 꿈 안에서도 마냥 행복하지는 않은 것 같다.

 홍상수 영화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2015) 한 장면

홍상수 영화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2015) 한 장면 ⓒ 콘텐츠판다


그런데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2015)에서 부터 홍상수 영화는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한다. 전형적인 홍상수 남자의 탈을 쓴 춘수(정재영 분)는 홍상수 남자들이 늘 그랬듯이 우연히 길에서 만난 여성 희정(김민희 분)에게 치근덕거리고, 춘수의 적극적인 구애에 마음을 조금씩 여는가했던 희정은 그가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알고 크게 실망한다. 여기까지는 홍상수 영화에서 늘 보았던 장면이다. 2부로 넘어가는 순간 앞에서 벌어진 비슷한 상황들이 이어지는데, 희정을 대하는 춘수의 태도가 좀 다르게 보인다. 어떻게든 희정을 꼬이기 위해 온갖 감언이설을 늘어놓던 1부의 춘수와 달리, 2부의 춘수는 비교적 빠른 시간 내에 자신이 유부남임을 솔직히 밝히고 희정을 대하고자 한다. 그랬더니 1부와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판이한 결말로 나아간다. 본질적인 상황이 크게 달라진 것은 없지만 절망감만 도출해냈던 이전의 영화들과 달리 희망적으로 비춰지는 긍정적인 에너지가 서서히 흐르기 시작한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이후 발표한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2016)은 홍상수 영화에서는 난생 처음으로 완벽하고 낯 뜨거운 해피엔딩을 보여주기 까지 했다. 이와는 다르게 <밤의 해변에서 혼자>의 영희(김민희 분)는 여전히 외롭고 힘든 길을 혼자 걸어가야 하지만, 마지못해 일어나는 것 같았던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의 해원과 달리 <밤의 해변에서 혼자>의 영희의 발걸음은 한결 가볍고 당당하다.

근본적으로 바뀐 것은 없지만... 변화의 조짐들

다시 <그 후>로 돌아와, 김민희가 맡은 아름은 봉완이 운영하는 출판사 첫 근무 날, 아름을 봉완의 외도녀로 착각한 봉완의 아내에게 봉변을 당하고 갑자기 돌아온 창숙 때문에 단 하루 만에 일자리를 잃게 되는 엄청난 시련을 맞게 된다. 거기에 한술 더 떠, 봉완과 창숙은 아름을 봉완의 아내가 의심하는 불륜녀로 몰고 가 자신들의 위기를 타개하고자 한다. 참으로 한심하고 짜증스러운 상황이 절정으로 치닫을 즈음, 봉완의 출판사가 낸 책들을 잔뜩 들고 택시를 탄 아름으로 전환한 홍상수의 카메라는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운 장면을 포착해 낸다.

홍상수 영화 중 이례적으로 클로즈업으로 담아낸 아름의 얼굴은 방금 온갖 고초에 시달린 사람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밝다. 단순히 아무 생각 없어 해맑아 보인다는 뜻은 아니다.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아름은 방금 자신이 당한 시련을 모두 하나님의 뜻에 맡기고 자신의 불행한 현실을 긍정하고자 한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다시 봉완의 출판사를 찾은 아름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봉완에게 먼저 축하 인사를 건네고 그의 안부를 건넨다. 아무 일도 아니었다는 듯이 지난 날 있었던 안 좋은 일들을 덤덤하게 털어놓는 봉완과 창숙은 한결 편안해 보이며,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 질 것이라는 아름의 믿음처럼 진짜 괜찮아 보인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부터 <그 후>까지 홍상수의 영화의 인물들은 늘 괜찮지 않았다. 뜻하지 않은 불운과 마주한 주인공들은 현실을 애써 부정하거나 마지못해 살아가는 체념적 태도로 세상을 바라본다. 그래서 홍상수 영화는 언제나 개운치 않은 씁쓸한 뒷맛을 선사한다. 좌절, 절망, 체념은 염세적 세계관으로 똘똘 뭉친 홍상수 영화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요소인 것 같았다. 그런데 그런 홍상수 영화가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부터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홍상수 영화 <그 후>(2017) 한 장면

홍상수 영화 <그 후>(2017) 한 장면 ⓒ 콘텐츠판다


여전히 홍상수 영화의 인물들은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에 좌절하고 절망하고 힘들어한다. 그러나 요즘의 영화들에서는 조금씩 체념 대신 조금 더 솔직하고 진솔하게 자신에게 닥친 위기에 맞서려고 한다. 본질적으로 변한 것은 없다. 다만, 세상을 바라보는 인물의 태도가 조금 달라졌을 뿐이다. 그것만으로 홍상수의 영화는 훨씬 밝아지고 포근해지고 있다. 매번 비슷해 보이고, 극적인 변화는 없지만 조금씩 달라지는 홍상수 영화들. 필모그래피 자체가 '반복과 차이'인 홍상수의 작품 세계에서만 느낄 수 있는 재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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